두산 임재철의 글러브(사진 오른쪽)가 팀을 살렸다(사진=두산) |
프로야구에서 노장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꼭 있어야 하는(성적이 좋은) 선수’, ‘있는 둥 마는 둥 한(성적이 나쁜) 선수’ ‘있으면 나쁘지 않은(성적이 그저 그런) 선수’다.
올 시즌 기록만 보자면 두산 임재철은 ‘있으면 나쁘지 않은 선수’였다. 그도 그럴 게 올 시즌 임재철은 7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9, 29안타, 10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보직이 외야 백업요원임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팀 내 야수진 사정을 들여다보면 임재철은 ‘있는 둥 마는 둥한 선수’였을지 모른다. 두산엔 김현수, 이종욱, 정수빈, 민병헌, 박건우 등 뛰어난 외야수가 많다. 38살의 외야수 임재철이 파고들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임재철은 70경기에 출전했지만, 그의 선발 출전은 19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력 그리고 리더십까지 고려한다면 임재철은 ‘꼭 있어야 하는 선수’였다.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임재철은 야수로선 다소 나이가 많은 38살이지만, 넓은 수비 범위와 뛰어난 타구 포착 능력이 돋보이는 외야수”라며 “특히나 어깨가 무척 강해 메이저리그 야수와 견줘 절대 떨어지지 않는 정확하고 강력한 송구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재철이 우익수로 출전한 경기에선 우익수 쪽 안타가 터져도 2루 주자가 홈으로 대쉬하기 어렵다. 임재철의 빠르고, 강력한 송구 때문에 객사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임재철이 빛나는 건 리더십이다. 임재철은 야수조의 최선참이다. 그럼에도 후배들이 다소 흔들리면 가장 먼저 뛰어가 등을 두들겨주고, 가장 먼저 구장에 나와 훈련에 임한다.
두산 황병일 수석코치는 “대개 선배들이 ‘나를 따르라’라는 일방적 명령을 내린다면 임재철은 ‘내가 먼저 모범을 보일 테니 따라오려면 따라오라’는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실천한다”며 “타석에선 2할5푼대 타자일지 몰라도 라커룸에선 타율 3할5푼 리더”라고 칭찬했다.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임재철은 어째서 자신이 두산에 ‘꼭 있어야 하는 선수’인가를 실력으로 증명했다.
어둠 속의 가상 배팅
두산 베테랑 외야수 임재철(사진=두산) |
“LG는 정말 좋은 팀이에요. 아마 어려운 승부가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 팀이 꼭 이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지켜보십시오. 제 예감이 맞는지, 틀리는지.”
10월 16일. 잠실구장.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임재철을 만났다. 경기 전 타격훈련을 마치고 유니폼 소매로 연방 굵은 땀방울을 닦던 임재철은 “플레이오프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상대 팀 LG에 대한 칭찬 먼저 했다. 그리고선 “내 예감은 거의 틀린 적 없다”며 “왠지 우리가 이길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두산 선수이니만큼 자기 팀의 우세를 점치는 건 당연했다. 설령 LG 쪽이 우세할 것이란 예감이 들어도 두산 선수라면 누구나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할 게 자명했다. 하지만, 임재철은 “그냥 예감이 아니라 확실한 이유가 숨어 있는 예감”이라고 밝혔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많은 분이 ‘넥센과 준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혈전을 치러 두산 선수들의 체력 소모가 크다. 그래서 LG가 더 유리하다’고 하시는데요. 사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팀 야수들과 투수들이 젊은 편이에요. 체력 회복이 저 같은 베테랑보단 빠릅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에 2패 뒤 3연승을 하며 선수들 모두 자신감이 붙고, 팀 분위기도 무척 활기차졌습니다. 제 경험상 단기전은 역시 체력보단 정신력 싸움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팀 정신력이 LG보단 앞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테랑 임재철의 ‘예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두산과 LG 야수진을 통틀어 포스트 시즌 경험이 팀 동료 홍성흔에 이어 두 번째로 풍부한 선수였다. 1999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처음 포스트 시즌에 출전한 뒤 지난해까지 총 8시즌 동안 44경기에 출전했다. 홍성흔의 10시즌·85경기에 비하면 포스트 시즌 출전 경기수가 다소 적지만, 임재철은 “되레 벤치에서 큰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차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며 “포스트 시즌 경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임재철의 예감은 적중했다. 두산이 4대 2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임재철은 당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LG 선발투수가 우투수 류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벤치에 앉아 동료 선수들의 플레이에 힘찬 박수를 보내며 출전 선수 못지않은 열의로 팀 승리에 일조했다.
1차전이 끝나고, 조명탑의 불이 거의 꺼졌을 무렵. 대부분의 선수가 구장을 떠난 가운데 한 선수가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라운드를 돌기 시작했다. 그는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고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뒤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마운드를 정비하던 구장 관리원에게 투구하는 시늉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구장 관리원이 빙그레 웃으며 가상의 공을 던지자 타석에 서 있던 사내는 힘껏 스윙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내는 임재철이었다.
“오늘 경기에 나가지 않아 체력이 남아돕니다(웃음). 저 같은 백업요원은 언제 경기에 나갈지 모르니까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요. 타석에 서 봐야 감을 유지할 수 있죠. 가뜩이나 내일 LG 투수가 레다메스 리즈니까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올 시즌 리즈한테 강했거든요(웃음).”
올 시즌 임재철은 리즈를 상대로 6타석 4타수 2안타 2볼넷을 기록했다. 타율 0.500, 출루율 0.667의 좋은 성적이었다. 혼자 남아 개인훈련하는 열의를 보였지만, 2차전에서도 임재철은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이날 경기에서 두산은 LG에 0대 2로 졌다.
경기가 끝나고서 임재철은 “우리 타자들이 오늘 부진을 반드시 3차전에선 되갚을 것”이라며 “만약 LG 투수로 좌완 신재웅이 등판한다면 내가 공격의 물꼬를 트겠다”고 다짐했다.
“페이크 번트 슬러시, 열흘 동안 준비했다."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가거나 재활 중일 때도 임재철이 기자만 보면 항상 물은 건 하나였다. "오늘 우리가 이겼습니까?"였다(사진=두산) |
예상대로였다. 3차전 LG 선발은 좌완 신재웅이었다. 올 시즌 신재웅은 두산전에 5번(선발 3번) 등판해 3승 1패 평균자책 2.81을 기록했다. 야구계는 그런 신재웅을 가리켜 ‘두산 킬러’란 별명을 달아준 터였다.
두산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두산 김진욱 감독은 1, 2번 타순을 우타자로 채웠다. 덕분에 임재철은 2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할 수 있었다. 임재철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3회 말이었다.
LG에 0대 1로 뒤지던 두산은 3회 말 무사 1, 2루 찬스를 잡았다. 타석엔 임재철이 들어섰다. 3루 주루코치에게서 사인이 나오자 임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기 번트가 분명했다. 1사 2, 3루가 된다면 3번 김현수, 4번 최준석이 버티고 있기에 득점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LG 내야진도 이를 의식해 전진 수비를 펼쳤다.
번트 자세를 취했던 임재철은 신재웅이 투구하는 찰나, 1루수가 번트에 대비해 앞으로 뛰어 나오자 생각을 바꿨다.
“벤치에선 초구 보내기 번트 사인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 경험상 여기서 번트를 잘못 댔다간 3루로 뛰던 주자가 죽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순간 ‘페이크 번트 슬러시’를 강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타구가 1루수 키를 넘기거나 옆쪽으로 빠지면 안타가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임재철의 판단은 탁월했다. 보내기 번트를 의식해 전진 수비하던 1루수 이병규의 옆으로 타구가 스쳐 지나며 공은 우익수 이진영 앞까지 굴러갔다. 1사 2, 3루가 최상의 시나리오였던 두산 벤치는 무사 만루가 되자 쾌재를 불렀다. 결국 무사 만루에서 두산은 3점을 내며 3대 1로 LG에 리드하기 시작했다.
사실 순간 판단력이 만든 안타였지만, 임재철은 준플레이오프부터 이날 경기 전까지 혼자서 페이크 번트 슬러시를 연습해왔다.
“꼭 한 번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를 대비해 열흘 전부터 페이크 번트 슬러시 연습을 했어요. 배트가 없으면 가상의 배트를 손에 쥔 채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나리오를 떠올렸죠. 그 순간이 실제로 찾아오자 긴장보단 자신감이 생기더군요(웃음).”
두산 리더 임재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임재철의 경험이 다시 빛난 건 4회 말이었다. 2사 무주자 상황에서 임재철은 LG 두 번째 투수 임정우로부터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 1루로 출루했다. 대개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면 두 번째 타석에서도 서두르게 마련이지만, 임재철은 낚시꾼이 뚫어지게 줄을 보듯 임정우의 유인구를 인내심 있게 지켜봤다.
“(임)정우는 좋은 투수예요. 하지만,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어린 투수예요. 2아웃까지 잘 잡았으니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질 수도 있다고 봤어요. 일단 공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운이 좋았는지, 예상이 맞았는지 볼넷으로 출루할 수 있었습니다.”
2사 1루에서 임재철은 정수빈의 3루타 때 홈을 밟았다. LG 우익수가 ‘국민 우익수’ 이진영이었기에 다소 무리한 주루일 수 있었다.
“아웃될 수도 있었죠. 그런데 (정)수빈이가 스윙할 때부터 홈까지 뛰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 나이가 38살이지만, 아직 다리는 죽지 않았습니다(웃음).”
임재철의 득점으로 두산은 3대 1에서 4대 1로 도망가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6회 말에도 임재철은 1사 1루에 볼넷으로 출루하며 공격의 물꼬를 텄다. 노볼 1스트라이크에서 얻은 볼넷이었다.
“정우가 절 앞선 타석에서 볼넷으로 출루시킨 부담감이 남아 있을 것으로 봤어요. 초구 스트라이크 다음에 볼이 들어왔을 때 가운데로 쏠리는 공이 아니면 기다리자고 생각했어요.”
임재철은 정수빈의 번트 안타 때 2루를 밟았고, 최주환의 우익수 앞 안타에 다시 홈을 밟았다. 이날 결승 득점이 임재철의 발에 의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대형아, 제발 홈까지 뛰어라!’
두산 외야수 임재철의 송구는 리그 최고로 꼽힌다. 금주, 금연은 기본인 철저한 자기관리가 낳은 결과다(사진=두산) |
임재철의 진가는 수비에서도 발휘됐다.
두산이 5대 4로 앞선 9회 초 1사 2루. 타석엔 정성훈이 섰다. 이날 2안타를 기록한 정성훈은 타격감이 무척 좋았다. 가뜩이나 두산 투수는 올 시즌 정성훈이 3타수 2안타를 기록했던 정재훈이었다. 만약 안타가 터진다면 2루 주자가 리그에서 가장 발 빠른 이대형이었기에 동점은 시간문제였다.
“딱!”
정성훈의 타구가 좌익수 방면으로 날아갔다. 안타였다. 2루 주자 이대형은 3루를 밟은 뒤 홈으로 질주했다. 원정 응원석 LG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동점이 되길 기도했고, 홈 응원석 두산팬들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제발 동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현수의 부상으로 좌익수로 포지션을 이동했던 임재철은 과연 정성훈의 타구가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1사 2루가 됐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발 내 앞으로 공이 날아왔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이)대형아, 제발 홈까지 뛰라’고요. 왜냐고요? 제 앞으로 공이 오고, 대형이가 홈으로 뛰면 반드시 잡는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실제로 제 앞으로 공이 왔을 때 속으로 ‘OK, 됐다’ 했어요.”
임재철의 자신감이 통했다. 정성훈의 잘 맞은 타구는 원바운드로 임재철의 글러브에 들어왔고, 임재철은 지체없이 공을 홈으로 던졌다. 임재철 특유의 낮게 깔리는 빠른 공이 원바운드로 포수 최재훈에게 전달됐다.
이대형은 혼신의 힘으로 홈으로 대쉬했지만, 임재철의 송구보다 빠를 순 없었다. 결과는 아웃. 뒤이어 이병규의 우전 안타 때 우익수 민병헌의 총알 송구로 다시 2루 대주자 문선재가 홈에서 아웃되며 두산은 5대 4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임재철은 5차전이 끝나고 수훈선수(MVP)로 뽑히지 못했다. 후배 정수빈의 차지였다. 임재철은 혼자 더그아웃에 나와 그라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정)수빈이가 받아야 해요. 수빈이의 안타와 호수비가 없었다면 우리 팀이 졌을지도 모르니까요. 거기다 수빈이는 계속 경기에 출전해야할 선수예요. 자신감이 더 붙으려면 수훈상을 받아야 합니다. 전 팀에서 바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웃음)”
그리고선 오른쪽 어깨를 돌리며 환한 표정으로 “보셨죠? 제 어깨,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하고 농을 던졌다.
올 시즌을 끝으로 임재철은 두산과의 계약이 끝난다. 내년이면 그의 나이 39살이다. 하지만, 야구계가 여전히 임재철을 리그 최고의 외야수이자 리더로 평가하는 건 그의 말마따나 강한 어깨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보다 동료 먼저 챙기는’ 그의 리더십이 유효한 까닭이다.
임재철은 “아직도 두산이 이길 것 같은 예감이 있느냐”는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짧게 이야기했다.
“뚝심의 두산 아닙니까. 말이 필요없습니다(웃음).”
운도 조건이 충족돼야 찾아오는 법이고, 찾아온 운 역시 준비가 돼야 성공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38살의 베테랑 외야수 임재철은 우리에게 그걸 그라운드에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