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color="#b03f21">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br />- H의 결혼에 부쳐 (김영하)<br /><br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br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촌에 작은 낚시집이나 하나 열어서 살아가는 꿈.<br />또는 땡중이나 수도승이 되어 산사의 목어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꿈.<br />백두대간 봉우리 하나쯤 잡아서 산장지기를 하며 늙어가는 꿈.<br />그때는 그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br /><br />가끔 세상은 나를 성가시게 하고<br />인연이 없는 여자들은 매몰찬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지.<br />스무살 무렵에는 유난히 그런 일이 많은 법이지.<br /><br />가끔,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네.<br />마음 주지 않는 여자나 허망하게 무너진 추운 나라 때문에<br />음습한 거리를 청바지에 손을 꽂은 채 헤매기도 했을 것이네.<br />그런 때면 하늘은 너무도 청명하여 새들조차 날아다니지 않지.<br /><br />스무살 무렵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네.<br />무인도에 함께 가자던 초등 학교 동창생들이 그립고<br />공주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짝궁이 그립기도 하지.<br />심지어 무던히도 두들겨패던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이 그립기도 하지.<br /><br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반갑기만 했지.<br />수화기를 들 때마다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네.<br />이별을 고하는 전화,<br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전화,<br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화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지.<br /><br />토악질로 범벅된 입영전야.<br />자아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br />그런 노래를 부르며 밤새 거리를 헤매며 누군에겐지 모를 발길질을 해대며<br />눈물을 뿌려댔어도 그땐 외롭지 않았네.<br />대가리박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br />화장실에서 삼켜버리는 소보루 빵맛도 기가 막혔지.<br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정겹기도 했을 것이네.<br /><br />스무살 무렵, 세상은 언제나 낯설었지.<br />사람들은 바삐 떠나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지.<br />맑스 떠난 자리에 푸코가 들어앉고<br />조용필은 21세기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데도 사라졌네.<br /><br />군복을 벗고 찾아온 교정에는<br />막바지 진달래만큼이나 싱싱한 젊음들이 배타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네.<br />시험지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을<br />그때쯤 깨닫게 되지.<br />남몰래 도서관에서 시험지 채우는 연습을 하는 동안<br />세월은 시험지 채우기보다는 쉽게 흘러가지.<br /><br />스무살 무렵. 어떤 여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지.<br />인간이 얼마나 바보스러워질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그런 여자.<br />그런 여자는 포기할만하면 다가와 은전처럼 말을 흩뿌리고 지나가네.<br />그래서 상처는 더 오래도록 곪아가지.<br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 마음 속에는 두려움마저 생기네.<br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누이가 되고 간호교사가 되지.<br /><br />그런 여자를 만난 가을이면 음악은 소금이 되고 마음은 염전이 되지.<br />염전의 물을 퍼내느라 하루종일 수차를 돌리는 세월.<br />그 세월이 오래면 짜디짠 소금처럼 음악들을 사랑하게 되고<br />그 음악들은 하나둘 상처 위로 내려앉아 감각을 퇴행시키지.<br />산울림과 조용필, 들국화가 귓전을 떠나지 않게 되고<br />어느새 음악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br /><br />그런 여자를 만난 겨울이면 서가에는 책이 쌓일 것이네.<br />지리산 토끼봉을 넘어 변산반도로 뛰는 사랑,<br />사랑하는 여자가 조총련이어서 간첩이 되는 사랑,<br />독일인의 사랑,<br />구월산 재인말에 천기로 스며들던 묘옥의 사랑,<br />그런 사랑들로 마음을 다스리네. 그러나 참 추운 겨울이었네.<br />그런 겨울이면 친구들은 군대로, 외국으로 하나둘씩 떠나가네.<br /><br />그러다 봄이 되면 모임들을 기웃거리기도 했네.<br />함께 세미나를 하고 거리로 달려나가거나<br />어두운 뒷골목 소주집에서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네.<br />여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을 가로질러....<br /><br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 선배 들은 그럴 때 참으로 아름다웠네.<br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소주를 따라주던 그런 선배를 죄스럽게 훔쳐보면서<br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에도 세월은 차곡차곡 흘러갔네.<br />그 선배들도 하나둘 교정을 떠나고 말지.<br />도서관에 처박혀서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거나<br />양복입은 남자와 거리를 거닐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br /><br />어느 비오는 날 아침,<br />쓰린 속을 만지며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br />갑자기 이젠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br />그럴 때 둘러본 책장의 책들 위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있고<br />지난 1년간 단 하나의 음반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br />마음을 아리던 여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으며<br />지난 며칠간 단 한 통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지.<br />이십대가 간 거지.<br /><br />비록 아직은 나이에 ㄴ 자가 들어가지 않는다해도<br />실질적인 이십대는 서해 낙조처럼 부질없이 스러져갔다는 걸<br />자신만은 잘 알게 되는 거지.<br />무심코 뒤져본 지갑 속에선 옛 친구들의 명함이 비져나오고<br />그들의 이름은 거개가 한자로 적혀있곤 하지.<br /><br />우편함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신인의 카드들이 들어있기 시작하지.<br />왜 청첩장에는 부모 이름이 적히는 걸까.<br />고개를 갸웃거리다가<br />말없이 백색 아트지로 된 그 종이들을 서랍 속에 밀어넣게 되지.<br /><br />문화적 삼십대는 그렇게 시작하네.<br />사람이 그립지만 막상 만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네.<br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게 되는 것도 그 무렵이네.<br />밤마다 열쇠로 따고 들어오는 자취방은 보일러를 켜도 스산하기만 하지.<br />시리즈 비디오를 빌려보게 되고 반쯤은 다 못보고 반납하게 되고<br />가끔 극장가를 배회하기도 하지.<br /><br />그럴 때 한 여자를 만나게 되지. 이제 바보짓은 하지 않아도 좋네.<br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지만<br />세월은 사람을 허투로 관통시키지 않기에<br />이제 다소는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사랑을 고백해보게 되지.<br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줄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br />인간이 만든 최악의 제도라던 결혼이 차악으로 보이게 되는 것도 그 쯤이고<br />서로를 간헐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더벅머리 친구보다<br />지속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반려가 더 나아보이는 때도 그 무렵일 것이네.<br /><br />스무살 무렵에는 여자의 매력이 마음을 데우지만<br />이제는 여자의 아픔이 용기를 북돋게 되지.<br />스무살의 전장에 묻고 왔다고 믿었던 부장품들이 옷장 속에서 기어나오지.<br />열정, 질투, 희망 따위.<br />말없고 단정하던 그녀가 자신에게만 응석을 부리기 시작하지.<br />월급을 탄 그녀가 중저가 브랜드의 티셔츠를 사다주면<br />그게 쑥스러워 일부러 옷자락을 바지 밖으로 빼어내서 입고 다니지.<br /><br />하늘의 빛깔은 여전히 어둡고 앞날은 불투명하지만<br />그래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게 되지.<br />소설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네. 코미디 영화가 좋아 지네.<br /><br />그래도 가끔 스무살 무렵을 생각하네.<br />밤새 술 마시던 골목을 지날 때면, 그때 읽던 책을 책장에서 치울 때면,<br />가끔 담배를 피워대네. 그땐 그래도 자유로웠다, 고 생각하지.<br />오, 그때의 그 자유가 얼마나 버거웠는지,<br />얼마나 성가셨는지,<br />얼마나 사람을 환장케했던 지를 생각하면서<br />이제 더 이상 그 자유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네.<br /><br />어느날 자리에서 일어나 면도를 하게 되지.<br />면도날을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그녀가 사다준 면도거품을 정성껏 바르고<br />뜨거운 물을 세면대에 받아서 말이네.<br />그리고는 머리를 깎고 몸에 잘 맞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고 황급히 달려가네.<br />꼭 황급히 달려가야만 하네. 그게 어울리네.<br />그렇게 달려가면 거기 신부가 역시 이상한 옷을 입고 피곤한 표정으로 기다리네.<br /><br />그때 잠시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다본다네.<br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를 것이네.<br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br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br />긍정하기로 하자."<br /><br />그러나 머리를 세차게 내젓고 걸어가 신부의 손을 잡네.<br /><br />서른살 무렵에 다시 은둔을 꿈꾸지.<br />그 은둔은 스무살 무렵의 은둔과 다른 새로운 은둔일 것이네.<br />새로운 은둔의 동반자와 함께 걸어나가네.<br />드보르작의 한여름밤의 꿈이 울려퍼지네.<br /><br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br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br />당신이 부럽네. 축하하네. 이제 새로운 세계로 걸어가게.<br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토악질하고 부둥켜 안고 울기를 바라네.<br />그래야 마흔이 되어도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네. 안 그런가?</font></div> <div><font color="#b03f21"></font> </div> <div><font color="#b03f21"></font> </div> <div><font color="#b03f21"></font> </div> <div><font color="#b03f21"></font> </div> <div>고 김광석 님의 노래가 인생의 길목마다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는 느낌. </div> <div>돌이켜보면 왠지 뿌연 안개가 시선을 막연하게 흐리게 했었던것 같은 지난 기억들이네요.</div> <div> </div> <div> </div> <div>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잔잔하지만 압도적으로 제 삶속에 들어오는 듯한 글이네요.</div> <div> </div> <div>오랜만에 읽어보고 퍼왔습니다. <br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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