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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동의 중학교에 입학하려던 신씨는 돈 한 푼 없이 전세방을 전전하는 가족들을 보며 결국 진보면에 남아 중ㆍ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갔다. 다행히 제대 후 유공자 혜택을 받아 농협에 취직했고 3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7년 전 정년퇴직 했다. 그는 "그래도 두 아들을 안동에서 공부시켰고, 조부 고향인 축산면에 기념관이 생기고 생가도 복원돼 고마운 일"이라며 웃었다.
신 장군의 후손들이 굴곡진 삶에 허덕일 때 문명기 일가는 승승장구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명기는 유년 시절 영덕으로 이주해 1907년 지품면에 제지공장을 차렸고 금광을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1935년 금광을 처분한 돈 12만원 중 10만원을 일본 육ㆍ해군 비행기 구입비용으로 헌납해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본력을 등에 업고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문명기는 막대한 자본력과 인맥을 활용해 자녀와 손주들을 지원했다.
종손 문태준(87)은 1950년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한 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연세대 교수가 됐다.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정ㆍ관계로 발길을 넓혔다. 4선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세계의사협회 회장,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도 두루 섭렵했다.
항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씨가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자택에서 어머니 김분연씨와 함께 1962년 신 장군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문명기의 친일전력이 묵인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강구면에서 만난 박모(84)씨는 "군사정권 시절 손자(문태준)가 국회의원이었는데 누가 친일행적을 문제 삼으려 했겠느냐"며 "아직도 문씨 일가를 두려워해 다들 말을 아낀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79ㆍ여)씨는 "문씨 일가로부터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많아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행적을 들추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세기 전 숨진 친일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얘기다.
출처 |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0813044809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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