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한페이지 단편소설(
http://www.1pagestory.com )에 제가(닉네임 : 상상예찬) 올렸던 리뷰를 그대로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 몇 일 전에 「아치와 씨팍」에 대한 글을 보고 옮겨온 것이구요, 다소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있는 시놉시스 정도와 몇몇 사건들의 대략이 담겨 있습니다.)
「아치와 씨팍」.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포스가 범상치 않다. 범상치 않은 것은 제목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세계의 에너지원이 고갈되고 '똥'이 새로운 에너지원이 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부는 사람들의 왕성한 '배변활동'을 권장하기 위해 똥을 쌀 때마다 마약성분의 '하드'를 제공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양아치에 변태, 돌연변이 등 제대로 된 인간들이 없다.
영화는 시놉시스부터 주인공들이 하드 중독으로 인해 돌연변이가 된 '보자기 갱단'에 대항하게 되는 영화의 종반부까지 온통 개념없는 설정 투성이다. 음담패설과 육두문자가 남발하고 누가봐도 노골적인 장면에 그저 웃기는 영화이려니 하고 들어온 몇몇 관객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만을 보고 「아치와 씨팍」을 섹스 코미디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분명히 꽤 선정적인 장면들이 등장하고 있고, 성인등급을 받아 마땅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아치와 씨팍」은 영화 전반에 걸쳐 관객들을 개념없이 웃게 만들거나, 당황스러움에 곤욕을 치르게 하는 것을 떠나 굉장히 진지한 영화다.
# 선(善)도 정의(正義)도 없는 나쁜놈들
그렇다. 영화에 등장하는 (양)아치와 씨팍을 비롯, 보자기 갱단이나 정부의 수뇌부까지 하나같이 나쁜놈들 뿐이다.
에너지원 확보를 위해 국민들에게 정부차원에서 마약을 나눠준다는 것도 개념없는 짓이고, 그 마약에 중독되어 돌연변이, 저능아 무리가 되어 버린 보자기 갱단이란 단체(?)도 개념없다. 아치와 씨팍은 공중 화장실에서 배변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드를 '삥' 뜯어 생활하고 감옥은 이미 깡패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런 도덕도, 선도, 정의도 없는 가운데 에로배우 '이쁜이'의 항문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이쁜이를 쟁탈하기 위한 정부와 보자기 갱단, 그리고 아치와 씨팍의 삼파전이 벌어진다.
물론, 주인공이 나쁜놈인 영화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당장 생각나는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네이크 아이」라던가, 유오성, 유지태, 김성제 주연의 「주유소 습격사건」이 있다. 하지만 부패한 경찰로 분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결국 정의를 택했고, 「주유소 습격사건」은 스톡홀롬 증후군처럼 주인공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는 배경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치와 씨팍은 그런 게 없다. 오로지 잘 벌고, 잘 살고 싶은 생각이 전부인 나쁜놈들이다. 영화 종반으로 가면서 가치관이 변하게 된다던가 하는 일 따위는 없다. 이쁜이는 자신의 항문에 벌어진 일로 '하드 장사'가 잘 되자 아치와 씨팍을 깡패들에 넘기기까지 하고 정부의 수뇌부는 자신들이 제공한 하드로 인해 돌연변이가 된 보자기 갱단을 소탕하는데 여념이 없다.
# 개념없이 웃긴 영화
나쁜놈들 투성이인 「아치와 씨팍」은 시놉시스부터 시작해, 웃음을 선사하는 장면까지도 개념없이 웃기다. 휴머니즘의 근본이 음담패설과 육두문자에 있다는 주장을 줄곧 펼쳐왔던 필자에게 「아치와 씨팍」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영화였다.
욕 빼고는 도무지 대화가 안되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펼쳐낸 심각한 사태를 - 삼류포르노 감독인 친구(?)에게 하드를 과다복용시켜 갱단의 본거지에 침투시켜 복수를 꾀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 웃기게 그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영화 자체는 그렇게 포복절도하리만큼 웃기지는 않다. 미친듯이 웃었다가는 「아치와 씨팍」에 담겨진 진지함을 놓칠 게 뻔하다는 듯이 말이다.
# 오뎃샤 계단 패러디, 그리고 문제의식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분명 무슨 영화의 패러디인 건 같은데 어떤 영화의 무슨 장면이었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필자는 그 장면의 패러디를 결국 「아치와 씨팍」의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사적으로 「전함 포템킨」은 세계 영화사에, 그리고 기법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을만큼 훌륭한 영화다. 특히 오뎃샤 계단의 처절한 장면은 칭찬에 인색한 평론가들마저 입에 침이 마를 새 없이 그 훌륭함에 대해 극찬한다.
필자는 「아치와 씨팍」의 감독이 오뎃샤 계단을 패러디함으로써 감독 자신의 영화사에 대한 지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아치와 씨팍」의 가치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단순히 오뎃샤 계단 패러디 뿐 아니라 당장 언제 직면할지 모르는 에너지 고갈 사태, 그로 인해 겪게 될 공황, 위정자들의 위선과 주먹구구식 정책으로 인한 부작용 등에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치와 씨팍」은 내적, 외적으로 '실'한 영화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국내 애니메이션이 그만큼 진일보했고 그 내용 역시 기법 못지 않게 꽉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욕설이 난무하고,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비난받는 현실은 꽤 달갑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하나의 좋은 영화가 다분히 감정적인 - 예를 들면 애인과 함께 보기 힘들다는 따위의 이유로 거부 당하는 일은 없어야 될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이미 2500자가 넘었다. 세 줄 요약하겠다.
* 「아치와 씨팍」은 좋은 영화다. 왠만하면 한 번쯤 봐주시라.
* 비위가 약하시거나 보수적인 사람은 관람을 자제하시라.
* 스크린 쿼터는 유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