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30분. 9시 강의, 이번에도 지각이면 교수는 가차없이 내 성적표에 F를 먹일 것이다.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늘 그렇듯이 만원버스는 종종 내 발목을 버스 앞에서 머뭇거리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25분쯤 도착했던 버스는 이미 사람이 한가득이다.
버스 앞에서 망설이다 승차거부를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기사가 나를 외면한다.
담배나 피울까.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는 내 눈에 저쪽에서 뛰어오는 여자애가 하나 보인다.
무릎 위 10cm쯤 올라가 있는 짧은 치마를 입은 그 여자애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한 20살이나 21살쯤? 아마 나와 같은 처지인 듯 보이는 그 여자애는, 초면이 아니다.
1학기 때도 종종 봤던 얼굴이었다. 1학기 때는 매주 수요일 아침, 2학기 때는 매주 화요일 아침.
사방천지가 논두렁인 교외의 두 아파트 단지, 나는 C아파트고 그녀는 D아파트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스토커는 아니다.
버스정류장에 가려면 언제나 D아파트를 지나야했기에
어느 날 아침 D아파트의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그녀를 본 적이 있을 뿐.
또 어느 날은 과 행사 때문에 일찍 강의를 빼먹고,
인문대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는데 인문대 앞에 있는 연못쯤을 누군가가 걸어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 여자애다. 그렇게 밝지 않은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여자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놈의 학교, 평지에 좀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찡그린 얼굴이 꽤 이쁘장하다는. 웃으면 얼마나 예쁠까하는.
버스가 왔다. 그녀가 먼저 올라탄다. 별로 망설임도 없다. 나도 뒤따라 올라탄다.
계단을 다 올라서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쪽으로 돌아선다.
본의 아니게 계단 밑에 선 내 이마께를 그녀의 가슴이 어른거린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누구에게 들킬까,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끝내 말을 붙여보지는 못한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리면 꽤 먼 거리의 종합강의동까지 달리느라 정신이 없다.
1년이 그렇게 갔다.
12월 고등학교 동창 모임. 생일을 맞은 녀석도 있고, 송년회를 일찍해버리자는 녀석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일찍들 모였다. 밥을 먹고 술 한잔을 하고, 물 만난 고기떼마냥 떠들어대다가 밤 10시를 맞는다.
교외에 사는 나는 막차를 놓치면 꽤 난감한 상황이 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에 섰다.
그리고 멀찌감치 교복치마 비슷한 긴 치마를 입고 선 여자, 나는 그녀가 누구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여자애다.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따라 같이 내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담배가 또 땡긴다.
사람들의 반대쪽 인도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D아파트의 입구앞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도로를 건너며 차를 보는 척 뒤를 돌아다 봤다. 그 여자애가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다.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땅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담배의 불꽃이, 마치 불꽃놀이하듯 땅바닥에 수놓아진다.
그러고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가 알려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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