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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hil_6190
    작성자 : 에티카의정신
    추천 : 3
    조회수 : 470
    IP : 115.22.***.157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3/07/16 00:07:19
    http://todayhumor.com/?phil_6190 모바일
    마르틴 하이데거의 슈피겔 인터뷰-2
    슈피겔
    1933년 이후에도 당신에게는 유태인 학생들이 있었다. 몇몇 유태인 학생들과의 관계는 매우 애정 어린 것이었다고 하는데.

     

    하이데거
    1933년 이후에도 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로 망명한, 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헬레네 바이스(Helene Weiss)는 프라이부르그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인과성과 우연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논문은 1942년 바젤에서 출간되었다. 서문의 말미에 저자는 "우리가 이 글의 1부에서 논의한 현상학적 해석을 위한 시도는 그리스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아직 출간되지 않은 해석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적고 있다. 원한다면 그녀가 직접 손으로 쓴 헌사가 적힌 논문을 여기서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죽기 전 여러 차례 바젤로 그녀를 방문했다.

     


    철학자 야스퍼스

    슈피겔
    당신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1933년 이후 이 관계가 모호해졌다. 그 이유는 야스퍼스의 아내가 유태인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는 풍문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하겠는가?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와 나는 1919년부터 친구가 되었다. 1933년 여름 학기 동안에는 하이델베르그로 그와 그의 아내를 방문했다. 1934년에서 1938년 사이에도 칼 야스퍼스는 "애정 어린 인사와 함께" 출간되는 그의 모든 책들을 보내주었다.

    슈피겔
    당신은 프라이부르그 대학 철학교수직의 유태인 전임자였던 에드문트 후설의 학생이었다. 그는 당신을 정교수직의 후임자가 되도록 추천해주었다. 틀림없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텐데.

    하이데거
    그렇다. <존재와 시간>의 헌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슈피겔
    물론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 관계 역시 모호해졌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하이데거
    핵심적인 관점에서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 후설은 막스 셸러(Max Scheler)와 나에 대한 관계를 청산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것은 다른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나는 그처럼 공개적인 방식으로 나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도록 후설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슈피겔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는가?

    하이데거
    후설은 베를린 체육 궁전에서 학생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에리히 뮈샴(Erich Muehsam)이 베를린의 큰 신문 중 하나에 그것을 보도했다.

    슈피겔
    지금의 논의에서는 그러한 대립 자체가 흥미를 끌지는 않는다. 1933년까지는 그러한 대립이 없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울 뿐이다.

    하이데거
    조금도 없었다.

    슈피겔
    사람들은 <존재와 시간>의 5판을 발행하던 1941년에 당신이 원래 있던 후설에 대한 헌사를 삭제했다고 비난한다.

    하이데거
    사실이다. 나의 책 <언어에의 도상(途上)>에서 그렇게 된 사정을 해명했다. 나는 거기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응하기 위해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겠다. 92쪽에서 언급된 <존재와 시간>의 헌사는 1935년의 제4판까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1941년 출판업자가 5판의 인쇄에 출판 금지와 같은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38쪽의 주(註)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아래서, 그 판에서 헌사를 삭제한다는 니마이어(Niemeyer) 사장의 제안과 요청에 마침내 동의하게 되었다. 그 주(註)는 사실상 헌정의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다음의 연구가 사태 자체를 열어밝히는 데에 몇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갔다면, 필자는 그것을 일차적으로 에드문트 후설에게 힘입은 것이다. 그는 프라이부르그 대학교 교수시절, 세밀한 개인지도를 통해서 그리고 미발표된 연구들을 자유롭게 맡겨주어 필자로 하여금 현상학적 탐구의 여러 상이한 분야들에 친숙하도록 만들어주었다'(<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62쪽)".

    슈피겔
    그렇다면 당신이 프라이부르그 대학의 총장으로서 명예교수인 후설이 대학 도서관이나 철학 세미나 도서관에 출입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이데거
    중상 모략이다.

    슈피겔
    후설에 대한 그러한 금지를 지시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러한 소문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하이데거
    그것도 잘 모르겠다. 거기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건을 통해 그런 모든 일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다. 총장으로 있을 때, 나는 정부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해임을 요구하던 임상의학의 책임자인 탄하우저(Thannhauser) 교수와 나중에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화학 교수 폰 헤베시(von Hevesy)를 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지켜냈다. 내가 그들을 지켜내려고 하면서 동시에 명예교수이며 나의 선생님인 후설에 대해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학생들과 강사들이 탄하우저 교수를 겨냥해 시위를 벌이는 것을 막았다. 오래 동안 적체돼있던 사(私)강사들은 그 때가 바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 문제로 나를 찾아와 그럴듯하게 말했을 때, 나는 그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쳤다.

    슈피겔
    당신은 1938년 후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이데거
    거기에 대해 좀 얘기해야겠다. 내가 후설과의 관계를 먼저 깼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것이다. 1933년 5월 나의 아내는 우리의 변함없는 감사의 마음을 적은 편지를 우리 둘의 이름으로 후설 부인에게 썼다. 우리는 그 편지를 꽃다발과 함께 후설에게 보냈다. 후설 부인은 형식적인 감사와 함께 퉁명스럽게 회신했다. 그녀는 우리 두 가족간의 관계는 끝났다고 적었다. 후설이 병석에 눕게 되었을 때와 사망했을 때 다시 한번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나의 인간적인 실수이며 나는 그것에 대해 편지를 통해 후설 부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슈피겔
    후설은 1938년에 죽었다. 1934년 2월 당신은 벌써 총장직을 사임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이데거
    그 때 나는 어떤 일을 전개시켜 나가야만 했다. 기술적인 대학의 조직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즉 학부를 내부에서부터, 그것의 본질적인 임무에 근거해 쇄신하기 위해, 나는 1933/34년 겨울학기의 학부 학장으로 당내에서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젊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분야에서 탁월한 동료들을 임명하도록 제안했다. 그래서 법학부에는 에리히 볼프(Erich Wolff), 철학부에 샤데발트(Schadewaldt), 자연과학부에 쇄르겔(Soergel), 의학부에는 전(前)해에 총장직에서 축출된 묄렌도르프교수가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성탄절 무렵에 이미 내가 제기한 대학의 쇄신은 동료 내부의 반발과 당의 반대로 실행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였다. 예를 들어 동료들은 내가 대학 운영의 책임 있는 자리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는 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당연한 일일뿐이다. 어느 날 나는 칼스루헤(Karlsruhe)로 불려갔다. 거기서 장관은 나치 지역 학생 지도자를 대동한 그의 정부 요원을 통해 법학부와 의학부의 학장을 당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다른 교수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장관이 자신의 요구를 고집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고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그게 1934년 2월이다. 그 당시 총장들은 2년 이상 직위를 유지했지만, 나는 10개월만에 물러났다. 국내외의 언론들은 새 총장 지명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보도했지만 나의 사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슈피겔
    제국 장관에게 대학의 개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는가?

    하이데거
    언제 말인가?

    슈피겔
    1933년 루스트(Rust)가 프라이부르그로 갔던 시찰에 대한 소문이 있다.

    하이데거
    서로 별개의 두 가지 사건이 관계되어 있다. 쇄나우(Schoenau)의 슐라게터(Schlageter) 기념 행사에서 장관의 짧은 공식 환영사가 나의 소개로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 나는 1933년 11월 베를린에서 장관과 면담했다. 나는 그에게 학문과 학부의 새로운 가능한 형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가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잘 이해했기 때문에, 내 설명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외국 정부들이 히틀러를 승인하고 그에게 외교적인 의례적 정중함을 보여주기 위해 앞다투고있던 바로 그때 내가 제국의 교육 장관과 면담한 것이 왜 그렇게 비난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슈피겔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과의 관계가 바뀌었는가?

    하이데거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나는 스스로를 가르치는 일에만 한정했다. 1934년 여름 학기에는 <논리학>을 강의했다. 그 다음 학기(1934/35)에 처음으로 횔더린 강의를 시작했다. 1936년에는 니체 강의를 시작했다.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것들이 국가 사회주의와의 대결이라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슈피겔
    총장 이취임식은 어떻게 열렸나? 그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하이데거
    그렇다. 참가하길 거절했다.



    역사학자 리히터

    슈피겔
    후임자는 고용된 당원이었는가?

    하이데거
    그는 법학자였다. 당(黨) 신문인 <알레만 사람>(Alemanne)은 그의 임명을 "첫 번째 국가 사회주의자 대학 총장"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슈피겔
    당(黨)은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가?

    하이데거
    계속해서 감시당했다.

    슈피겔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

    하이데거
    그렇다. 한케(Hanke) 박사의 경우에

    슈피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이데거
    그가 제발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1936/37년 겨울 학기에 이미 학위를 받았고, 1937년 여름 학에는 나의 상급반 세미나의 일원이었다. 그는 비밀 경찰(SD)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자였다.

    슈피겔
    왜 그가 갑자기 당신을 찾아 왔는가?

    하이데거
    1937년 여름학기 나의 니체 세미나와 거기서 연구가 전개되어나가는 방식 때문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더 이상 감시 임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의 교육 활동과 관련해 당시의 상황을 내가 깨닫도록 해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슈피겔
    당(黨)은 그런 식으로 당신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계속 유지했는가?

    하이데거
    나는 다만 예를 들어 <플라톤의 진리론>과 같은 나의 글들이 토론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1936년 봄 로마의 독일 연구소에서 열린 횔더린 강연은 히틀러 청년단의 잡지 <의지와 힘(Wille und Macht)>에서 상투적인 방식으로 공격받았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1934년 여름 크릭(E. Krieck)의 잡지 <발전하는 민족(Volk im Werden)>에서 시작된 나에 대한 논란들을 읽었을 것이다. 나는 1934년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 철학 학술 대회의 독일 측 대표에 들어있지 않았다.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데카르트 학술 대회에서도 제외시키려고 했다. 파리에서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쪽 대회 책임자인 소르본 대학의 브레히에(Br hier) 교수가 직접 내가 왜 독일 대표단에 포함되어있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나는 대회 책임자가 이 문제에 대해 제국의 교육장관에게 문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베를린에서 뒤늦게 대표단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초청장이 왔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나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와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는 제목이 없는 표지에 쌓여 몰래 판매되었다. 1934년 이후에 나의 총장 취임 연설은 당(黨)의 사주에 의해 판매대에서 즉시 회수되었다.

    슈피겔
    그 이후에 더 나빠졌는가?

    하이데거
    전쟁의 마지막 해에 모든 영역에서 5백 명의 가장 중요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전시 봉사에서 면제되었다. 나는 면제된 자들에 속하지 못하고 오히려 1944년 여름 라인강 저편의 참호공사를 명령받았다.

    슈피겔
    칼 바르트( Karl Barth)는 다른 편, 즉 스위스 쪽에서 참호 구축을 했다.

    하이데거
    그 일이 진행된 방식이 재미있다. 총장이 모든 교직원을 함께 불렀다. 그리고는 그가 말하는 것은 나치 지역 책임자와 협의한 내용이라는 짧은 연설을 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교직원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완전히 면제되는 자들, 두 번째는 반만 면제되는 자들, 세 번째는 면제되지 않는 자들. 완전히 면제되는 첫 번째 부류에 나와 그리고 리터(G. Ritter)가 호명되었다. 라인강에서의 참호공사가 끝난 후인 1944/45년 겨울 학기에 나는 <시작(詩作)과 사유>라는 제목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 강의 연속인, 즉 국가 사회주의와의 대결의 연속인 강의를 열었다. 두 번 째 강의가 끝난 후 '민족 돌격대'에 징집되었다. 교수단의 소집된 인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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