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준씨 분신 결심은 설 전후(前後)
"황우석 사랑은 유별났지만 그런 남편이 싫지는 않아"
이복재 기자
지난 4일 06시경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가자! 광화문으로 동학혁명으로`를 외치며 분신한 고 정해준씨의 장례대책를 맡고 있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 재개를 위한 범 국민연합"은 5일 유가족과의 장례절차에 대하여 고인을 뜻을 기리고, 유족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여 장례절차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대문 세란병원 영안실에서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옮겨 시민장으로 치르려는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족의 관계자는 "황 교수 지지자의 뜻도 일리가 있으나 현재는 조용히 치르고 싶고 특히 미망인께서 너무 힘들어 해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 정해준씨는 평소 남을 위해 봉사하고 특히 국가 중대사에는 적극 참여하고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품이었으며,지난 대통령 탄핵가결때도 대단히 분개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효자였고 아내에게는 세심하게 잘 대해 줬다고 한다. 유가족은 지금도 80세가 넘는 노모가 계시지만 노모가 받을 충격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분신 후 미망인은 고인을 따르겠다고 은연 중 비추기도 해 유족들은 미망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본지와 기자의 명예를 걸고 진실에 입각한 사실보도할 것을 약속한 후 어렵게 미망인과 인터뷰를 하였다. 평생을 법에 의존하지 않을것 같은 후덕한 모습에서도 잔잔히 한숨쉬는 미망인을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의 황우석 사랑은 유별났지만 그런 남편이 싫지 않아"
먼저 황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 황 박사를 적극 지지하지는 않았다. 중립적으로 생각하면 된다"면서 다른데로 시선을 돌린 후 "남편의 황우석 사랑은 유별났지만, 그러나 그런 남편을 싫어하거나 미운 생각은 한번도 안했다"고 말했다.
미망인은 황 교수에 대한 대화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들과 나(미망인)는 왜 그토록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황교수를 지지 하느냐고 말했을때 `내(고 정해준씨)몸이 망가지도록 황 교수를 도와야 한다.그래야 민주화가 앞당겨지고 나라가 발전된다`고 말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고인이 미망인에게 쓴 유서내용을 말해줄 수 없느냐고 묻자,미망인은 순간적으로 북받치는 설움으로 인터뷰가 중단되었고, 한참 후 미망인의 남동생 이승찬(전북 전주거주)씨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못난 남편을 만나 고생만 하는 당신에게 사랑하고 미안하다..."는 내용이 주로 적혀있었다고 말했다.또한 노모에게는 "병든 노모를 남겨두고 가는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는게 주 내용이라고 한다.
남을 돕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 섰으며,가정과 자녀 교육은 철저해
회계사인 고인의 장남 정모(33)씨가 인터뷰에 응해서 미망인과 이승찬씨와 대화가 이어졌다. 고인은 20대에 대한통운 기사로 해외에서 5년간 산업역군이었으며, 귀국해서는 줄곳 화물업계에서 근무하다 10여년 전부터 츄레라인 화물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특히 화물연대에서 노조간부로서 활동시에는 생업을 포기하고 근로자를 위해서 활동하였으며 유달리 소외계층을 위해서 봉사했다는 것이다. 성품은 올곧은 편이라 약한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장남인 정모씨가 서울대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때 "절대 실망하지 말고 가고자하는 곳에 가야 한다"고 용기를 심어줘, 방황을 하지 않게 되었고, 고인은 평소 문학을 좋아해 책 읽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면서 이런 아버지의 분신자결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어 지금까지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설 명절 가족과 대화중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설마,친지들 10여분에게 유서 남겨
분신하기전 아무런 연락이나 말씀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서 연휴를 보내는 중에 가족들의 대화가 있었다.그런데 아버님이 `살아가는데 힘든일이 있거든 절대로 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평소와 다르게 감정과 무게를 두고 말씀하셔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면서 "연휴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었는데 어머니 한테 전화가 왔었다.아버님이 울산에 간다고 나가셨는데 자가용과 신용카드,핸드폰 등 귀중품을 놔두고 가셨다고 말씀 하셨다"고 말했다.
정해준씨는 울산에 간다고 말했지만 울산을 들려서 서울로 온 것인지 곧바로 서울로 온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마음의 준비를 한것 같다는게 유족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황 교수의 진실이 가리는것이 늦어진다고 해서 목숨까지 끊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또한 고인의 죽임이 헛되지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료와 유서가 필요하다는 기자의 말에 나중에 꼭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경찰서에 제출시 타인에게 절대로 공개하지 말것을 진술서에 기록했다고 한다.그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고 정해진씨의 발인은 6일 오전 5시 30분에 서울대 영안실에서 고향인 부산으로 향하며,장지는 부산 영락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또한 모금관계는 너무나 조심스러워 어떤 단체든 계좌를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일부에서 고인이 술을 마시고 즉흥적으로 분신한 걸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다"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고인은 성격이 곧아서 불의를 못참지만 즉흥적으로 결정할 분이 아니며,항상 정의의 편에 서시는 분이다"라고 강조하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고인의 의로운 죽음을 두번 죽이는 짓을 중단하라"고 말했다.
정해진씨의 죽음이 이대로 묻혀서는 안된다는 기자의 말에, 미망인과 유가족들은 정치적 사안인 만큼 더이상 이슈화 해서는 안된다면서 언급을 회피했다. 인터뷰 내내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눈빛에서 소망하고 열망하는 것이 하루빨리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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