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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freeboard_1227272
    작성자 : 돈키후퇴
    추천 : 1
    조회수 : 1320
    IP : 211.36.***.203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6/01/12 06:34:14
    http://todayhumor.com/?freeboard_1227272 모바일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조사보고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보고서
    대한민국 국회법제사법위원회 1995.12.18 

    머리말 

    1949년 6월 26일의 白凡 金九 암살 사건은 아직도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는 현대사의 대표적인 未濟 事件이다. 백범이 서거한 지 4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암살의 배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왜곡과 굴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암살의 주범인 안두희는 범행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년도 채 못되어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하여 대위로까지 승진되었다가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한 후 이승만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군납사업으로 好衣好食하면서 떵떵거리고 살아온 반면,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며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애국자 백범 김구선생는 이승만정권 시절 용공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린  사실은 우리 역사의 왜곡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정권이 4.19 학생혁명으로 무너지자 비로서 백범암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 차원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안두희는 체포되어 구금까지 되었으나, 법률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호조치를 받다가 석방된 사실까지 있었다.  진상조사가 별 진전을 못보고 있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민간 차원의 진상조사 활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후 제 3,4,5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부 차원에서의 진상조사 요구를 꺼내지도 못한 채 민간에서 개인 혹은  단체들의 조사활동만이 간간히 이어져 왔을 뿐이다.   1992년 11월 5일에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 이라는 제목으로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조사 위원장  이강훈 외 24명으로부터 제출된 청원서가 박명환의원 외 23인의 소개로 우리 국회에 접수되었다. 국회의장은 위 청원을 1992년  11월 7일자로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였고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1993년 2월 17일 위 청원에 관해서 보고를 받고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청원심사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1993년 5월 14일 청원심사소위원회는 위원장 강신옥의원, 위원으로 박헌기, 정상천, 강수림, 이원형 각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를  열고 진술인 이강훈, 신용하, 김신, 김용희, 서영훈, 곽태영 등의 진술을 들었으며, 1994년 1월 4일 이 사건의 핵심적인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안두희를 불러서 조사하려 하였으나, 국회에 출석한 안두희는 이미 건강상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평소 자기에 관해 녹음하였다는 녹음테이프 120개를 가져 왔으므로 그 녹음테이프를 조사자료로 제출받아  그 자료를 녹취하여 이 사건 진상규명에 필요한 부분을 녹취서로 만들었다.   이 때부터 국회 차원의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 규명 조사소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계속한 결과, 1995년 12월 15일  소위원회에서 위원 변정일, 정기호, 박헌기 및 강신옥이 참석하여 그간의 조사결과를 보고서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은 현재까지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자료들과 증언들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이지만, 그 결론이 바로 역사적인  진실이라고 물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능한 한 진실을 밝혀내려고 노력하였으나, 백범선생이 서거한 지 46년이  지났는데다가 그 때 관계되었던 중요한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가셨고 살아있는 분들 마저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 실정이어서  조사의 어려움이 많았다.   다만 안두희가 단독으로 백범선생을 애국적인 동기에서 시해하였다는 그릇된 사실이 역사적인 진실인 것처럼 통용되어 오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국회 스스로 앞장서서 활동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후일 역사가들이 계속하여  이 문제를 연구하여 정확한 역사를 기술해 주어야 할 것이다.   1. 안두희와 관련자들의 증언 1) 1950년대 『弑逆의 苦悶』과 『査察要覽』 백범 암살에 관해서는 그간 관련자와 목격자의 다양한 증언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암살자 안두희의 증언이다.  안두희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증언은 그야말로 현대사의 곡절과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1949년 사건 직후 안두희는 체포되어 특무대의 심문을 받았으며, 또한 육군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안두희에 대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언론인 오소백의 공판참관기가 남아 있어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소백의 공판참관기에 나타난 안두희의 주장은 안두희 스스로 녹음한 『녹취서』(이하 『마지막 증언』으로  표시함)에서 전부 거짓이었다고 밝혔다.   백범 암살사건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시대'인 1950년대 내내 뇌관과 같은 폭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안두희는 1955년 갑자기  옥중일기를 출간하는데, 그것이 『弑逆의 苦悶』(學藝社, 1955)이다. 『弑逆의 苦悶』은 1949년 6월 27일부터 8월 2일까지  4일간을 제외한 33일간 안두희의 獄中日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출간 당시 안두희는 그의 옥중일기가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보존된 '기적의 유물'이라고 하였다.   안두희는 『弑逆의 苦悶』에서 꿈과 낙서, 성당의 종소리 등 유치한 수준의 문학적 표현을 하면서, 옥중경험은 물론 일제때의  중국생활, 귀국과정, 해방후 북한 생활, 월남과 서북청년회 활동, 한독당 가입과 김구 면담, 김구에 대한 회의, 암살의 불가피성 등  관련되는 내용 전반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僞作 여부이다. 당시 안두희는 1년전부터 구상하여 1954년 6월부터 구체적으로  출판작업에 착수하였다고 밝히고 있지만, 출판 당시부터 이미 '최근에 창작한 위조물'이라는 반론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안두희는  모략 중상이라고 극구 부인하였지만, 이번의 『마지막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명백하게 조작된 위서였다고 자백하고 있다.  즉, 안두희는 특무대의 김창룡·김일한 등의 권유에 의해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문장력이 있는 김이엽이 원고를 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최종 출간된 책은 안두희의 원고나 김이엽이 다듬어준 것과는 중요한 부분에서 판이하였다. 요컨대 이 책은 특무대에  의해 중요한 부분이 조작된 위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弑逆의 苦悶』은 역설적으로 僞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이야말로 안두희 선 이상의 암살의 진정한 주체, 즉 고위층의 정세관과 백범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정치적 성격과 관련된 출간시기도 검토할 만하다. 당시는 제3대 정부통령 선거(1956. 5. 15)를 앞두고 이승만정권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하는 야당의 대결이 심화되던 매우 정치적인 시기였다.  안두희가 책 출간을 결심하던 1954년 10월에는 '신익희 조소앙의 뉴델리회담설'이 유포되었고, 그해 11월 이승만 정권은  '四捨五入改憲'을 강행하였다. 또한 백범암살 사건을 잘 알고 있노라고 호언하던 서북청년단의 김성주가 원용덕에 의해  피살되었다(1954. 4. 17). 즉 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백범 문제가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에 『弑逆의 苦悶』 (1955. 10. 25)이 출간되었던 것이다.   안두희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출간 목적은 시중에 유포되고 있던 '대통령과 군부의 백범 암살 사주설'에 대한 대응으로, 암살의 배후는 없으며, 그가 나라를 위한 단심에 의한 확신범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시역의 고민』은 김창룡 등 특무대가  제3대 대통령선거를 위해 조작한 위서였다고 판단되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시역의 고민』를 분석하면, 안두희線 이상의  정세관과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한편 이승만정권 시절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에서 발행한 『査察要覽』(1955)에는 김구선생와 한독당이 공산당과 같은 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경찰의 왜곡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사찰요람』의 내용 중에는 한독당의 활동 가운데 산하조직인  大韓輔國義勇團(단장 金錫璜)이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에 적극 개입했다고 되어 있고, 1948년 4월 김구가 평양에 가서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赤色徒黨陣營'에 투항했다고 되어 있으며,   이 때 공산당 첩자인 兪鎭軾이 김일성 앞에서 "당신은 우리 삼천만 민족의 영도자 김구선생을 무시하고 있으니 내 권총에 죽어보라"며 거짓 위협 공갈함으로써 김구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고 하며, 海州에서의 2차 협상에 당원 姜勳 외 4명을 밀파하여  괴뢰집단의 결성을 지지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맹하여 민국정부를 반대한 점 등을 언급하면서 한독당의 이적성을  보여주려 하였다.  가장 희극적인 것은 김구선생가 김학규의 부하인 안두희에게 이승만을 암살하도록 지시했지만, 안두희가 번의하여 오히려 김구를 살해하였다는 대목이다. 또한 김구 피살 후에도 건국실천원양성소 출신 800여명이 군과 경찰에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학규가 재북중인 조소앙·엄항섭과 연결되어 한독당을 재건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므로 은밀히 내사중이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한편 이승만에 대해서는 1945년 10월 그의 환국을 언급하면서 "삼천만 민족의 태양으로서 남한정계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정권의 경찰정보 계통에서 김구선생와 한독당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는 여기에서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결국 1950년대는 『弑逆의 苦悶』과 『査察要覽』에서 보듯이, 이승만정권은 김구선생 암살에 대해  정당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했다.   2) 1960-80년대 관련자들의 증언 백범 암살에 관한 진상 규명 요구는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월 학생혁명 직후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5월 24일 고정훈은 군대에 있을 때 장은산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백범 암살사건은 임병직 신성모의 흉계이고,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문봉제의 부하였던 안두희로 하여금 살해케 했으며, 장은산은 6.25사변때 밀항하려다가 체포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사했다고 폭로했다. 이어서 고정훈은 암살사건에 이승만박사도 관련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세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1950.5.24, 5.26, 5.27).  6월 고정훈에 이어 박동엽은 [백범 김구 선생 참변 목격기 1-3]을 통해 세 번의 암살 시도를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고정훈이 주로 장은산과 김지웅을 핵심으로 지목하고 그 이상의 배후를 언급하였다면, 박동엽은 안두희 홍종만으로 대표되는 암살 하수인들의 역할을 분명히 밝혔다.  고정훈의 폭로와 박동엽의 증언은 4월 학생혁명의 여파속에서 백범 암살사건을 이승만정권을 청산하는데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켰고, 관련자들의 증언이 쇄도하였다. 1960년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한달 정도 암살 당시 헌병사령관 장흥,  부사령관 전봉덕,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안두희를 심문한 특무대의 노엽대위, 전 포병부사령관 이기련대령, 안두희의 변호인  김종만, 포병사령부 김천근중위의 부하 신북철, 독립운동가 김승학씨의 증언이 줄을 이었다.  8월의 증언의 결과 암살사건의 기본 줄거리가 잡혔는데, 고위층연락은 김지웅이 하고, 下手관리자는 홍종만이고,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배후로 지목되었고, 나아가 김성주 살해사건과  장은산의 죽음이 백범 암살 사건과 관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제기된 암살사건의 배후에서 문제는 이승만대통령의 관련 여부였다. 전봉덕은 사건을 보고하러 경무대에 가니 '이박사가 이미 알고 있더라'고 증언하였고([서울일일신문] 1960. 8. 12), 김학규 역시 '이박사가 배후 음모자'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일보] 1960. 8. 25). 이들보다 더 직접적인 언급은 김승학과 최대교의 증언이다.  김승학은 이박사를 자주 만나던 독립투사 최영호(崔榮鎬)가 찾아와서 '이박사 신성모 원용덕 등이 김구 선생 살해를 음모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고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서울일일신문] 1960. 9. 2) 한편 최대교는 영장발급 등 사건의 처리과정에 이승만의 개입을 의심할 수 있는 얘기를 하였다.   4. 19 일주년을 이틀 앞 둔 1961년 4월 17일 안두희는 김용희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용희는 안두희를 서울지검에 넘겨주었지만, 법률상 구속할 수가 없어서 보호조치로 호텔생활을 하다 석방되었다. 다만 안두희는 김용희에게 붙들려서 검찰에 넘겨지기 전에  김용희 앞에서 김구선생 암살 경위에 대하여 자세한 진술을 해놓고는 검찰에 넘겨지자 말자 태도를 바꾸어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후 65년 12월 22일 의혈청년 곽태영이 양구로 안두희를 찾아가 암살의 배후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습격했다.  그 때 안두희는 곽태영에게 헌병대 순찰과장 김병삼대위도 배후였음을 밝혔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와 백범 암살 사건의 중요한 증언이 있었다. 그는 암살사건의 공범자인 홍종만이었다. 그는 1971년  MBC 라디오의 다큐멘타리 드라마 [38선]에서 자신에 대한 부분이 왜곡되었다며 항의차 나타났다가 김용희에게 잡혔다.  그후 그는 암살사건에 대해 조금씩 말해오다가 1974년 5월 네번의 手記를 통해 암살사건을 전면적으로 폭로하였다.  이에 의하면 암살사건은 '김지웅 각본, 장은산 지시, 일부 정치인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개입'한 것으로 3차례의  계획 범행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검찰에 소환된 홍종만은 안두희 재판이 끝나고 난 뒤 김지웅으로부터 사례금을 받았음을  폭로하였다. 이미 1960년 하수인으로부터 들은 암살사건의 개요를 정리한 바 있는 박동엽은 홍종만의 폭로가  '진상과 같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안두희는 홍종만의 폭로가 사실 무근이며, 암살사건은 자신의 단독범행임을 여전히 주장하였다. 한 언론사의 주선으로  '역사의 두 증인'은 '극적 대면'을 하였으나, '이제는 진실을 말하도록' 권유하는 홍종만에게 안두희는 '나가지 안으면 폭행하겠다'고 응수하였다.   안두희는 『중앙일보』 1981년 12월 18일자 인터뷰기사에서 '백범 암살은 소문보다 사연이 복잡하다'며 최초로 배후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김창룡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는 지엽적인 사실만 밝힐 뿐 암살사건의 전모와 배후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1987년 4월 권중희가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안두희를 습격하자 '암살자 안두희'와 '응징자 권중희'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광복회' 등 사회단체들이 백범암살에 관한 진상 규명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3) 1990년대 안두희의 증언 1990년대에 들어와 안두희는 여러 번 증언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1992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한 민주화운동, 권중희 등의 연이은  억류와 증언 요구 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증언들은 상황에 따라 내용이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임의성과 진실성에  상당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언론마저 '특종' 다툼으로 안두희의 증언에 따라 다녀 더욱 혼란한 양상을 보였다.   1991년 10월 권중희에게 억류된 안두희는 자신이 미정보기관의 요원이었다는 식으로 미국의 관련성을 암시한 바 있고,  1992년 2월에는 효창공원의 백범 묘소에 눈물을 흘리며 참배하였다. 1992년에 들어와 안두희의 증언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그해 안두희의 증언은 4월 중순 3번, 6월 1번, 9월 2번, 총 6번이나 되었다.  1992년 안두희의 증언은 4월 12일 권중희에 의해 마련되었다.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 특종으로 보도된 당시 증언의 개요는  김창룡이 백범 암살을 지시하였으며, 암살 사건은 두 달간 집중 세뇌받은 계획 범행이고, 범행전 장택상의 소개로 미 OSS출신  중령을 만나 백범 암살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언론의 폭발적 관심으로, 4월 14일자 거의 모든 신문은  안두희의 증언과 백범 암살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런데 안두희는 권중희로부터 풀려나 4월14일 저녁 MBC TV에서 박경재 변호사와 인터뷰하면서 12일자 증언을 교묘하게 수정하였다. 수정내용은 크게 두가지인데, 암살사건의 배후로 김창룡 이외에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 김태선 시경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운하 사찰과장 등 4명을 더 지목한 점과 미국과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한 것이었다.   두 증언에서 국내 배후는 연속선상에서 추가한 것이며, 미국의 관련은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계속 신문들의  취재 대상이 된 안두희는 15일 그간의 증언을 절충하는 대답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정확하게 소속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군 중령과 반도호텔 등지에서 두 차례 만난 적은 있으나, 이들이 백범 암살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것이었다.   안두희의 증언이 연일 대서 특필되자, 언론에는 이후 한달 동안 증언의 진실성과 허실에 대한 여러가지 지적과 구체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먼저 미국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외교 관련자와 주한 미군 관련자는 관련설을 대체로 부인하였고, 반면 서총련 소속 대학생들은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고, 미문화원에 화염병을 던지기도 하였다. 국내의 배후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평가와 반론이 제시되었으며, 관련자의 유가족의 항의도 있었다.   국내 배후에 관한 안두희의 증언에서 문제점은 경찰쪽을 주 배후로 지적하고, 안두희가 소속된 군부쪽의 신성모 채병덕 장은산 전봉덕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안두희는 그해 6월 26일 백범 추모일에 김석용의 권유에 따라 암살사건에 관해서 증언하면서 백범 암살은 장은산이  직접 지시했고, 평소 장은산과 김창룡은 백범을 죽여야한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4월 증언과는 달라서,  배후에 장은산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사건의 또 다른 공범인 홍종만의 1974년 증언과 비슷한 것이었다.  권중희는 9월 23일, 24일 양일간 안두희를 구금하고 증언을 요구했다. 이 때 안두희는 백범 암살 6일전에 신성모 채병덕씨와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자신에게 윗사람 시키는 일 잘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했다.  그후 안두희는 테입 120개에 걸치는 방대한 분량의 증언을 남기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은 金奭鏞의 권유에 의한 [마지막 증언]으로 서울 정릉의 청수장을 비롯하여 여러 여관에서 장기 숙박을 하면서 녹음된 것이었다.  그간 안두희의 증언은 가지각색이었고 대체로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거짓된 증언이  『弑逆의 苦悶』이라면, [마지막 증언]은 그의 수준에서는 가장 진실되다. 때문에 암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이 [마지막 증언]을 중심으로 그간의 다양한 증언과 문헌자료를 검토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2. 암살사건의 전개  1) 안두희와 서북청년단·홍종만·김지웅 1947년 안두희는 신의주에서 월남하였다. 남한에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쪼끄마한 부락'에서 월남민을 심문하던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바로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의 안내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월남후 안두희가 처음 접촉한 단체는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李範奭의 민족청년단 등 여러 청년단체를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서북청년단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인 金聖柱와 문봉제 등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안두희는 서울에 온 지 석 달만에 서청에 가입하여, 서울 第一支部이며 본부 직속인 鍾路支部의 事務局長이 되었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좌익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차 반공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하던 단체였으며,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경찰과 군부는 빨갱이와 싸우는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도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당시 경무국장 趙炳玉 . 수도경찰청장 張澤相 등 경찰 수뇌부의 밀접한 지원 아래, 서북청년단은 경찰이 할 수 없는 성질의 대공투쟁을 담당하였다.  경찰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찬조금을 주거나, 소금 배급표를 몇 천장씩 주어 서북청년단과 그 간부들의 활동비를 보조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안두희는 경찰의 수뇌부 및 중견 간부들과 알게 되었다.   안두희는 이러한 경찰과의 인연을 넘어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의 金昌龍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1연대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김창룡은 소공동에 大陸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보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육군 중령 김일한이었다. 김일한은 안두희의 외가쪽 친척이자 고향 후배로서, 월남하여  인천 특무대 대장을 하고 있었다. 김일한은 안두희에게 대륙공사의 김창룡을 소개하였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에서 처외삼촌뻘이  되는 홍종만을 만나게 되었고, 홍종만은 김지웅을 안두희에게 소개했다. 김지웅은 안두희와 같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찌기 만주 관동군의 헌병통역 출신이며 중국 汪兆銘 정권의 고문을 역임했다고 자칭하고 해방후 귀국해서는 汪金山장군을 자처하면서  고급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던 과거 경력이 수상한 인물이었다.  홍종만 역시 김지웅의 지시를 받고 있는 정보에 밝은 사람이었다. 홍종만은 김지웅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지내는  형편이었다. 김지웅은 안두희의 첫인상에 대해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안두희는 김지웅과 홍종만의 영향을 받아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자신 스스로 정보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이후 김지웅 홍종만  안두희는 자주 회동하였다.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안동지는 애국자'라고 치켜 세워 주었고, 이들을 후암동에 있는 자택으로 데리고 가서 안두희를 각별하게 대접하는 등 안두희에게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여 안두희의 환심을 샀다.   김지웅은 '빨갱이 정보'와 더불어 한독당의 수상한 활동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안두희가 노덕술 등 경찰간부, 김일한 등  특무대에 알아 본 결과 김지웅이 제공한 정보의 정확성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제 안두희는 김지웅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결국 안두희는 월남후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편으로는 경찰 및 군 수뇌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뒷 날 백범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하는 김지웅, 홍종만 등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2) 암살계획의 실행 여러가지 정황과 증언을 고려할 때, 백범 암살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말∼1949년 초라고 할 수 있다. 김학규의 증언 ({血淚의 告白})에 의하면 1948년 12월 20일경 만주 봉천에서 만나 알던 崔 某라는 청년이 '서북청년단내 김구선생 암살단이  생겼다'며 '주의하라'는 제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말까지 경교장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김학규는 최모 청년의  실없음을 생각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불길한 예조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후 전개된 백범 암살 계획은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면서 구체화된다.  이 때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의 당위성을 세뇌시키기 시작하고 1949년 6월 세번에 걸쳐 암살계획을 실행하였다.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한국독립당에 가입을 주도한 것은 백윤호(홍종만의 고백에 나오는 白榮鎬와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와 홍종만이었다. 1949년 1월 백윤호는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찾아와 일주일간 머물면서 신세를 졌다. 백윤호는 김학규가  만주 봉천에서 韓人 부대인 長延民主自衛軍이라는 군대를 만들었을 때 그 군대의 대원이었다.   10여일 후 백윤호는 다시 김학규를 찾아와 당시 서북청년단 '태평로 시단장'이던 자신의 친구인 홍종만을 소개하면서 홍종만 등  서북청년단 청년들이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려고 한다며 이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학규는 서북청년단 태평로지부로  가서 이들 10여명의 입당식까지 거행해 주었다.   그후 김지웅과 홍종만은 안두희에게 한독당 가입을 권유했고, 홍종만이 안두희를 김학규에게 소개하면서 한독당 입당을  주선하였다. 그동안 홍종만과 안두희는 김학규를 불러내어 술대접을 하면서 김학규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김학규 앞에서 안두희는 백범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칠 수 있다는 등 명령만 내리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김학규와 김구를 존경하는 척 했다.  결국 김학규는 안두희와 홍종만의 꽤임에 빠져 이들의 암살음모를 모른 채 김구선생에게 안두희를 소개하였고  안두희는 김구를 만나 속마음을 숨기면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김학규는 자신의 고백에서 밝혔듯이 자신이 걸어온 길은 양심에서 살고 의리에서 죽는 독립운동 뿐이었으며 꼬불꼬불한  권모술수, 잔재주 따위의 일은 모른다며 청교도와 같이 순진, 정직 뿐이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간악한 小人之輩들이 자신의  순진성을 기화로 온갓 농락을 베풀어 급기야는 자기가 가장 공경하고 우리 동포가 가장 숭배 신임하는 김구선생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또 한국독립당을 때려부수기 위하여는 조직부장인 자신을 얼토당토 않는 구실을 꾸며 감옥에 쳐 넣었던 것이라고 {혈루의 고백}에서 밝히고 있다.   결국 안두희는 1949년 4월 14일자의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이 당원증은 나중의 군법회의 재판에 제출되어, 안두희가 문제의 '비밀당원'으로 인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밀당원의 결정적 증거는 당원증에 있는 문제의 '秘'字와  '군복을 입은 사진'이었다. 즉 재판에서 안두희와 홍종만은 군인이 정당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한독당은 비밀당원으로  특별히 관리하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홍종만과 안두희는 김학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김구와 한독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안두희 재판과정에서  홍종만이 제출했다고 하는 일기가 바로 이 활동을 보고한 정탐일기였던 것이다. 1949년 5월 중순 군산에서 열린 당원 단기강습회  개강식에 김구선생 이하 한독당 간부들이 참석했는데, 홍종만은 김학규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하여 군산과 전주까지 가서 이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며칠후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의사 비석 제막식에도 김구선생를 따라가 그 행적을 감시하였다.  5월 하순경 홍종만은 김학규를 찾아와 지리산으로 빨치산운동이나 하러 가자는 허위와 악의에 찬 제안까지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홍종만과 안두희는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김구선생과 한독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김지웅, 김태선 시경국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등에게 보고하였다.   백범 암살은 6월 말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1949년 6월 전후의 국내정세를 우선 간단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내의 정치정세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어수선하였다. 5월 17∼18일 서울시경의 崔雲霞사찰과장이  주도하여 李龜洙 崔泰奎 李文源 의원 등이 검거되었다. 당시 국회프락치사건은 군경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헌병사령부에 서 취급하고 있었는데, 노덕술, 최운하 등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에 파견되어 수사를 담당하였다.  6월 21일 金秉會 金沃周, 22일 朴允源 姜旭中, 黃潤鎬, 盧鎰煥 등이 검거되었다. 더욱이 6월 29일로 예정된 미군의 완전 철수와 북한의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결성 시도로 정국은 '총비상'이었다.  백범 암살의 첫 시도는 국회프락치 사건의 2차 검거가 진행중인 6월 23일이었다. 이날 홍종만 안두희 오병순 한경일 강창걸  독고녹성 정익태 한국상 이춘익 한봉수 등 모두 10명은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김구선생의 거소인 경교장에 숨어 있다는 것을  핑계로 김약수를 체포하려는 명분으로 경교장을 습격하여 혼란의 와중에서 백범을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였고, 김약수는 6월 25일 새벽 경교장이 아닌 종로구 운니동 金正業여인의 집에서 검거되었다. 당시 장은산은 암살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김지웅, 안두희, 홍종만은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장은산을  만났다. 장은산은 6월 25일 김구선생과 공주에서 건국실천요원 양성소 모임에 참석하게 되어 있으니, 그 중간지점인  수원 병점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하여 살해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나,  출발당일 새벽 공주경찰서장이 경교장에 전화하여 행사 개최를 허가할 수 없다고 통보했지만, 이 통보를 미쳐 모르던 암살자들은  현장까지 가 있었으나, 김구선생일행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그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날 저녁 장은산은 다시 안두희를 불렀다.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단독 범행을 지시하였다. 장은산의 '쌀쌀한 명령'에 안두희는  '그저 하겠시다'고 답변하였다. 장은산은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정부의 특별 테러단체인 藍衣社의 社則과 行動 慣例를 언급하면서, '만약 일이 실패하게 되면 너두 갈 수 있다'고 협박을 하였다.   안두희는 다음날 오전 10시에 집에서 나와 11시경 경교장 앞 자연장 다방에 들렀다. 다방에는 처음에는 조용하였지만 11시가  넘으면서 헌병들이 많이 들어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두희는 백범 암살을 다짐하면서 아주 천연스러운 태도로 경교장으로 들어갔다.   경교장에서 안두희는 비서들의 환대속에서 권총을 찬 채로 이층으로 올라가 백범을 만나 암살을 결행했다. 안두희는 암살 후 총을 계단에 던지면서 '제가 주석 선생을 시해했어요'라고 외쳤고, 이어 비서들이 안두희를 구타하였다. 곧이어 경교장 주위에 포진해  있던 헌병들이 들어와 안두희를 헌병사령부로 압송했다.   3) 안두희 심문과 당국의 수사 및 재판 백범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청년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백범의 유지를 계승하여, 통일독립에 더욱 매진하기로  결의하여, '남북통일' 등 통일염원을 담은 혈서들이 경교장으로 답지하였다. 또한 할복자살,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사람, 지방에서  수일간 달려온 사람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상객 중에는 신당동 해방촌에서 온 거지, 머리깍은 여승, 고구마팔던 할머니 등  문자 그대로 '걸객에서 장관'이 1분에 수십명씩 경교장에 출입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비통함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루어진 7월 5일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진실한 의미에서 전국민적인 애도속에서 치루어졌다.   그러나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당국의 수사는 국민적 비통함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안두희는 사건 직후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당시 헌병 부사령관인 田鳳德은 당일 오후 2시 '범인이 의식을 되찾는 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다음날 오전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었는데, 6월 27일 오전 국방부 보도과에서는 '진상은 목하 엄중 취조중'에 있으며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발표하였다.  ① 안두희는 한독당원으로 김구씨의 가장 측근자라는 것 ② 안두희는 누누히 김구씨와 상봉하여 직접 지도를 받던 자인 것 ③ 당일은 인사차 김구씨를 만나러 갔다가 언론 쟁투가 되어 격분한 결과 순간적으로 살의가 발생한 것  이러한 발표의 골자는 '안두희가 한독당 당내 분쟁으로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범행'이라는 것이다. 다음날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담화를 발표하여 '조사 결과 이번 범행이 하등 군내에는 관련성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발표의 가장 큰 문제는 안두희가 본격적으로 취조받기 이전의 것이라는 점이다. 안두희는 26일 헌병사령부에서도, 27일 군특무대에서도 본격적인 취조는 받지 않았고 치료만 받았을 뿐이다. 6월 27일 특무대로 이송된 후에도 환대를 받았으며, 곧 김창룡이 찾아왔다. 김창룡과의 만남은 취조관하구 피의자의 입장이 아닌 '커피 마시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기분으로  경어를 쓰는 반가운 회동'이었다.   이처럼 안두희에 대한 심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부당국의 발표 내용은 6월 27일 헌병사령부 및 국방부의 발표를 '한 입으로 말하는 것(如出一口)'처럼 반복하였다. 다만 상부 인사로 올라 갈 수록 '우려와 협박'이 추가되었을 따름이다.  이범석 총리는 6월 27일 호남 순찰중 목포에서 암살 사건 소식을 듣고 백범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일반 국민은 臆測과 夭言을  엄금하기 바란다'는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대통령 이승만은 6월 30일 더욱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암살사건을  한국독립당 당내 분쟁의 결과로 강조하면서도, 암살 동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김구를 위한 것이란 회괴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7월 1일에는 전봉덕 헌병사령관과 김태선 시경국장이 공동으로 [布告文]을 통해 '군경의 건재함에 신뢰를 갖고 항간에 유포되는  造言非語와, 사실을 왜곡 모략 선동함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하지 말며 군경에 절대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발표하였다.  이처럼 군대와 경찰은 국민들에게 엄중 조사할 테니 신뢰하라고 성명하였지만, 안두희는 특무대 김창룡의 특별 배려 아래  구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안두희를 위해 숙직실을 개조하여 '호텔과 같은 특별 감방'을 제공하였다. 안두희는 좋은 음식을 먹고 목욕까지 하고 신문도 보면서 편안하게 보냈다. 또한 부인 동생 등 가족은 물론 김창룡 . 포병사령부의 장교 등이 면회왔으며, 김지웅은 돈까지 주고 갔다. 이러한 과분한 대접은 안두희가 생각해봐도 '기가 막히는 모순'이었다.   그러나 특무대장 김창룡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창룡의 이러한 보호로 안두희에 대한 취조는 다만 형식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김창룡은 취조관으로 노엽대위와 이진용중위 두 사람을 안두희에게 소개하였고, 이들은 '안소위님'이란 경어를 쓰면서 담배를 권하고, '하기 싫은 말은 안해두 된다'고 권유하였다. 또한 홍종만, 김지웅, 장은산 등 세사람에 대하여 안두희가 진술까지 했으나, 수사관들이 안두희 상부는 더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였다.  즉, 안두희의 진술이 윗선으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고, 송치할 때까지 조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서명 날인하게 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수사관 노엽중령이 몇년 전 TV에 나와 수사 당시 김지웅이가 안두희를 면회올 때 자기가 외삼촌이라고  하면서 면회한 사실이 있고, 김지웅의 태도가 너무 건방져서 이진용 수사관과 함께 "저 새끼 구속해버릴까" 하고 상의까지  하였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그 배후를 조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증언을 한 것이 있다.   7월 20일 김구선생 암살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가 군당국에 의해 발표되었고 8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동안 안두희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안두희의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43조 군인의 정당가입 금지 위반과 金九선생을 살해한 혐의였다. 재판은  첫날 김학규에 대한 검사의 증인심문으로 시작되었다. 김학규는 비밀당원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증인으로 나선 홍종만이  안두희가 비밀당원임이 틀림없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안두희는 김구선생의 용공 이적성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고 애국적인 단심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고 그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안두희의 변호인들은 5.10 선거와 단정, 대한민국을 반대한 金九를 살해한 안두희의 범행목적과 동기가 정당했다며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즉, 변호인들은 "피고를 애국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반역자가 애국자를 살해할  수도 있고, 애국자가 애국자를 살해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안두희가 의식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고  또 자수하였으니 이를 많이 참작하여 2년 집행유예 판결을 바란다고 까지 했다. 이 때 법정 내에서는 박수소리까지 들렸다.   검사는 안두희에게 총살형을 구형하였으며, 재판장 원용덕을 위시한 재판관들은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한편 김학규는 6월 27일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킨 혐의로 헌병사령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그에 관한 재판은 현재 그 재판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확실한 혐의내용에 대한 것도 분명치 않지만, 안두희가 재판한 재판부에서 사건을 취급한 것이 아니고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의 장인이던 백홍석대령이 재판장으로 있는 다른 재판부에서 심리되었다.   그가 받은 형은 안두희와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15년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는 역설을 볼 수 있다. 그는 앞에서 밝혔듯이  암살자들의 꾀임에 빠져 안두희를 입당시켰을 뿐인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죄목이 되었던 것이고 안두희가 '안의사'라는 대접을  받으면서 독방에 당번이 돌봐주고 부인과 면회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복역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24시간 동안 수갑이 채워진 채  육군형무소 지하감방에 수감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 후 1년도 안되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점령되기 직전 27일 안두희는 당국의 지시로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한 반면에 김학규장군은 인민군이 입성할 때까지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인민군에 의하여 석방된 후 수원에 내려가서  이름을 숨기고 변장한 채 숨어살다가 몇년 뒤 정부당국에 발각되어 재수감된 후 4.19 때까지 복역한 비극적인 처우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김학규장군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김구선생이 가장 신임하는 애국자의 한 분이었는데, 이승만정권의  잘못된 사건 조작으로 김구선생 암살의 공범자 취급을 받았던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3. 암살의 배후  1) 국내의 배후 백범 암살의 배후에 대한 진상 규명은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이를 규명하는 데는 범인 안두희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조직적 정치 암살의 경우 몇 단계의 계통이 있고, 암살 하수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상부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 당시 관련자들의 소재와 활동, 사건의 뒷처리에 대한 개입과 태도, 안두희의 이후 활동에  대한 지원과 보장 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들을 동원해야만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안두희의 회고에서 볼 때 암살을 총괄 지휘한 사람은 '의혹의 모략군' 김지웅이었다. 김지웅은 사건 당시 안두희와 홍종만에게 자금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후 안두희를 면회와서 겸연쩍어 하면서 돈봉투를 주고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안두희는  김지웅의 '눈부신 부상'에는 배후가 있으며, 그것은 국가 고위층이라고 확신하였다.   결국 안두희는 암살 사건의 배후에 김지웅 이상의 선이 있다고 분명하게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상부의 동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고를 통해 암살의 배후인물로 국방장관 신성모, 외무부장관 임병직, 서울시장 김태선,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경무국장 조병옥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월남 이후 자신의 활동전반과 관련되어 이들이 거론된다는 사실이다. 서북청년회 시절 도움을 준 이들과 암살사건에 직접 관련된 이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론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먼저 경찰쪽을 보면,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시절 평소 노덕술, 최운하 등과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장택상, 조병옥 등 경찰수뇌부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택상과 조병옥은 안두희의 백범 암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은 김지웅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고 그 돈을 지원받은 김지웅은 홍종만 등과 같은  암살 관련자들에게 지급한 사실이 인정된다.   사건 당시 안두희가 소속되어 있는 군부를 보자. 먼저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암살을 직접 명령·지휘하였다.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은 장은산의 구체적인 지시와 개입을 너무나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장은산은 사건후 미국으로  유학갔으며, 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서 돌아와 '내가 안두희의 보스'라며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해 잘 안다고 주장하다 김창룡에 의해 '적전이탈'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중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사망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당시 헌병사령관은 장흥이었으나, 마침 사건 당일 성묘를 하러 시골에 갔기 때문에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이 안두희의 신병을  인수하고 안두희가 폭행으로 많이 다쳤기 때문에 조사는 하지 못한채 치료만을 해주었다. 또한 암살 당일 헌병들이 경교장 일대에 미리 배치된 것도 의혹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헌병사령부의 당직사관이었던 오석만중위와 사령관실에 근무하던 장석인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헌병사령부 순찰과장 김병삼대위가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1시간전인 오전 11시 30분경 사령부에 비상을 걸었으며 사령부 본관  뒤에 찝차와 스리쿼터에 헌병 15∼16명이 승차대기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2시 40분경 김병삼대위가 장석인에게 전화하여  백범 암살사건을 사령관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전봉덕 부사령관은 보고전에 이미 사령부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봉덕 부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을 보고하자 수사를 맡게 될 장흥 헌병사령관은 임정계통이고 김구와 가까우니까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전봉덕 부사령관을 사령관으로 승진 발령한 것도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에 개입한 사람은 총참모장 채병덕과 특무대의 김창룡이었다.  안두희는 그의 회고에서 사건전에 김창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사전 개입은 아직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김창룡이 사건의 뒷처리에서 누구보다 직접 개입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김창룡과 더불어 군부 고위층에서 적극 개입한 사람은 채병덕이다. 그는 헌병사령관 전봉덕에게 전화로 안두희의 특무대 이송을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안두희가 이송되자 특무대를 방문하여 이 사건 수사는 노엽과 이진용이 하도록 명령하였으며 홍영기  검찰관에게 구형은 10년만 하면 적당하다는 압력을 넣은 사실도 있다.  다음의 인물은 元容德이다. 홍영기 검찰관은 총살형을 구형하였으나, 재판장 원용덕을 비롯한 재판관들은 종신형으로  선고하였고, 그 후 원용덕은 안두희 암살사건을 잘 알고 있는 김성주를 죽였다(1954.4.17).  결국 군부에서는 장은산이 사전에 직접 명령·지휘하였고, 김창룡은 사건의 뒷처리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외 전봉덕, 김창룡, 채병덕, 원용덕, 김병삼 등은 외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윤곽의 범위로 볼 때 국방장관 신성모는 당연히 의혹의 대상이 된다. 신성모에 대해서는 고정훈이 이미 폭로한 바 있고, 암살사건을 보고받고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하며 반겼다는 최대교 당시 서울지검장 등의 증언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성모는  김창룡과 더불어 안두희의 수감생활을 보호하고, 그의 감형, 잔형 정지, 잔형 면제, 석방과 육군 복귀를 주도하였으며,  전쟁중 부산에서 안두희를 불러 모윤숙과 김활란이 보는 앞에서 생활비까지 제공하였다.   신성모의 개입과 관련하여 세간에서는 그가 주도하는 '88구락부'가 암살 사건의 진정한 배후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성모가 내무장관에서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 군부와 경찰관계의 핵심분자들이 상호간의 정보 교류란 명목으로 만든  것이 '88구락부'였다. 여기에는 신성모 이외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포병사령관 장은산, 김창룡소령,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정치인 김준연, 모략군이자 정치브로카 김지웅 등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백범 암살사건의 기획과 뒷처리에 나름의 역할로 적극 개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신성모는 4.19 직후 고정훈이 자신을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자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쓰러져 1960년 5월 29일 사망했다.  그런데 신성모가 사망한 이 날은 공교롭게도 이승만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미국의 그래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한국의 이상돈 국회의원이 미국 보스톤을 방문하였을 때, 이의원 일행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상돈의원에게 왜 이승만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했는지 아느냐고 묻고 자기가 알기에는 김구 암살  사건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도망온 것이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는 것을 이상돈 의원이 회고록에 밝힌 것이 있다. 헨더슨은 암살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독당에 대한 와해공작과 암살사건의 계획 및 실행에 깊숙히 개입한 것은 김지웅이었다. 그는 안두희가 수감된 후 재판과정에서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까지 조언해주는 등 사건의 마무리에도 깊숙히 개입하였다. 그는 1950년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조작한  자였고 4.19 직후 백범암살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지자 60년 8월 22일 밀항으로 일본의 福岡으로 도망쳐 '내가 김구암살의 주모자' 라는 이유로 정치망명을 요청하였다.   일본정부에서는 그의 망명 요구를 받아주지 않고 밀입국자로서 처벌받고 풀려났다. 일본 중의원에서도 김지웅 문제가 제기되어 많은 논란도 있었다(1966년 3∼4월).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에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역시 이승만대통령의 관련 여부이다. 이 문제에 관한 안두희의 증언은 '오락 가락' 하고 있다. 그는 1961년 4월 김용희에게 체포되었을 때, '이태원 육군형무소에 있을 때 이박사가 날 잘 봐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권중희에 의한 1992년 9월 증언에서 사건 발생 일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경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방부 장관에게 애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어라"고  격려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안두희는 이 진술을 부인해 버렸다.   이승만의 개입에 대한 다른 사람의 증언과 주장을 들어보자. 이승만의 고문이었던 올리버 같은 사람은 이승만이 이 사건과  관련 없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승만이 직접 암살을 지시한 증거나 증언은 없다. 그러나 관련되는 간접적인 증언은 적지 않다. 조소앙은 사건 며칠 전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 빨갱이가 잠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백범이 몸가짐을 신중히해야 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다음 최대교의 증언이 있다. 최대교의 증언요지는 홍종만 등 7명에 대한 영장이 당시 서울지검장이던 자신을 통하지 않고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하였으며 한격만 서울지방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했는데, 이것이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라는 것이었다. 최대교의 증언은 적어도 사건의 뒷처리에서는 이승만박사가 개입하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최대교의 증언내용은  법조계의 영장처리방식에 비추어 신뢰하기 어렵고 이승만박사가 그러한 일에 관여되었다고 볼 근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증언이어서 믿기 곤란한 것이다.   한편 김성주의 죽음도 백범 암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이승만의 사후 개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안두희 재판 당시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던 김성주는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삐라를 법원 근처에 붙여 놓는 등 안두희의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중 유엔군의 북진시 유엔군의 임명으로 잠시 평남지사를 역임했지만, 이 때 이승만대통령은 김병연을  임명하여 이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후 1952년 대통령선거때는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도우는 등 반이승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김구암살의 배후자인  김지웅의 허위정보로 1953년 6월 25일 국제공산당원 혐의와 이승만 암살예비죄로 헌병총사령부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7년형이 구형되자 이승만대통령이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영문으로 된 메모를 보내 김성주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영문메모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General Won Kim Sung Ju, 金셩쥬 now in jail must be sentenced to capital punishment-極刑. He was appointed governor of 평양 by 外國人 and tried to kill Moon Bong je 文鳳濟 whom the Government appointed as police chief. It is clearly treason case and must be treated as such. To prevent any such traitor in the future he must be punished according to the law. I told the Defense Minister and I am telling you now. Please see to that without delay and without much noise. S. R.  원장군 지금 감옥에 있는 김성주는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 그는 외국인이 임명한 평양지사였고 우리 정부가 치안국장으로 임명한 문봉제를 죽이려 했다. 이는 분명히 반역사건이기 때문에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장래에 그런 반역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 나는 국방부장관에게도 말했지만, 당신에게도 명령한다. 신속하고 아주 조용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리승만 위 메모는 이승만대통령 자신의 필체로 쓴 것으로 대통령의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4.19 후 원용덕에 대한 재판에서 원용덕이 스스로 법원에 제출한 것이고 그 재판기록중에 있는 것이다. 이 메모를 받은 원용덕은 고민끝에 부하인 김진호와 상의하였더니  김진호가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7년 구형을 받고 선고를 기다리던 김성주를 구치소에서 더 조사할 게 있다고 불법적으로 끌어내  원용덕 사령관 자택으로 데려와서 1954년 4월 17일 새벽 그 자택에서 권총으로 살해하고 방공호에 암장했다.   이 사건은 7년 구형을 받은 김성주가 법률상으로는 사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의 메모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볼수 밖에 없다. 그 당시 김성주의 가족들은 구치소에 면회를 갔으나, 사람이 없다고 하여 면회도 할 수 없었고 선고기일이라고  하여 법정에 나갔으나 재판이 무기연기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인데,   1954년 5월 경 신문에 김성주가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당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어 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국회에  청원을 내어 당시 제3대 국회에서 조사위원회까지 설치되어 조사한 결과, 김성주의 죽음이 판결에 의한 사형집행이 아니고  불법한 것이라는 것은 확인했으나, 그 때 여당인 자유당의 비협조로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결국 이 문제는 4.19 혁명후에 김성주 가족들의 고소에 의해서 원용덕, 김진호 등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이  드러났고 그 과정 중에 이 메모가 제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원용덕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문봉제도 위증죄로  처벌받게 되었다. 결국 원용덕은 김성주를 죽인 후 판결문을 위조하고 그 집행을 한 것처럼 모든 서류를 작성한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면 이박사가 왜 김성주를 없애라고 지시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포병사령부 대령 이기련이  증언하기를, "김성주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박사가 죽였다고 본다"라고 하였고, 김성주를 밀고한  사람은 김지웅으로서 그는 김구선생 암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김성주 자신도 스스로 "내가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언한 일도 있듯이 김성주도 김구선생  암살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승만박사와 사이가 나빠지자 김지웅은 그를 국제공산당원으로 몰고  이박사와 김지웅, 문봉제, 김태선 등을 차례로 암살하겠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여 김성주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  이박사의 메모 내용을 보면, 법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 7년형을 구형받은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지 못할 것은 상식에 속하고, 원칙대로 하자면 재수사를 하여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죄로 추가 기소가 되어서 새로운 재판을 받아 몇 개월 후에나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할 수 있을 것인데, 김진호가 이박사의 메모에 따라서 살해한 것은 김진호가 스스로 이박사의 생각에 반하여 감히 범한 범죄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이러한 증언들과 아울러 위에서 검토한 암살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 등의 보호가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의 것들을 고려할 때 적어도 이승만박사는 암살 사건에 대해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직접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 부하들은 이박사의 뜻에 맞추어 알아서 암살을 감행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2) 미국과의 관계 백범 암살과 미국의 관련은 해방후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안두희는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로  보도된 증언에서 미국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지만, 바로 다음날 문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증언이라고 전면 부인한 바 있다.  먼저 4월 13일자 안두희의 증언 개요를 정리하면, 안두희는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은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되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안두희의 이러한 증언은 본인의 말대로 강압에 의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OSS는 1945년 10월초 해체되었고,  해방후 한국에 진주한 미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G-2와 CIC가 있었을 뿐이다. 다만 안두희는 미국 정보원들과 교분이 있었고  그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이 백범 암살에 한 동기를 주었을 지는 모르겠다.   또한 『미외교문서』에는 백범암살건과 관련하여 미국무성에 보낸 전문 하나가 공개되어 있다. 그것이 1949년 6월 27일 오후 5시 발의 2급비밀 지급(Confidential Priority) [전문 788호]이다. 미대사관의 공식보고인 이 전문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다.  전문은 '공식 비공식의 여러 정보에 의하면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며, 암살 동기는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고 북한과의 합작을 주장한 백범의 정치노선에 대한 불만'이라 밝히고 있다.  요컨대 암살 사건을 한독당내 노선 대립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문은 또한 김구선생이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안두희의 그간의 증언, 미군의 정보자료, 미대사관의 공식 보고 등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만,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미국의 암살사건 개입여부는 미국이 혹시나 가지고 있을 CIC 관계 자료나 CIA 자료 등이 공개된 후에나 밝혀질 것으로 보일 뿐이다.   3. 맺 음 말 백범 암살 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시기에는 암살자 안두희가 정권의  비호 아래 백범 암살의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1960년 4월 학생혁명 이후 민간 차원의 진상 규명 과정에서 다양한  증언들이 폭발적으로 나타났고, 국민과 여론은 안두희 체포와 진상 규명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5.16 군사쿠데타로 그 진상 규명을 위하여 국가 차원의 협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정부는 진상규명을 위하여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진실을 파헤치려는 신문기자들, 역사학자들,  백범시해 진상규명위원회 등의 희생적인 활동으로 사실은 거의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민간 차원의 노력들은 다방면에서 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 스스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구해 왔고 그 요구가  이번 국회 조사활동으로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암살범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다.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이었다. 장은산은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이후 김창룡이  적극 개입하였고,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원용덕 재판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사후 처리를 주도하였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이다. 이승만대통령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 사건에 대한 사전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우선 백범의 정치노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미국 역시 백범 암살에 대한 구체적 지시나 명령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암살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지시 명령의 대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최고위층 자체가  하나의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제 백범 암살 사건의 전반적 윤곽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이 할 일이다. 그들의 할 일은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하루 빨리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세워야 할 것이다.  

    1995년 12월 15일 

    백범암살 진상조사 소위원회 위원장 강신옥 위 원 조순형 동 변정일 동 정기호 동 박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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