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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freeboard_747495
    작성자 : 모과차
    추천 : 0
    조회수 : 3854
    IP : 122.34.***.157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4/02/18 21:53:34
    http://todayhumor.com/?freeboard_747495 모바일
    [펌]가야국 김수로왕비 허황옥과 쌍어의 비밀을 풀다!
    출처 : 

    http://m.blog.daum.net/kjs4311/851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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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마음의 보석상자(深藏若虛/木鷄之德)

    글목록방명록가야국 김수로왕비 허황옥과 쌍어(神魚)의 비밀을 풀다!대륙철도횡단열차 | 2012.03.09 13:32목록크게댓글쓰기가야국 김수로왕비 허황옥과 쌍어(神魚)의 비밀을 풀다!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의 40여 년의 추적2012년 02월 12일 (일) 22:35:13조윤호  [email protected][문화촌뉴스 조윤호기자]=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탄생지를 찾아가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근원을 밝히려는 후손의 열정은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릉 대문에 그려진 한 쌍의 물고기. 그리고 왕비의 무덤 앞 능비에 ‘가락국 수로왕비  ▲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보주태후 허씨릉‘ 이라고 새겨진 글자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유럽, 미국을 오가며 밝혀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이 있다. 아래 내용은 그가 말한 김수로왕 왕비 허황옥에 대한 역사를 팩션의 형식으로 짧게 써본 것이다.  『  BC 3세기. 인도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은 70여 명의 아들들을 전세계 각지로 내보낸다. 아들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왕자의 난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 포교사들과 함께 인도에서 가급적이면 먼 곳으로 내보냈다. 그 중에 ‘뾰지리’라는 아들, 왕자가 있다. 몇 사람의 포교사와 수백 명의 일행과 함께 현재 중국의 차마고도를 지나서 폭이 겨우 20센티 정도 되는 협곡을 통과해 당시 대리국 나라에 도착해 왕으로 임명된다. 그곳은 현재 중국 윈난성 서남쪽 보산이라는 곳이다. 그곳에서 ‘뾰지리’ 왕자는 토착민 여자인 한자로 골몽해, 현지 발음으론 채멍캐라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후손을 이어간다. 그 후손들은 한나라와 흉노의 대립에 따른 정세변화에 따라 동쪽으로 점점 이동하여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에 자리를 잡는다. ‘뾰지리’ 왕자가 인도에서 추방된 이후 거의 200여 년 후에 사천성 안악현(보주)에서는 허황옥이 후손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서기 47년에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야국으로 와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 1961년 대학생일 당시 그가 본,  김수로왕의 왕릉 대문에 그려진 쌍어는 기이한 문양이었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 도전의 첫 출발선이자 도화선이 된다. 김해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는 쌍어신앙은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인도와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신앙임을 밝히는데 40여 년 이상이 걸렸다. 또 하나 풀어야 했던 미스테리. 왕비의 능비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었다. 그는 주인공을 찾아서 당연히 인도로 갔다. 그러나 실제 그녀가 태어난 곳은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태어난 허황옥은 당시 한나라의 그 해인 서기 47년에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음을 밝혀낸다.  ▲ 허황옥의 선조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출발하여 대리국과 보주에 정착한 루트와 한나라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되어 장강을 타고 가야국으로 갈 때까지의 추정 루트이다.(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의 대담 내용을 토대로)그의 오랜 탐험의 과정을 그려보면서 두 개의 미스테리를 풀어낸 과정을 들어본다. 우석대 유통통상학부(중국학) 교수인 전홍철교수가 그와 대담을 나누었다.  전 : 인도와 한국과의 고대관계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김 : 인도에서 마방로를 통해 루트가 있었지요. 그것은 확실해요. 그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 옛 대리국의 보산입니다. 대리가 차마고도의 핵심입니다. 제가 보산에 갔을때 보산지방사람들과 학자들이 안내를 했는데, 마침 마방로쪽을 촬영하고 있더군요. 저도 사진 많이 찍었습니다. 보산시장이 보산을 홍보하면서 소개해달라고 열성이더군요. 전 : 학계에서는 마방로를 연구한 적이 없습니까? 김 : 국내는 없습니다. 외국에서도 논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곳을 가기 위해서 강을 6개나 건넜습니다.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전에, 장건이 서역을 탐험하기 전에 이미 인도와 중국의 차마고도 남쪽에 옛날 길이 있었습니다. 전 : 중국에서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발견했습니까? 김 : 허황옥의 탄생지로 중국 사천성 안악현을 알아냈습니다. 옛날엔 보주라고 했는데, 지금도 15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있는 줄 알았지요. 예전엔 아유타국이지만 현재 인도의 지명으론 아요디아입니다. 당연히 보주가 인도에 있을 줄 알았지요.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좌)과 전홍철 교수(우)전 : 왜 인도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김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입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허황옥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아유타국은 인도의 나라이었고 왕비의 능비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에서 보주는 지역 이름이므로 당연히 인도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보주와 가까운 발음의 인도 지명을 샅샅히 뒤졌지만 못찾고 우연히 ‘중국고지명대사전’을 보고 알아냈습니다. 중국 사천성 안악현이 옛날의 보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악현 내에 보주 허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민주향을 방문하였어요. 그리고 허씨의 종산 암벽에 새겨진 신정(神井)에서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전 : 그럼, 어떻게 보주에 있던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오게 되었습니까? 김 : 중국 25사 중 <후한서>에 광무 23년, 서기 47년에 촉(蜀) 땅에서 토착민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여 주동자와 인구 7천 명을 강하계로 이주시켰다고 나옵니다. 강하계는 오늘날의 무창 지방이지요. 그리고 서기 101년, 촉 땅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 허성 일당을 격파하고 허성이 항복하여 강하로 이주시겼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보주가 옛날엔 촉땅이지요. 반란이 또 일어났고 허씨 일당이라고 나오니, 54년 전에 일어난 강제이주 때 허황옥은 무창으로 함께 이주된 것이고 거기서 배를 타고 더 내려와서 황해를 지나 가락국으로 가게 된 겁니다. 전 : 김수로왕 왕릉 대문에 쌍어문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김 : 쌍어라는 문화 아이콘은 김해의 민간신앙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성 안악현에도 문패로 크게 올려져있어요. 사실, 쌍어신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지요. BC 8세기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계속됩니다. 왕권의 상징처럼 쌍어문이 유행하였지요. 그것은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로 퍼져나갑니다. 중국에서도 쌍어문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사천, 의창, 무한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양쯔강을 따라 쭉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나라 때 쌍어문을 상징적 존재로 숭배하던 어떤 제사 집단이 자기네 고유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지은 사당이나 제사용 그릇에 남긴 무늬가 쌍어문이라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나라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에 불만이 있던 토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반란에 실패하여 본거지인 사천 지방을 떠나 양쯔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이주해서 살게 됩니다. 그들이 살던 지역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된 셈이지요.    전 : 그럼, 허황옥도 쌍어신앙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김 : 그렇지요. 쌍어신앙은 사천지방에서 한국으로 이동한 허황옥 일행에 의해 가락국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물고기에게 무언가를 보호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전 : 쌍어문의 흔적을 찾아 세계를 다니셨는데, 결론은 얻으셨습니까? 김 : 예,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 중국, 미국, 영국, 독일, 네팔, 일본 등을 돌아다녔지요. 독일 페그가몬 박물관에 쌍어가 있는 수조가 있습니다. 원래 바빌로니아 시대의 유물인데, 고대 수신(水神, oaness)을 모시는 신앙집단의 예배장소에 쌍어신을 그린다고 합니다. 가운데 수신이 서있고 양 옆에 사제들이 큰 물고기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한 복장으로 물을 따르는 모습이지요. 지역과 시대마다 가운데 있는 것이 탑이기도 하고 활이기도 하고 물병이기도 하지만 쌍어는 어떤 신을 보호하는 초자연적 능역을 가진 신어(神魚)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물고기를 숭상하는 민족은 물고기를 먹지 않지요. 불교에서 파생된 라마교는 쌍어를 팔보 중의 하나로 모시고 있어요. 그래서 라마교를 신봉하는 몽골 사람들은 먹지 않습니다. 흉노의 일파인 훈족도 그렇고 시베리아 원주민에 흡수된 시비르족도 그래요. 전 : 한국어와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공통된 점이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 : 언어학전문가가 아니니까 언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는데,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하루방을 한 70개정도 찾았어요. 어허, 이거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제주도와 비슷해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한국에 와 있는 벼농사 기술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많은 고인돌 문화와 함께 한반도로 온 것 같은데, 선사시대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겠어요. 고인돌과 벼농사가 함께 들어온 것 같애요. 그 가능성은 필리핀에서 한국까지 흐르는 흑조(쿠로시오)라는 해류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멜이지요. 동남아 시대의 벼농사 기술자들이 한국에 와서 벼농사를 하다가 죽은 무덤이 고인돌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벼농사가 발달한 영산강 지역쪽에 고인돌이 제일 많이 남아있습니다. 언어는 인도어가 그때 들어왔다 이겁니다. 학문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그런 가능성이 1%도 안된다고 하지만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M.크리핀저 언어학자가 <아시아의 거석문화연구>라는 영문판 학위논문을 보내주었는데, 그 논문엔 한국어 중에서 드라비다어에 뿌리를 두었음이 밝혀진 단어만도 405개나 된다는 것이에요. 예를들어 벼는 biya, 쌀은 sal, 풀은 pul, 메뚜기는 metti 로 되어있어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간의 언어적 관계를 부정할 수 없지요.   ▲ 전홍철 교수와 김병모 이사장  ▲ 네팔의 문에 새겨진 쌍어. 네팔은 라마교를 통하여 팔보(八寶)중에서 일곱 번째로 쌍어를 모신다.  ▲ 중국 사천성 서운향의 보주 허씨 사당 대문에 선명하게 새겨진 쌍어문전 : 학계에서는 약간 파격적인 내용인데, 민족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 : 민족성은 나중에 생긴 것이지요. 2천년 같이 살다보니 언어도 통일되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즉 한국어에는 중국과는 관계없이 드라비다어가 있어요. 1900년 황성신보에 나간 어느 언어학자의 말에 의하면 한어가 있기 전에 토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한어란 한국할 때 '한'이고, 삼한 할 때 '한'입니다. 요즘으로 비교하면 조선어 속에는 토어, 한어, 조선어가 있는 것이지요. 아마 드라비다어가 토어일 것입니다. 삼한어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요. 전 : 일본어도 드라비다어와 관련이 있습니까? 김 : 제국시대 때 한 동경대학 조교수가 드라비다어 전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몽골을 침략하기 위해서 대륙에 대한 논문을 많이 내고 있었는데, 동경대학 교수가 일본어가 인도와 관련되어있다고 하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면서 아마, 파직된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오노스무라‘라는 교수가 '우리나라 일본 언어학은 험난한 과정을 거쳐왔다. 일본어에 있는 드라비다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인가? 그게 보이는데......'라고 했답니다. 시조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그의 40여 년에 걸친 여정은 학문적 완성으로 매듭을 짓고 있다. 아니 과정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에 매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가 쓴 책으로도 <한국인의 발자취>,  <몽골>,  <김수로왕비 허황옥>,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금관의 비밀>,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등이 있다. 그가 쓴 책 <김수로왕비 허황옥> 말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만 그 비밀을 들려주는 법이다. ........김수로의 삼각관계는 뻥이지만, 허황옥은 실존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김수로>, 두 번째 이야기  10.07.03 21:49 ㅣ최종 업데이트 10.07.03 21:49  김종성 (qqqkim2000)   김수로, 인도, 가야, 쌍어문, 허황옥     ▲ 가야의 초대 왕후가 될 인도 출신의 허황옥(서지혜 분).  ⓒ MBC  허황옥   고대왕국 가야의 건국과정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김수로>. 현재 이 드라마에서는, 출세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건달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김수로(지성 분)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 김수로를 사랑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하나는 인도 여인인 허황옥(서지혜 분). 상인인 아버지 허장상을 따라 김해 땅에 온 허황옥은 우연히 알게 된 김수로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또 하나는 신라 여인인 아효(강별 분). 신라 공주인 아효는 김해 땅에 첩보활동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수로와 사귀게 되었다. <김수로>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허황옥은 실존인물      ▲ 김해시 구산동에 소재한 허황옥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비문 왼쪽에 허황옥을 지칭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글귀가 있다.  ⓒ 김종성  허황옥   이 같은 드라마 속의 내용은 거의 다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하기 이전에 허황옥이 이미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나, 김수로가 신라 공주 아효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다 픽션이다. 단, 한 가지는 사실이다. 허황옥이란 인도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김수로의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가락국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이 책에는 허황옥이 아유타(阿踰陁)의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는 어디에 있었을까? 가야인들은 그곳이 남천축국(인도의 고대왕국)이나 서역(중국 서쪽)의 어느 나라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야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1646년에 허목이 쓴 '보주태후릉 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보주태후릉이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 허황옥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 무덤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에 있다. 또 비음기(碑陰記)란 무덤에 있는 비석의 뒷면에 쓰인 글귀를 가리킨다.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조상들은 가야의 초대 왕후인 허황옥이 인도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허황옥이 인도와 가야를 연결하는 매개체였음을 보여주는 물증이 오늘날 아시아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증거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고고인류학자인 김병모의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학설이 대립할 경우에는 김병모의 주장을 채택하여 스토리를 완성하도록 하겠다. 납릉심문 쌍어문, 인도반도 등지에도 있네? 김해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해반천(海畔川)이란 개천을 건너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시 서상동 소재)이 보인다.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라는 망루를 통과하면 납릉심문(納陵心門)이라고 쓰인 문이 나온다. 그 문을 통과하면 김수로의 무덤이다.      ▲ 수로왕릉 안의 납릉심문(納陵心門)에 새겨진 쌍어문. 붉은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물고기 무늬다.  ⓒ 김종성  쌍어문   그런데 납릉심문에는 좀 희한한 무늬가 있다. 제단 같은 것을 중앙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늬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납릉심문의 우측에 있는 숭인문(崇仁門)에도 동일한 무늬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쌍어문이 인도반도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 즉 아요디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인도 북부의 유피주(州)에서는 쌍어문이 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경찰의 배지에까지 새겨져 있다. 쌍어가 인간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런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쌍어 숭배사상이 그런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쌍어문이 가야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인도반도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현지인들의 의식을 일정 정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유적과 인도반도에서 동일한 쌍어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무늬가 허황옥 집단에 의해 가야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김병모의 견해다.      ▲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쌍어문. 자동차 번호판은 물론이고 경찰의 배지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별표 부분에서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 김병모 저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쌍어문        ▲ 인도반도에 속한 네팔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문에 새겨진 쌍어문.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쌍어문이다.  ⓒ 김병모 저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쌍어문   더욱 흥미로운 것은 허황옥 가문이 인도반도에서 가야 땅까지 이동하면서 경유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들에서도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허황옥은 왜 가야에 왔을까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으로부터 얼마 전인 기원전 1세기에, 인도 서북쪽에 살던 중앙아시아 쿠샨족이 인도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따라 아요디야(아유타)란 도시의 지배층 중에는 동쪽에 있는 중국을 향해 망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야에 당도한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스스로를 나이 16세의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한 점을 볼 때에, 그는 아요디야란 도시를 지배하는 군장(君長)의 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이 아요디야에 있었을 때만 해도 허황옥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16세였고, 그의 가문은 이미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아요디야를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에도 이 가문이 아유타 출신의 유민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허씨 가문이 정착한 곳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해당하는 보주(普州) 땅이었을 거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에서 서기 1세기에 보주 땅에 소수민족들이 살았다고 기술한 점, 오래 전에 보주 땅에 형성된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점, 보주 땅의 암벽에서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는 비문에서 허황옥을 보주태후라고 칭한 점 등이 김병모가 제시한 근거들이다.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은 서기 25년에 건국되었고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허황옥이 보주 땅에 살았다는 '후한 초'라는 시점은 가야 건국 직전과 거의 일치한다.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16세였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허황옥이 보주태후라고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에 오기 전에 보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시집온 여인을 제주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럼, 보주 땅에 살던 허황옥 가문이 그곳을 떠나 동쪽의 가야 땅을 향해 이동한 이유는 무엇일까?그 이유는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역사를 기록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허황옥이 가야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를 비롯한 사천성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 사건 연루자들이 양자강 연변의 무한(武漢)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일이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허황옥 가문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한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뒤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땅까지 당도했을 것이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마다 쌍어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을 반영하는 쌍어문이 허황옥 집단의 이동루트를 따라 김해의 수로왕릉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게 김병모의 견해다. 김수로 무덤에 쌍어문 새긴 깊은 뜻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을 고려해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김수로의 무덤 앞에 쌍어문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초대 왕후가 인도인이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      ▲ 김해시의 전하교 입구에 있는 쌍어문. 김해시 곳곳에서 이런 조각물을 발견할 수 있다.  ⓒ 김종성  쌍어문  인도반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한다. 가야라는 국호가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국호에는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라는 발음을 국호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에게는 물고기란 것이 어류뿐만 아니라 국호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로왕릉에 있는 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야라는 발음이 고대 인도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유효한 설명이다. 물고기 무늬에 얽힌 위와 같은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김해시에서는 시내 곳곳에 쌍어문 조각물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주요 교량에서 쌍어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인도의 아요디야시(市)에서도 허황옥과 가야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0년에 가락공원을 조성해놓았다. 2천 년 전의 허황옥이 한국과 인도의 두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이 가야 땅에 정착해서 왕후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닌 복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임을 보여준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 집단과 남방 인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이 같은 가야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협소한 단일민족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를 내 형제처럼 포용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세계적 커플 '김수로-허황옥'이 첫날밤 쓴 '언어'는?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김수로>, 세 번째 이야기  10.08.06 10:20 ㅣ최종 업데이트 10.08.06 10:20  김종성 (qqqkim2000)   김수로, 가야, 드라비다어, 허황옥       ▲ 가야왕국의 초대 국왕 및 왕후인 김수로(지성 분)와 허황옥(서지혜 분).  ⓒ MBC  김수로   가야왕국의 건설자 김수로의 일대기를 그린 MBC 드라마 <김수로>(매주 토일 오후 9시 45분 방송)에서는 그와 허황옥의 인연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김수로가 허황옥을 우연히 구출해주고 나중에는 허황옥이 생명의 빚을 갚는 과정에서 생겨난 두 사람 사이의 감사와 신뢰가 이제는 서서히 사랑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드라마 <김수로> 속 내용은 거의 다 허구다. 등장인물들의 러브라인에 관한 부분은 특히 그렇다. 기본적인 뼈대만 빼놓으면 거의 대부분이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김수로와 허황옥의 인연에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기 48년에 웨딩마치를 울린 실제 부부인 동시에 가야왕국의 초대 국왕 및 왕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당시의 관념으로 보더라도 '상당한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세계적 커플이기 때문이다. 김수로는 유라시아대륙 북방의 흉노족 출신이고 허황옥은 유라시아 남방의 인도인 출신이었다. 그런 그들이 유라시아 동쪽의 가야에서 하나가 되었으니, 이들의 만남은 당시로서도 세계적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진짜 부부 김수로-허황옥, 대화는 어떻게 했을까 김수로와 허황옥의 사례를 포함해서, 민족과 출신지가 서로 다른 두 남녀의 국제결혼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가 품는 의문 중 하나는 '처음에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라는 것이다. '말이나 제대로 통했을까?'하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김수로와 허황옥은 처음에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 "남녀가 만나는데 무슨 언어가 필요했겠느냐?"며 이 문제에 대한 탐구를 아예 포기하려 하지 말고, 현존하는 사료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객관적 정황을 기초로 두 남녀의 의사소통 문제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고려 전기인 1075~1084년 사이에 편찬된 가야 역사서인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와 허황옥이 처음 만난 때는 가야 건국 7년째인 서기 48년이었다. 바닷길을 통해 가야에 상륙한 허황옥은 가야 측이 신부를 위해 마련한 임시 궁궐 앞에서 김수로와 처음 대면했고, 그 날 밤에 임시 궁궐의 침실에서 남편과 첫날밤을 보냈다. 단둘만이 남은 침실 공간에서, 허황옥은 김수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이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입니다. 나이는 16세입니다."      ▲ 드라마 <김수로>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허황옥(서지혜 분).  ⓒ MBC  허황옥  단둘이 침실에 들어갔을 것이므로, 이들의 대화를 통역해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자기 소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언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언어가 가야어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나 중국 사천성의 암각(巖刻) 자료 등을 토대로 할 때, 허황옥은 가야에 오기 1년 전인 서기 47년까지만 해도 티베트와 중국 내륙의 경계지대인 사천성(2008년 대지진 발생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수로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허황옥의 경우에는 가야어를 배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야어를 배웠음을 추론케 하는 간접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가야어를 몰랐다면, 어떻게 이들이 가야 토착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가야 건국 당시만 해도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 등을 무대로 국제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수로·허황옥과 가야 토착민들은 상인이나 통역 등을 매개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정황을 고려할 때, 이들이 가야어를 몰랐다 해도 가야 땅에서 사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가야어를 익혔을 것이라고 볼 만한 정황이 별로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야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들 중에서 어떤 언어가 김수로와 허황옥 사이의 언어가 되었을지'로 우리의 논의를 압축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본다. 중국어와 흉노어를 쓴 김일제의 후예들 드라마 <김수로>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한서> <삼국사기> 같은 문헌 사료나 <문무왕릉비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같은 비문 사료 등을 종합하면 김수로는 흉노족의 일파인 제천금인족(祭天金人族)에 속한 김일제의 후예로 판단된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 때에 전쟁에서 패해 한나라에 끌려온 흉노 왕족 김일제는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 등 중국에서 성공적인 정착을 이룩했다.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최초의 김씨 가문인 김일제의 후예들은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집안의 영향력을 보전하면서 기원전 66년 이후에는 단독으로 한나라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서기 8년 이후에도 왕망과 고도의 유대관계를 갖고 권세를 유지한 김씨 가문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들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後漢)을 세운 서기 25년 이후로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김씨 가문이 역사무대에 컴백한 것은 그로부터 17년 뒤인 서기 42년 가야 건국 때였다. 이 같은 역사를 고려해볼 때, 가야 땅에 출현한 김씨 가문의 구성원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한어(漢語, 중국어)나 흉노어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 땅에서 최소 100년 이상 국가경영에 참여한 가문이므로, 중국어를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다. 한편, 한나라에 끌려온 뒤에도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한 점을 볼 때, 이들이 흉노어를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한국어와 고도의 유사성 보이는 고대 인도어      ▲ 김수로와 결혼하기 위해 가야 땅에 상륙하는 허황옥(왼쪽에서 네 번째).사진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의 대형 벽화다.  ⓒ 김종성  허황옥   그럼, 허황옥 측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허황옥은 어떤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김병모에 따르면, 본래 인도반도의 아요디야(아유타)에 살던 허황옥의 조상들은 기원전 1세기에 중앙아시아 쿠샨족의 침략을 받아 오늘날의 사천성 지역으로 이동해서 소수민족 주거지를 형성했다. 김수로와 허황옥이 만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중앙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정착지를 빼앗긴 허황옥 집안의 사람들은 양자강을 따라 바다를 건너 가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김병모는 주장하고 있다. 김병모가 이같은 '허황옥 루트'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의 사천성에 허씨 집성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곳에 허황옥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암각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인도반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는 무늬)이 허씨 가족들이 머문 인도-중국-가야의 도시들에서 똑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김병모의 주장에 대해 반론도 존재하지만, 그의 학설이 가장 유력할 뿐만 아니라 한국 김해시나 인도 아요디야(아유타)시에서도 그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가야 유적지들을 조성해놓았기 때문에 김병모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김병모가 분석한 허황옥의 이동 루트를 근거로, 우리는 가야 땅에 출현할 당시의 허황옥이 고대 인도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허황옥 가문이 기원전 1세기에 인도반도를 떠났는데도 이들이 서기 1세기인 48년까지도 여전히 인도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언어학자 강길운은 '아버지=아바치', '엄마=암마', '도령=도렌' 등 1300여 개의 어휘에서 한국어와 고대 인도어(드라비다어)가 고도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어와 고대 인도어가 비슷하다는 점은, 1874년에 프랑스 선교사 달레가 쓴 <조선교회사>나 1906년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쓴 <한국어와 드라비다 제어의 비교문법>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고대 인도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준 점이나, 허황옥 가문이 서기 47년까지도 중국 경내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중국 정부에 대항한 점을 볼 때, 우리는 서기 48년에 가야 땅에 출현한 허황옥이 여전히 고대 인도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아요디야(아유타)를 떠나 중국에 정착한 후에도 여전히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집단생활을 유지했기에, 가야 땅에 도착한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국 공주'라고 소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첫날밤 대화, 중국어로 이뤄졌을 가능성 커      ▲ 김해시 전하교 앞에 있는 쌍어문.인도반도와 가야 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쌍어문을 형상화한 조각물이다.  ⓒ 김종성  쌍어문  한편, 인도를 떠나 오랫동안 중국 경내에서 생활한 점을 보아, 허황옥 집안의 사람들이 고대 인도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여러 언어가 함께 사용되는 오늘날의 중국에서 복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소수민족 출신들이 많은 점을 볼 때, 언어 간의 차이가 오늘날보다 훨씬 덜했던 고대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이 여러 언어를 배우기가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평생 한 가지 언어만 구사해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 없는 한국과 달리, 중국처럼 여러 민족과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곳에서는 복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때로는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서기 48년까지 중국에 살다가 가야에 도래한 허황옥이 한어(漢語)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에는 별무리가 없다. 다만, 허황옥의 경우에는 인도 출신들로 구성된 소수민족 구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국어 구사능력이나 발음이 상당히 서툴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볼 때, 김수로의 경우에는 중국어는 능숙하지만 흉노어는 서툴렀고, 허황옥의 경우에는 고대 인도어는 능숙하지만 중국어는 서툴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공통적인 언어는 중국어이므로, 첫날밤에 단둘만의 공간에 남게 된 김수로와 허황옥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데에 사용된 언어는 중국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중국어 수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최소 100년 이상 중국 사회의 주류로 산 김일제 가문의 후예인 김수로의 중국어는 일반 한족의 중국어와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만, 소수민족 구역에서 중국 정부에 대항하면서 생활한 허황옥의 중국어는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한민족 선사 이전부터 순혈은 아니었다"김병모 원장, 청주박물관서 특강적어도 5차례 이상 북방·남방계주민 유입돌하르방 남방 금관은 북방문화 흔적 지금의 한반도에는 선사와 역사시대에 걸쳐 적어도 5차례 정도의 대규모 외부인 유입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그리고 이 대규모 유입은 정황상 남방계 농경민이 먼저 들어왔고, 그 위에 북방계 유목민의 유전자가 더해졌다는 주장도 아울러 나왔다.국립청주박물관(관장 김성명)이 지난 24일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장을 초청, '우리 얼굴의 고향' 제목의 명사 특강을 청명관 강당에서 가졌다.이날 특강에서 김 원장은 △이른 시기에 남방계 농경민과 북반계 유목민이 한반도에 유입됐고 △그들은 뿌리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난생(卵生·남방)과 천손(天孫·북방)이라는 서로 다른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이밖에 그는 선사와 역사시대에 걸쳐 적어도 5차례 정도의 대규모 외부민족 인구유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 김병모 원장은 신라 금관은 북방계, 돌하루방은 남방계 이주민의 문화흔적으로 보고 있다.이와 관련 김 원장은 고인돌, 솟대, 쌍어(雙魚·두마리 물고기) 조각, 돌하루방, 신라금관 등이 그 근거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이날 주장한 내용은 처음은 아니나, 과거보다 훨씬 정교한 논리를 갖추고 있어 참석자들의 큰 반향을 이끌어 냈다.그는 고인돌에 대해 "거석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은 인도, 동남아시아, 한반도, 만주 일부에만 분포한다"며 "따라서 벼농사를 짓던 남방계 주민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고인돌 문화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솟대에 대해서는 "중국 진나라 때 이른바 7웅이 쟁패를 벌이는 과정에서 흉노족이 대규모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며 "이때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문화인 솟대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쌍어에 대해서는 "이 조각 문양은 인도 야유타, 중국 보주(普州), 김해 가야 문화권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문화 상징"이라며 "따라서 인도 출신으로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은 동남아시아보다는 중국 보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을 개연성이 높다"고 밝혔다.  김병모박사 주장 내용이밖에 김원장은 돌하루방을 언급, "이는 남미, 이스트섬, 동남아시아 등 이른바 흑조류가 흐르는 곳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며 "거석상을 만들던 남방계 주민 일부가 어떤 이유로 제주도에 상륙, 돌하루방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신라 금관에 대해서는 "금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새조각은 시베리아 스키타이족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며 "따라서 금과 말을 잘 다루던 이 집단이 동해를 따라 한반도 경주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김 원장은 결론으로 △정황상 북방계보다 남방계가 먼저 유입됐고 △그 최초 증거와 시기는 기원전 2천~3천년 쯤의 고인돌로 추정되며 △따라서 한민족은 역사 이전부터 '순혈'(純血)이 아니었다고 밝혔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단순히 문화전파론에 근거하고 있어, 이의 극복이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문화 전파론을 따를 경우 신라 왕실은 한때 이민족이 지배한 것이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이밖에 그는 한반도 고인돌이 기원전 7~8천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봤으나 이때는 신석기 초기라는 것이 국내 학계의 정설이어서 편년 문제도 야기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문화 전파론문화라는 것은 이주, 무역, 전쟁 등의 방법을 통해 가령 A국가에서 B국가로 전파될 뿐 자체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또 이 이론은 수용된 후 그것에서 변형되는 문화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허황옥(許黃玉, 33년 ~ 189년)은 가야의 초대 왕 수로왕의 부인으로 허황후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그녀의 나이(156살)은 수로왕과 9살 연상의 나이차로, 수로왕의 나이(157살)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는 가야사람들이 자신의 시조에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자 과장된 표현이 있던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목차

     [숨기기] 1 불교 전파설2 중국 도래설3 기타4 가족5 가야 허황옥을 연기한 배우6 주석7 함께 보기

    [편집] 불교 전파설

    일설에는 가야의 불교 전래에 기여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허황옥과 그녀의 친정 오빠 장유화상이 가야 지역에 불교를 처음 전래했다는 설이 있다. 불교의 승려였던 친정오빠 장유화상은 금관가야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편집] 중국 도래설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오지 않고 아요디야 이민자들이 거주하던 지금 중국 쓰촨성 안악현에서 건너왔다는 설도 있다.[1] 인도의 도시국가였던 아요디아는 태국에도 아유티야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하였고, 중국 서남부 쓰촨성 주변에도 건너와 이민촌을 건설하였다.[2] 안악현 근처에 보주 라는 마을이 있으며, 쓰촨성의 안악현과 보주 지역은 허씨(許氏)들의 집성촌이자 아요디야에서 이민온 인도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인도계 이주민 중 고위직에 오른 인물 중에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 선제의 후궁이 된 허씨가 있었다. 선제의 장인에 해당되는 평은후 허광한도 쓰촨성 출신으로, 허황옥 역시 그의 일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편집] 기타

    그녀는 10명의 아들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쓰게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모친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사용하던 두 왕자로부터 한국의 허씨 성이 유래되었다.

    [편집] 가족

    10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이 중 남편인 태조 수로왕에게 청하여 2명의 아들은 자신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성을 쓰게끔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수로왕의 동의를 얻으니 2명의 아들은 허씨 성을 쓰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1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남편 : 태조 김수로왕(太祖首露王, 42년? ~ 199년, 재위 42년 ~ 199년)아들 : 거등왕손자 : 미품왕아들 : 7명아들 : 2명,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쓰게 되었다. 이 2형제가 허씨(許氏)들의 선조가 되었다.딸 : 1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수로왕과 허황옥에게는 1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친정오빠 : 장유화상(長遊和尙,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편집] 가야 허황옥을 연기한 배우

    MBC(2010년)김수로 (드라마) : 서지혜

    [편집] 주석

    ↑ 쓰촨성에는 아요디아계 이주민들이 세운 도시가 있었다.↑ 아요디야는 국외에 식민도시와 이민자촌을 건설했고, 뒤에 아요디아가 망한 뒤에 아요디야의 주민들은 이들 태국의 식민도시 아유티야와 중국의 쓰촨성 일대로 흘러들어갔다.

    [편집] 함께 보기

    가야수로왕금관가야김해 김씨김해 허씨........ 김수로와 혼인한 허황옥 그녀는 최초의 기독교인이였다 [자료]한반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AD. 49년7월27일이다. 최초 한국 기독교인 허황옥이었다.(출전 : 삼국유사 가야국편), 허황옥 그녀는 인도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에 의해 전파된 인도기독교를 통해 예수을 영접했다.(출전-도마행전) 그녀가 가져온 종교는 도마기독교인 인도기독교였다. 인도기독교는 토마스기독교라고 불리며, 예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도마가 인도에 와서 선교한 동방기독교이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인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4배정도로 많은 3500만명 정도 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기독교유적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도2동 왕유동 도마 석상(문화재자료 제474호) , 경주 불국사 돌 십자가. 경주 마리아 상. 등이 있다. 영주 도마 석상은 히브리어로 도마라고 새겨져 있고, 예수의 한자어인 야소(耶蘇)가 새겨져 있다.경주 영주시 평은면 강도2동 왕유동 도마석상(문화재자료474호) 기독교인 허황옥 그녀는 인도 태양황조의 아유타왕국의 공주로 AD. 49년7월27일에 항로를 통해 가야국 주포촌(도두촌)의 기출변 해변에 들어왔다.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의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읍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이 이르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이름은 허황옥이라 하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금년5월경이었습니다. "제 아버님 꿈에 하나님이 나와 말씀하시길.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낸 이로 신령스럽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여러해 동안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는 공주를 보내어 그의 아내로 삼게 하라' 하셨다 합니다. 부모님은 꿈을 깬 뒤에도 하나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며 빨리 수로 임금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좇아 그길로 하나님이 정하신 제 낭군을 찾아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보잘 것없는 얼굴로 귀하신 얼굴을 뵙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했다.가야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허황후가 되었다.(유적 - 파사사탑. 쌍어문, 물고기문양. 등) 그 후 기독교는 신라시대 당나라를 통해 경교로 들어왔다.(유적 - 경주 불국사의 십자가 문양) 경교은 동방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트리우스파라고 부르며 당나라시대 635년에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졌으며 250년간 번성했다.(유적 - 중국 당 현종 때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 김영광교수 주장. 동방기독교의 그리스도 상 - 불상과 유사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구분할 수 있다.-----------------------------------▶ 허황옥의 고향 보주普州를 찾아서 1961년 여름, 대학생이던 저자는 자신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을 방문했다가 왕릉 대문에 그려진 물고기 한 쌍을 보고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신어神魚라고 부르는 이 물고기는 인도식 탑과 비슷한 물체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이런 종류의 그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로왕릉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왕비의 무덤 앞 능비에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과연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인도 여인이 머나먼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어떻게 왔는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은 그로 하여금 46년에 걸쳐 가까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인도·네팔·파키스탄·영국·독일·미국·이란 등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쌍어신앙을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아유타국이 기원전 7세기경 아리아족이 세운 인도 코살국의 중심 도시 아요디아이고, 중국에서 일어난 한나라와 흉노의 대립에 영향을 받아 아요디아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허황옥이 서기 47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김해 가락국으로 왔음을 밝혀냈다. 또한 허황옥의 이름 앞에 보주태후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안악현 내에 보주 허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서운향과 민주향을 방문하게 되고, 허씨의 종산宗山 암벽에 새겨진 「신정神井」에서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이로써 아득한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알려진 허황옥의 혼인 여행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인도와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쌍어신앙쌍어신앙은 신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했으며, 쌍어는 기원전 12세기에 그 지역에서 아시리아 문화가 꽃피기 시작할 때 만물을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 후 아시리아의 사제들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물고기 모양의 사제복을 입고 의식을 집행했으며 그런 물증들이 인장印章으로 나타나 있다. 쌍어신앙은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계속되어 왕권의 상징처럼 쌍어문이 유행한다. 그것이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의 이동으로 서쪽으로는 지중해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로마의 탄압을 받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쌍어신앙은 물고기 아이콘으로 서로 기독교인임을 확인했고, 지하교회인 카타콤에 오병이어(떡 다섯 개가 가운데 있고 물고기 한 쌍이 양쪽에서 떡을 보호하는 그림)를 그려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전한다. 한편 쌍어신앙은 흑해를 근거지로 일어난 기마민족인 스키타이를 통해 중앙아시아 전역과 알타이 산악지대의 유목민들에게 퍼졌다. 이런 과정에서 쌍어신앙은 각 지역의 토착 신앙의 내용들과 섞여서 인도 대륙에 흡수되었고, 그것이 힌두교와 불교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스키타이족들은 타고 다니던 말의 이마에 쌍어문을 부적으로 달고 다녔고, 말안장도 쌍어문으로 장식했다. 그 전통은 오늘날 파키스탄 간다라 지방을 운행하는 자동차에 그려진 쌍어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쌍어신앙이 인도인의 이민으로 중국의 운남, 사천 지방의 주민들에게도 퍼져나갔고, 북쪽으로는 라마교를 통해 몽골의 초원 민족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렇게 하여 쌍어신앙은 사천 지방에서 한국으로 이동한 허황옥 일행에 의하여 가락국에 퍼졌고, 그것은 다시 가락국 출신들의 일본 이민으로 일본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 만물의 수호신 쌍어불가에서는 물고기가 석가모니를 보호하는 동물로 되어 있으며, 몽골의 풍속에는 물고기가 사람보다 눈이 좋아서 물속에서도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지 또는 위험에 처했는지 살피며 밤이나 낮이나 자지 않고 사람을 보호하는 신적神的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몽골의 전통 종교인 라마교에서는 물고기를 팔보八寶 중 하나로 여기며, 그래서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물고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나 꽃, 신관神官이나 신물 등을 보호하기도 한다. 수로왕릉의 쌍어는 가운데 탑을 보호하고 있으며, 김해의 은하사에 있는 쌍어는 가운데 꽃을 보호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화를 보여주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한 방에는 높이가 사람 키만 한 커다란 수조水槽 바깥벽에 특이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데 어피복魚皮服을 입은 사제가 넘쳐흐르는 물병을 손에 든 수신水神 오아네스를 호위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물고기 상징의 복장을 한 사제는 초자연적 능력을 갖춘 물고기, 곧 신어神魚를 의미한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약을 생산하는 커다란 나무의 뿌리를 보호하는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를 통해 물고기가 인류를 모든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믿음에서 신년축제 때 금붕어를 사며, 일본에서는 가족이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는 의미로 ‘고이노보리’ 민속축제 때 종이로 물고기를 만들어 장대에 매단다. 이처럼 쌍어는 사원의 대문에서 군왕이나 신을 지켰고, 신령스러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막이나 물속에서 버텨 서 있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는 말의 이마나 안장에도 쌍어는 수호신으로 매달려 있었고, 자동차나 인력거에도 수호신으로 장식되었다. 중국에서는 여행자들의 숙소나 식당, 돈을 지키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한국에서는 왕릉의 대문과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에 장식되었고, 왜국에서는 여왕의 옷을 장식하는 무늬로, 후세에는 재물신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神社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쌍어는 한국 민속에도 오래 남아서 가게나 식당의 입구 안쪽에 매달린 북어 두 마리로 끈질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는 물고기가 무언가를 보호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들어왔고, 이 사상을 전파한 사람들의 이동 흔적이 세계 곳곳에 쌍어문으로 남아 있음을 수십 년간의 추적으로 밝혀냈다. 생생한 현장기록으로 유라시아 역사의 주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힌두교와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문화권까지 널리 퍼져 있는 쌍어신앙의 역사적·종교적·문화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김병모 인류학자]-----[고고학자료]한국의 3어 물고기문양이 기독교문양이 되기까지 위 석상들은 '티우'(Tiu=치우)라는 먼 옛날 미스테리한 선조에 대한 전설을 갖고 있는 이집트 정복자들. Tiu(티우=치우)는 이집트 창건의 전설적 왕족의 인물상이다. 슈메르문명 후대에 건설된 피라미드 문명족으로 조상을 치우(티우)로 모신다면 탁록전쟁이후 중동으로 이주한 치우족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는 한웅의 신시(피라미드 도시)로 대변되는 배달국의 문화다.  이집트의 제기용 그릇(좌).유럽 켈트족과 기독교문양(우)  일목삼신어 부적]이집트를 창건한  티우의 후예.. 태양의 아들들..그리고 우리 전통부적을 똑같이 갖고 있던 사람들..이집트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피라미드는 요하지역 피라미드..요하 피라미드 원형은 압록강변의 집안 피라미드..압록강변의 피라미드 원형은 산악지대의 적석총과 초원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의 원형이 되는 한반도 남방식 양식이다.  동양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집트 스핑크스상처녀잉태-고난-십자가죽음-부활이라는 예수신화의 원형 이집트 호루스-머리에 태양이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한 주역은 고대 한국인들(치우왕족)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태양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사용한 제사용 그릇에 3마리 물고기가 그려져 있는데,한국의 전통부적과 같다.기독경설화와 기독교사상의 뿌리는 슈메르다.슈메르인들은 체형과 풍습이 한국인들과 동일하다.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649361   동양의 한반도 기독교 유적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야국 김수로 왕비 허황옥 이야기가 흥미롭고, 통일신라 불교유적으로 보였던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많은 증표들이 있어 놀라움을 금치못한다.   .............. - 오두의 문화비평 -  숭실대 박물관 '신라 성모 마리아상'이 가짜인 이유  1.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2.김양선, '돌 십자가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3.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5.'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6.전통적인 모자불상: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結.불교에도 모자불상이 있다  최근 보도된 뉴스 중에 "통일신라때 만든 '예수 안고 있는 성모상' 모습"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근간에 필자는 몇달 동안 신라의 선도성모 이슈로 온갖 자료와 장문의 글을 써오고 있던터라 대단한 자료가 있나 하고 반갑게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아니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60년대말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보도한 기사 내용 이외에 새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번에 기사를 낸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는 필자와는 조선닷컴 BBS 시절부터 안면은 아니라도 인터넷상의 '댓글면'을 제법 나누었던 바가 있는 유능한 기자이다. 그런데 비록 이슈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 평가들을 취재하여 기사에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왜 이러한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기사가 다시 보도되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는 동아일보 보도 후 40년만에 다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필자는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의견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숭실대 '신라 유물들'에 대한 의혹들은 제기하고 있어도 그 유물들의 문제점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내놓은 의견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문화 유물에 대한 그릇된 호도를 막아야 하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이른바 '신라 기독교 유물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숭실대 박물관에 현재 다시 전시되면서 다시 뉴스 기사로 논란을 일으키는 '신라 때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등'이 왜 가짜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글이 될 것이다.  1.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 1967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이래 가짜 의혹 논란에 빠져 숭실대 박물관측은 그로부터 수십년간 문을 닫은 일까지 일어났던 일이 "가짜 십자가상"과 "가짜 신라 성모상" 사건이다. 이미 7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일단 비판을 받고 사라진 일이 다시 재발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아래는 그 당시 김양선 목사가 주장하한 이른바 '신라 때 경교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67년도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동아일보, 1967년 8월 12일자, 5면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본문에서 김양선씨가 '돌 십자가를 암석 위에서 나타난 걸 주웠다'고 보도했다. “景敎傳來의 核心인 物的資料는 그가 慶州에서 수집했다는 銅十字架와 마리아 像과 함께 佛國寺에서 얻은 石十字架. 1956년 암석위에 나타난 걸 주워 감정한 石十字架는 浮*塔과 石質이 같고 腐蝕度가 같다는데서 30년간 고고학에 종사한 그의 확신으로 羅代의 것으로 주장한다.”(위의 동아일보)  그런데 이번 조선일보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의 주장을 보면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전혀 다른 곳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 바뀌고 있는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것말고도 또 다른 장소도 언급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발견장소까지 중언부언이 되어야 할까? 유물 자체가 가짜 신라 유물로 허위 주장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내용에는 위의 기사 사진에서 보듯이 김양선 목사(당시 교수)의 주장을 인용 보도하면서 부제로 '종교, 학계, 근거없다고 반박'이라는 부제를 달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은 전시하고 있던 문제의 '유물들'에 대하여 불교는 물론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딪쳐 당시의 전시를 철회하고 박물관 문을 닫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회적인 논란과 질타를 받았던 '신라 십자가'와 '신라 마리아 성모상'을 발견했다는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사학계, 심지어 일부 기독교계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그로 인하여서인지 김양선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간혹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간의 대화 이슈가 나오면 문제의 그 '유물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가짜 의혹을 받으면서도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이라는 별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장이어서인지 곧잘 한국 종교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은 의견은 '증거 불확실', '발견 경로 의혹'이라는 토를 달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인 논란에 휩싸인 그 물건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문화재 감정에서 보다 명확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여기에 분명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유물들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그 유물들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60년대 말 70년대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박물관이 문을 닫을 정도였다가 수십년이 지난 2004년 숭실대의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이번에 다시 사회적인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 보도된 문제의 기사 내용에도 언급된대로 '돌십자가'와 '성모상'에 대하여 일부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절에서 기독교 유물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를 다시 받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이 오히려 불교문화를 인정하는 배경이 된다하여 비난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그 문제의 유물에 대하여 뉴스 기사화가 된 것은 현 정권이 기독교 정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궐선거와 그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분명 유물 출처에 대한 어설픈 두벌 세벌 증언은 물론 그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한 사건 외에도 다른 여타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유물에 대한 분명한 출처 경로가 의혹을 받았다면, 추가적인 증거가 나오든지 문헌적이거나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든지 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더 나쁜 거짓 증거가 등장하면서까지 다시 이번에 기사화가 되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왜냐면 그 유물들을 찾아냈다는 장소의 이중 삼중적인 발표는 물론 김양선씨 자신이 출처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 나의 이 글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 관장이면서 동대학 사학과의 고고학 전공자인 최병현 관장이 한 말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관장은 기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선생(김양선을 말함) 생전에 본인으로부터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앞서 동아일보 기사의 '암석 위'와는 정반대의 '석등 밑'이라는 전혀 다른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 기사가 시기적으로 더 앞선 출처 증언이라면 이번에 말을 바꾼 '불국사 대웅전'이 동원된 것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와 불교의 한복판을 연결한 흔적이 있어 보인다. 돌십자가의 출처가 '암석 위에서 주웠다'고 했다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이라는 중언부언은 과연 김양선씨가 애초에 그것을 '발견'했다는 장소가 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증언이 '의도하는 효과를 위하여' 바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유물 습득의 동기 또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50년대 중반에 기독교 목사로서 김양선씨가 당시에 어떻게 다른 종교 한 복판의 석등 밑을 파보게 되었다는 말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가져갔다는 것은 장물이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국사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장물 전시관인가? 그 '돌십자가'를 입수하게 된 동기에는 참으로 어딘가 의구심을 가지기에 알맞은 것이다. 이러한 장소 문제가 가짜라는 것을 필자가 드러내게 될 것이다. 보통 절이 아닌 불국사의 석등을 그것도 대웅전 앞의 석등 밑을 어떻게 파보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불교의 정통 중앙에서 문제의 '돌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출처 경위와 장소에 대한 허위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한 중언부언인 것이다. 이러한 동기 배경의 문제를 넘어서서 여기에서 필자는 '돌십자가'의 출처에 대한 근거가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빙성이란 일관된 증언이 있어야 한다.  2. 김양선,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고 말한 김양선은 석탈해의 사기 수법을 쓰다가 들킨 것일까? <삼국유사>에 보면 석탈해는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그 집 근처에다 몰래 숯을 묻어두고는 얼마 뒤에 그 집 주인에게 그곳이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고 우겨 그 증거로 그 숯을 파보여서 집을 빼았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석탈해의 사기 행위도 들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 발견자로서 김양선은 스스로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처음 발표했던 유물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유물을 다룰 때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기독교인인 성기문(말씀발전소 대표)은 오래 전에 <김양선 목사, 불국사에서 기독교 보물 발견하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김양선 목사가 없었다면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경교가 신라시대에 전래된 가능성 때문에 흥분과 설렘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가 한반도에 1000여 년 전에 이미 전래가 되었다니! 비록 이러한 흥분이 단지 젊은 날의 호기심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러나 성기문은 이 유물들의 출처와 발견 경로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를 지지해 줄 만한 근거, 즉 이 유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발견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기문의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이번 조선일보 보도의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과는 또다른 장소로 증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 목사와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자! 필자가 왜 문제의 이 유물들의 사안이 가짜라는 것을 주장하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증언은 "암석 위에 나타난 것을 주워"라고 했었다. 현재의 숭실대 '한국기독교 박물관' 관장이라는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발굴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찰 경내에서 물건을 몰래 도굴 유출했다면 '발굴'이라는 표현은 또 왜 들어갔을까? 유물에 대한 학술적 신빙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도굴'을 '발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김양선은 사망한 사람이라도 '함께 발굴에 참여한 사람'은 왜 그 신원을 밝히지 못할까? 그 무엇보다도 발견 장소가 '암석 위에서 주워'에서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표현은 가히 조작냄새를 스스로 때를 달리하면서 달리 풍기고 있는 증거이다. 이렇게 세 다른 출처 경로의 중구난방에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도록에는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니 이 사회의 '기독교 유물들'에마저 그 권위들을 추락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역사적이고 자랑스럽다면 왜 이렇게 여러 다른 증언이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이야기 전달 과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김양선의 행태에서 드러났다. 성기문은 김양선과 함께 문제의 돌십자가 발견에 함께 있었다는 사람에게 '김양선이 유물발견 기록 문서를 없앴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가 어떻게 그러한 유물들을 발견하였는지를 기록한 문서는 김양선 목사 자신이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물에 대한 발굴 경위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상한 일이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395  이제 사건은 스스로 붕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감추고 다른 말을 해야 하는 사실들이 드러난 이상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을 사람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돌 십자가'는 물론 '마리아 성모상' 및 그 여타의 전시물의 그 어떤 것들도 신빙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김양선은 그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그가 경주에서 발견한 유물이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생각된다"고 표현한 것부터가 어딘가 뒤가 꾸린 적극성이 약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말 진정한 증거가 되는 돌 십자가이고 성모 마리아상이라면 왜 그는 그와같이 중요한 기독교 유물을 '불교에 흡수된 것'으로 표현했어야 했을까? 흡수된 것인지 경교 신도가 쓰던 것인지 어떤 기준에서 판단했단 말인가? 제 발 저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표현은 기독교가 불교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것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말씀발전사 대표 성기문씨는 "지금도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유물들이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너무 박약하다. 당시의 불교도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처럼 일반적인 고대 형태로써의 십자가와 유사하지만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물들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기독교인인 그는 김양선의 발견 자체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선언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어 왜곡되었다는 말인가, 신라 불교가 경교의 형식을 흡수하였다는 말인가, 어떠한 이유로 불국사나 경주에 그러한 유물들이 선물이나 기념물 등의 형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여러 개 국내에서 발견된다든지, 신라에 이러한 유물들의 존재를 입증 혹은 방증해줄 만한 문헌들이 발견된다든지, 삼국 시대(혹은 남북조시대)에 특별히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더 명확한 증거들이 발견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돌십자가' 정말 '돌' 십자가가 되었다. 발견자의 증언부언과 증거인멸, 발견 동참자의 증언 그리고 기독교 내부의 평가 이 모두가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임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우물 안'에서 '석등 아래'와 '암석 위'만큼 수중, 지하 지상을 돌아다니는 쑥대머리가 된 유물 출처 경로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돌십자가는 더 이상 경주나 신라 유물로 들먹여서는 안될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과거에 문을 닫았던 전과를 재범하고 있다. 불국사의 명에를 위해서도 기독교에 대한 신뢰감을 위해서도 영원히 문을 닫아야 한다.     3. 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 이어서 '신라 성모상'이 가짜인 이유를 밝히기 전에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또 다른 '한국 기독교 유물'이라는 '금강산 경교비'도 가짜로 왜곡해온 사실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불국사에서 '돌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냈다는 것을 여러 다른 방증을 드러내려 거짓 힘을 쓰다보니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가 마치 금강산에서 발견된 양 허위 주장한 흔적과 그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로 거짓 선전되고 있는중국 경교비 모조비 탁본 위의 경교비는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로 그릇 선전되어 왔다. 사실은 비림 박물관으로 옮긴 당나라 경교비를 대신하여 중국 장안의 경교비가 있던 곳에 세워진 모조비를 탁본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 경교비 모조비가 난데없이 '금강산 경교비 발견설'로 왜곡된 글의 내용의 한 예이다. 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라. "1917년에 금강산에서 경교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했는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그 기념비의 사진도 전시되고 있었다. 그 비석이 금강산의 장안사라는 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경교를 같은 종교로 생각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 경교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반도는 신라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조선조의 남사고가 자신의 비결서(격암유록)에 로마서, 골로새서 같은 바울서신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http://jesu-ufo.com/myth/0myth-116.htm 금강산에서 1917년 경교비가 발견되었다? 말도 안되는 왜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종교적인 허위 선전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시키는 '나비현상'을 확대시켜 가고 있는 원흉이 되고 있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 "금강산에서 경교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는가? 이 경교비가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면 사진이라도 전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중국에서 가져온 사진이라면 여기에 전시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당나라 경교의 중요한 사진들이 더 많이 있으니까.  그러나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이 '금강산 경교비' 사진을 전시한 것은 그것이 '금강산에서 1917년 발견되었다'는 것을 선전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증거로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그 내용에 속은 일반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연도와 장소까지 표현한 '1917년 금강산에서 발견한 경교비"로서 인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시기 오랜동안 갈 수 없었던 시기에 금강산 그것도 장안사에 경교비가 있다고 거짓 주장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분단시대에 남북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던 시대를 노린 사기수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금강산에 오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실이 들통이 나버렸다. 그런 결과 숭실대 박물관측은 말을 또 바꾸기 시작했다. "중국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산 장안사에 세운 기념비를 탁본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금강산에 어떤 기념비라도 사실 세웠었다는 말도 사실일까? 장안사에 갔다 온 사람들에게 그 경교비 기념비를 본 사람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이라도 사진찍어 난리를 칠 일인데 잠잠하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자체마저도 '탁본'이란 것 외에 아무 현장 사진도 없다. 눈감고 아웅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사 절에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한국에서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는 주장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담녀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금강산 교류가 그렇게 많았으면서도 장안사의 '경교 기념비'는 있었던 자리 사진도 장안사 사진도 찍어왔다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어떤 외국인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장의 흔적이 완전 없어지는 거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식으로든 '금강산에서 발견된 경교비'와 '중국의 경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6년에 세운 기념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 경교비 사진을 찍어 마치 경교 신도들이 신라 때 금강산에 세운 경교비인양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돌십자가'에 대한 거짓 증언들을 보았다. 이제 경교비에서도 이와같은 허위와 혼동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경교비 탁본 사진'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금강산에서 탁본한 방증이 없으며 마치 금강산에 경교비가 본래 있었던 것처럼 허위선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박물관측은 '도굴'을 '발굴'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금강산 경교비 탁본에 대하여 이제 와서 교묘한 말을 하고 있다. "경교의 동양 전래설을 주장했던 고든(E.A.Gordon) 여사가 우리 나라 경교 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6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조한 경교비를 건립하였는데, 김양선 선생이 이를 탁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의 근거나 그 어떤 원형의 사진 남은 흔적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든의 경교 기념비'의 근거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이 대단히 학술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미사려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경교비의 모조비 탁본과 중국 모조비의 금강산 기념비 탁본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기념하는 금강산 기념비 탁본'이라는 것은 중국 찬양 기념비가 되고 있을 뿐이다.  781년 당나라 씨안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845년 사라졌다가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 때의 경교비를 대신하여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 중국측은 모조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중국의 그 모조비석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기념으로 세운 것이 지난 1916년이며 그것을 세운 사람이 E.A. Gorden 여사"라는 것이다. 고든 여사가 '기념비'를 세웠다면 한국과 관련한 단 한 줄의 의미 부여의 귀절도 넣지 않고 중국 경교 유행비의 모조비를 본딴 '모형비'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모형비'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확인이 안된단 말인가? 이 모두 거짓이다. 왜 '탁본'만 있고 그 사진은 없다는 것인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그 '탁본'은 그동안 '사진'이라고 거짓 선전되어 오기도 했다. 사진이 있다면 장안사의 어느 위치에 어떤 배경인지 왜 밝히지 못하고 있는가? 고든이라는 외국 여인이 그 기념비를 세웠다면 왜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경주 등에 세우지 않고 하필 심심산곡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다 세웠다는 것인가? 당나라 '장안(씨안)'과 같은 이름의 '장안사'라서? 경교비 기념이 장안사를 위한 것인가 한국을 위한 것인가? 사기 행위를 위한 한심한 말놀이에 불과한 것을 볼 수 있다. '금강산 기념비 탁본'에서도 '돌 십자가' 출처 기록을 스스로 없앴던 김양선이 다시 등장한다."금강산 경교비를 김양선 선생이 탁본하였다"는 것이다. 분명 앞서 '석등 밑'인지 '우물 안'인지 '암석 위'인지 그 정체불명의 '돌십자가' 발견 장소 기록을 없앴던 그 김양선이다. 과연 김양선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탁본을 한 것일까?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김양선은 그 탁본을 마치 금강산에 경교신도들이 경교비를 세운 것처럼 선전했던 결과가 '금강산 경교비'로 표현되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경교비 사진'인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6-70년대 물의를 일으켜 2004년 재개장 될 때까지 공백 기간 동안 신라의 역사적 유적인 경주 불국사에 대하여 수많은 왜곡된 선전이 이루어졌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에 대한 문제 속에는 이렇게 당나라 경교비 모조비가 '금강산에 있는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되어 왔던 허위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시기에 들어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이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다. 물론 씨안의 경교비도 781년에 세운 것이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어 지금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중국 씨안 비림(碑林)에 있는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을 때의 당나라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오리지날 모습This stele, erected in 781 in Xi’an, includes a list of 70 Nestorians who, with Arabs and Persians, were active traders in China during Umayyad and Abbasid times. The Nestorian Tablet had been originally Located at the Chongren Monastery, a mile west of the old Xi’an city walls. The tablet disappeared, probably during religious persecutions in 845. It was unearthed eight hundred years later, in 1625http://www.ciw.edu/publications_online/china_exploring_interior/china_revisions-Pages/Image36.html   1907년 덴마크인이 반출하려했던 사건으로 세워진  경교비 모조비의 모습. http://www.assyrianchurch.com/forum/viewtopic.php?f=5&t=768 금강산 경교 모조비 탁본이란 것은 우리나라와 경교의 역사를 밝히는 그 어떤 근거를 가지는 자료가 아닌 것이다. 그런대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마치 대단한 '금강산 경교비'인양 인식되기에 알맞게 정체불명의 '돌십자가'와 함께 '금강산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하는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경교 부분 전시 모습.문제의 돌십자가 옆으로 '경교유행중국비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모조비를 탁본한 이 탁본은 '금강산에 경교비가 있다'는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http://blog.cbkmc.com/blog/index.php?article_id=333&blog_code=sunghwa 당나라 경교비 즉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진품은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그 모조품은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는 세워져 있다. '중국의 경교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모조비를 금강산에 세웠다는 모형비석 탁본'이라는 것은 그래서 많은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키는 근원지가 되고 있다. 중국 경교비가 아닌 그 중국 모조비를 기념하는 비문을 탁본해 놓고 '금강산 경교비'가 세워진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위 사실들을 왜곡 선전해 온 결과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에 이어 "신라 사람 김대성이 석굴암을 축조할 때 하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그야말로 허구의 사실들이 확대되는 글들이 나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http://jesu-ufo.com/myth/0myth-116.htm)     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 아래의 사진 또한 숭실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른바 '십자가상'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친 아전인수식의 기독교 박물관측의 해석일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십자가상'이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보다 1천년 이상 앞선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발견되어 왔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전시 주장하고 있는 '한국 경교 십자가'  이 십자가상들을 놓고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제(銅製) 십자무늬 장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위의 동제 유물은 유물이 맞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대로 청동기시대의 팔주령 방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2천년 이상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아래 사진들을 보라. 이 유물들도 '십자가'이다. 이들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도 경교의 십자가라고 하겠는가?   *전남 대곡리 출토 팔주령 방울.      전북 익산출초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  위 사진 왼편의 팔주령은 이미 고대 우리나라 무속의 전통 방울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숭실대에 전시하고 있는 '동제 십자가 장식'이라는 것은 오히려 그 가장자리의 구멍들에 방울을 달았을 팔주령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차라리 십자가를 주장하려면 위 사진 오른편의 전북 익산 출토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의 십자일광문(十字日光文)이 더 십자가를 닮아 있다. 이것을 만일에 전문 발굴팀이 발굴하지 않고 김양선과 같은 어느 신뢰성 없는 기독교인이 찾아냈다면 이것도 경교 유물?이라고 했을 것이 아닌가. 이 원형유문청동기 무늬는 한국식 세형동검 2기 ~ 3기 (대략 기원전 3세기)에 유행했던 십자문으로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십자문양이다. 십자가 문양만 보면 경교의 경끼를 일으키다간 차라리 한자의 열을 나타내는 '十' 자가 경교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 다음으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화살촉 모양의 비금속세 십자무늬"로 호도하고 있다는 숭실대 전시 물건을 보자. *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십자무늬 장식 유물'로 주장 전시하고 있는 물건.*오지여래(五智如來 the Five Wisom Buddha)의 만달라를 보여주는 오각 별의 모양이다. 위의 사진의 문양은 십자가 문양이 아니라 오히려 만다라 문양이다. 무속적 태양숭배의 오방사상이 나중에 전이된 불교의 댜니 만다라(Dyani Buddha Mandala) 모양에서나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미지일 뿐이다.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전체적으로 십자가이다.  *티벳의 댜니 만다라(Dyani Buddha Mandala)다섯 개의 원형 불상을 축으로 하고 있다. *오각 만다라 http://www.timboucher.com/journal/2009/01/07/mandalaos-living-infosystems-animist-internet-everyware-spiritual-computing-ambient-intelligence/ 십자가는 특정 종교의 로고가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무덤 모양에도 등장한다. 필자가 오하이오주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도 기독교인 인디안이 그곳에 묻혔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무조건 기독교의 것이라는 인식은 우리나라 고대 청동기시대의 무속적 방울에서도 발견된다. 경교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거의 1천년 전에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어거지를 쓸까 사진을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충남 예산군에서 출토된 십자문이 들어 있는 청동기시대 팔주령을 보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또 하나의 '청동기 시대 기독교 십자가'라고 우기며 전시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팔주령 안에 보이는 십자일광문충남 예산군 출토 경교의 십자가는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스러운 문양을 가졌던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적인 요소가 더 중심에 서린 내용이 많다. 경교는 오늘날 신흥종교의 일부처럼 불교와 기독교의 합종파의 한 양상이었다. 아래 사진은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에 들어온 중국의 경교 십자가이다.   *불교의 卍자가 강조된 중국 네스토리안 십자가.만다라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5. '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 이제 본격적으로 '신라 마리아 성모상'의 허구를 분석할 차례이다.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서 특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 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며 '당시 중국의 경교 선교사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보는 등 불교와 융합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더욱 경악했다. 기독교가 불교와의 문화적 교류를 주장하는 유물을 다루는 숭실대의 기독교 박물관에서 어떻게 이렇게 불교 문화를 모르고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과연 '불교에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이른바 '불국사의 돌십자가, 성모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리서치도 그 어떤 불교 유물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는 말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문제의 '성모자상' 위의 사진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주장하고 있는 문제의 그 '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 그 물건이다. 분명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이다. 한 눈에 보기에 이것이 기독교의 성모상은 아니다. 그것을 지금 필자는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먼저 불교에도 관음보살상에서 '모자(母子)불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숭실대 최관장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오류를 안고 있는 발언을 한 것에서 위의 '성모자상'이 결코 기독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증한 것이 될 것이다. 이글에서 여러 사진 증거들을 필자가 첨부해두겠지만, 불상의 역사는 관음보살상의 역사와 함께 '모자불상'이 수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이른바 '성모상' 또는 '모자상'이 마치 기독교에만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박물관측의 주장을 볼 때 기독교인들의 문화 역사 인식의 폭에 대해서 참으로 배타적 무지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기독교권 외적인 곳에서 종교적으로 찾을 수 있는 '모자상'은 고대 인도 및 메소포타미아 유물, 동아시아의 도교 유물들은 물론, 불교의 관음보살상을 포함한 수많은 '모자불상'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 불교 및 도교 그리고 토속 신도(神道)에 남아 있는 모자상 또한 모자불상(母子佛像)과 더불어 많이 남아 있다.  성기문씨도 일본의 모자상들에 대하여 겨우 '일본 천주교의 성모자상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편협한 인식의 폭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마리아관음상. (사진: 성기문)일본에는 이와같은 천주교 성모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현재에 남아있는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는 일본에서 발견되는데, 1638년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시대에 천주교인들(카쿠레 크리시탄)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 관음상과 같이 생긴 성모자상을 만들고 관음상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이는 비밀리에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였던 성모관음상(Maria Kann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기문의 앞 글에서) 성기문의 '일본에는 천주교 성모상만 있다'는 말은 일본에는 기독교적인 성모상 또는 기독교 박해로 성모상을 속이기 위하여 '성모관음상(Maria Kannon)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마저 일본 종교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일본에도 '모자불상'은 무수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서 이른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오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왜곡 선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출토된 불보살상(佛菩薩像) 모양의 마리아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교와 불교문화의 교류와 경교의 한반도 유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형보관(花形寶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 아이를 무릎 위로 안고 있는 형상이다. 전체적인 신상의 양식은 당시의 불보살상을 따르고 있으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기존의 불보살상 양식과 차이가 있다."http://blog.cbkmc.com/blog/index.php?article_id=333&blog_code=sunghwa 위의 주장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이 나오는 성모상은 무조건 기독교의 것으로 보려는 그릇된 판단에서 기인하는 '성모상 = 기독교의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의 오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전혀 모르는 결과이며, 불상만이 아니라 도교적인 성모상 및 태양숭배시대의 대지지모(大地之母) 등의 무속적인 성모상에 대한 인식 또한 완전히 결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관음보살상에 대한 인식 또한 다양한 역사적 배경의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결과이다. 관음보살상 중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 자모관음(慈母観音)등의 불교적 배경이 있고 도가적인 성모자상으로서는 대지지모(大地之母) 선도성모(仙桃聖母) 등이 있다. 인도 힌두교의 하리티(hariti) 계통의 성모자상 또한 그 파급이 세계적으로 넓다. 기독교인들이 '성모상 = 기독교의 것'으로만 그릇 인식한데는, 무엇보다도 서양 기독교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리(Mary) 여신이나 소피아(Sophia) 여신 등의 성모적 위치를 비롯한 유럽이나 중동에서 기독교 외의 또는 기독교 이전의 전통 토속 종교들이 가진 'Divine Mother(또는 Holy Mother)'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결과라고 하겠다. 마치 기독교 성현들의 광배라고 하면 그것이 고대 인도 불교의 영향을 전혀 모른 채 광배가 그려진 인물만 보면 '기독교 성현'으로 주장하는 꼴과 같은 것이다. 필자는 문화비평으로 <광배(光背)의 유래는 일광신(日光神)의 무지개> 라는 글에서 동서양 광배를 다룬 바가 있다. http://cafe.daum.net/zoomsi/XBd3/9 비잔틴 기독교에서 시작한 기독교 성현들의 광배(aureola 또는 aureole)는 역사적으로 동양의 광배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성모상의 전신광배인 이른바 만돌라(Mandorla) 또한 그 이름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의 만다라(Mandala) 문양의 영향이라는 것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교의 영향이 당나라까지 들어왔다고 해서, 성모자자상이 그때 처음 들어온 듯한 착각은 버려야 한다. 이미 동양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선불 신불의 성모자상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경교가 마치 오늘날 천주교에서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캐토릭의 동방 이단'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인데 오늘날 타문화에 배타성을 버리지 못하거나 문화수용의 제한에서 이단논란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마치 경교가 기독교의 정통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도 모순을 보이는 것이다.  부처와 마니를 일치시켜 신앙화했던 마니교가 그랬듯이 네스토리우스 경교 또한 지중해로 간 기독교와는 전혀 다르게 부처와 예수를 일치시킨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합성종교적 성격까지 있는 그런 종교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차별화하여 '경교(景敎)'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교(景敎)는 그 심벌에서도 십자가보다 '卍' 자를 중심 로고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 당나라 경교가 종교간 융화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단에서 진실 여부를 무시한 채 '불국사에서 성모마리아상이나 돌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식의 주장을 다시 재개하고 있는 것은 종교간의 대화나 우리 문화의 올바른 이해에서 커다란 문제를 보여주고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 이해의 차원에서도 신뢰성을 떨어트리는 행태일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개신교의 타종교에 배타적인 자세와 너무나 모순적인 행태라 할 수 있다. 경교를 예를 들면서 진정한 종교 포용 정신이라면 십자가와 성모상이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이웃사랑 문화간의 대화를 선교 이상 적극 추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진정한 대화는 하기 싫어하고 일찍 '기독교'가 동양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건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행태일 뿐인 것이다. 불교 유물들을 거짓으로 기독교의 것으로 주장하려 '돌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상'을 기독교의 팽창주의 상징으로 이용해보려는 약은 술책의 자세가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유물의 감정으로 보아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신라 성모 마리아상'은 경교 유입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모상일 수가 없다. 당나라에 들어왔다고 해서 무조건 신라가 모두 수입했다고 보는 것도 역사적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도와 당나라의 법난으로 퇴색해 가는 것을 보고 신라 불교는 서역 천축국 중심 세계관에서 신라 즉 동축국 중심의 불국사상에 의하여 불국사를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차원에서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측이 다시 전시 주장하고 있는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들'에 대한 선전은 전혀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자세히 그 유물들을 감정해보면, 전통 불교 모자불상일 따름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숭실대 전시의 성모상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기독교 성모상이 아니라 불교의 관음보살상의 하나로 송자관음상 또는 자보관음상이라고 필자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숭실대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들'에 대한 첫 분석일 것이다. 우선 문제의 성모상을 자세히 보라!      1) 연화대가 있다 먼저 위의 모자불상(母子佛像)의 사진을 자세히 보라. 앞서 올린 숭실대측이 조명을 어둡게 하여 퍼트리는 사진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성모상 기단 아래에 연화대(蓮花臺)가 보일 것이다. 숭실대 전시 '성모상'의 기단부의 연화대가 기독교의 것이겠는가?  연화까지 기독교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르겠으나, 기독교 성모상에는 연화대가 없다. 있다면 그 증거 유물들을 제시할 수 있을까? 더더욱 연화대가 있는 위의 모자불상을 이것을 '불교화된 성모상'이라고 고집한다면 다시 '우물'로 갔다가 '암석'으로 갔다가 하는 헤메는 말이 될 뿐이다.  2) '성모상'의 전신광배인 오레올라(aureola)의 문양이 불교적이다. 기독교 성모상에는 전신광배가 톱니바퀴 모양이 기본이고 작은 여러 개의 불상 모양들을 두른 전신광배를 하지 않는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전신광배 오레올라(aureola) 주변에 '염견(焰肩) 불상'의 작은 불상 얼굴들을 새겨넣고 있다. 위 사진의 '성모상'의 꼭대기 부분 또한 또 하나의 작은 불상이다. 이러한 중앙 불상 주변에 여러 작은 불상을 새겨 넣는 불상을 댜니 불상(Dhyani Buddha)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모자불상으로서 관음보살상 중에 송자관음(送子觀音) 또는 자모관음(慈母観音)의 모자불상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관음보살 계열에서 바다(또는 물)와 관련하여 불보다 물인 파도를 전신 광배에 두른 '수견(水肩)불상들'이 있다. 그러한 둥근 파도 문양이 전신광배로 둘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양은 때로 '수견(水肩)불상'이 불상의 얼굴이 아닌 파도 이미지인 둥근 무늬로 대신하기도 한다. 문제의 숭실대 '신라 성모상'과 비교해 보라.    *수견(水肩)불상 계통의 관음보살의 기본적인 모습Cosmic Kwan Yin Mini Statue 중앙 불상 주변에 작고 둥근 문양을 넣는 것은 기독교 성모상이 아니라 불상 전통에서 중요한 계통의 하나이다. 지장보살 계통의 오지여래(五智如来) 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에서 볼 수 있는 다중 소불의 전신 광배 모양을 한 티벳의 탄트라 불상의 댜니 불상 바이로차나(Dhyani buddha Vairochana)에서 그러한 모양을 볼 수 있다.   *티벳의 댜니 보살 바이로차나 (Dhyani buddha Vairochana) http://www.mydzi.blogspot.com/2008/06/dhyani-buddha-vairochana.html  인도 티벳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에 영향을 주어 이러한 댜니 불상의 역사는 '모자불상'인 송자관음 및 자모관음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3) 불교에서 모자불상이 있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측은 '유물들이 가짜라면 박물관을 문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왜 닫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이 불교의 모자불상이라면 그것은 가짜 기독교 성모상을 선전한 것이 되기에 박물관은 문을 닫아야 한다. 아래의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불상들을 보라.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관장의 말과는 전혀 달리 '불교에도 아기를 안은 불상'이 있다.  *연화대 위에 아기를 않은 송자관음의 전형적인 예.불교에도 '성모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送子觀音像 淸朝 木雕 *청대 中期, 弘寶齎博物館http://expo.sc001.com.cn/collector/hbz/detail.asp?vid=16014  *일본의 지보칸논(慈母観音)  이쯤 해서도 이미 결론은 난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이미 70년대 사회적인 논란으로 문을 수십년간 닫은 바가 있다. 2004년 다시 재 개장하여 허위선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불국사 등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폄훼의 문제를 유발시키는 문제라는 면에서 그냥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자불상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의 쓸데없는 논란에 휩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6. 전통적인 모자불상: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신불(神佛) 또는 선불(仙佛)의 전통이 약화되고 오히려 선불(禪佛)의 영향이 강하여 어떤 면에서 중국과 일본에 비하여 관음보살 유물들의 다양성이 적어진 면이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강하게 존재했던 신선 도가사상이 고려 오백년 불교시대와 조선시대 유교 오백년의 영향으로 무속적인 전통으로 퇴화된 감이 있다. 특히 일제시대에 문화재 반출사건은 천문학적인 일이었으며, 전란 속에서도 사라진 유물들이 부지기수였다. 반면에 짧은 왕조시대의 교체 속에서 중국의 불교는 오히려 관음불상에서 다양한 도가적 토속적 선불(仙佛)의 전통이 남아 질 수 있었다. 일본 또한 고대 한반도의 무속적 신선(神仙) 사상이 신도로 발전하였던 바, 중국과 일본의 관음상의 전통에는 상대적으로 송자관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송자관음(送子观音)을 일본에서는 지보칸논, 즉 자모관음(慈母観音)이라고 한다. 왕조의 역사와 식민지 및 전란을 통하여 없어졌을 또는 반출되었을 우리나라의 모자불상의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지금 중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송자관음과 자모관음으로부터 그 역사와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  1) 중국의 송자관음(送子观音)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릇 불교 성모상에 대한 배경 이해가 약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불교의 송자관음(送子观音)에 대한 유래를 여기에 필자의 번역으로 첨부해 둔다.    《法华经》中说:“若有女人设欲求男,礼拜供养观世音菩萨,便生福德智慧之男;设欲求女,便生端正有相之女。”这是民间“送子观音”的由来。 “送子观音”俗称“送子娘娘”,是抱着一个男孩的妇女形象。“送子观音”很受中国妇女喜爱,信徒们认为,妇女只要摸摸这尊塑像,或是口中诵念和心中默念观音,即可得子。 中国佛教之所以创造出一个“送子观音”来,无非是基于下述原因:  一、 受儒家“不孝有三,无后为大”思想的影响,认为婚后没有孩子,断绝香火,是对祖宗最大的不孝。所以创造出“送子观音”珲,使之成为没有孩子的夫妇叩拜、供养的主要神灵。   二、 受封建伦理“多子多福”思想的影响,认为子孙满堂、香火旺盛,是最大的“福气”。所以创造出“送子观音”来,使之成为新婚夫妇祈求生儿育女的主要神灵。   三、 受中国传统“母以子贵”思想的影响,认为“养儿可以防老”,没有儿女老了就没有依靠;儿子升官发财,父母也能富贵、享福。所以创造出“送子观音”来,使之成为天下母亲祈请保佑早生贵子的主要神灵。 送子观音是观音菩萨化身之一,通常作手捧婴儿的中年妇女相;也有作观音双手合十状,前立一童男。此外,还有“子安观音”,亦为中年妇女的形象。这是中国佛教为了保佑孕妇安全生产而创造的神灵形象。http://www.rjzd.cn/MarketTrade/TradeInfoDetail.aspx?InfoId=52  《法华经》에서 "만일 여인이 남자에 욕심을 내지 않고 관세음보살에 예배 공양하면, 복과 덕과 지혜의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여인이 다른 여자를 탐하는 일을 버리면 단정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송자관음'의 유래이다. 송자관음(送子观音)의 속칭은 송자낭낭(送子娘娘)이라고도 하는데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형상을 말한다. 송자관음은 중국의 여인들에게 많은 기쁨과 사랑을 주고 있고 불교신도들을 위하여 대단히 존귀하고 절실한 불상이다. 만일 마음을 모아 송자관음에게 묵념하여 기원하면 득남하는 수가 많다.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송자관음은 유교에서 말하는 불효를 세번하면 나중에 크게 될 수 없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혼인 후에 자식이 없게 되어 결국 제사가 끊어져 조상들에 최대의 불효를 범하게 된다. 송자관음은 그래서 아기가 없는 부녀들이 공양하는 신령한 불상이다.   나아가 봉건논리인 '多子多福'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손이 집안에 번성하여 제사가 번성하는 것이 최대의 복과 기운을 가져온다는데서 송자관음 신앙이 비롯되었다. 송자관음 신앙은 그래서 신혼부부가 신령한 송자관음상에 빌어 소생을 얻는 신령한 불상이다.   중국 전통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귀하게 한다(母以子贵)"는 믿음의 영향을 받아 "아이를 기르면 늙지 않는다(养儿可以防老)고 하고 자녀가 없으면 늙어 의지할데가 없게된다는 믿음이 있다. 아이을 낳으면 사회에서 벼슬을 하거나 부자가 되고, 부모는 부귀하게 되며, 복을 누리게 된다. 관음송자는 하늘 아래 어머니가 자녀를 귀하게 보호하는 것을 기원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송자관음은 관음보살의 화신의 하나로서 보통 어린 아기를 한 손에 안고 있는 중년의 여인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의 관음상이 아이를 앞에 세운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외에 아기를 안고 있는 불상으로 '자안관음(子安观音)'도 중년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임신한 여인을 안전하게 출산하도록 보호하는 신령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번역/ 필자)     중국의 송자관음에 해당하는 일본의 자모관음은 다양한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태양숭배 영향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기에 우리나라 고대의 태양의 여신 숭배에서도 분명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존재했을 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토속 모자상들 가운데는 신라의 '선도성모자상(仙桃聖母像)' 등의 신라의 유물들이 있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자모관음(慈母観音)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일본의 지보칸논(慈母観音)과 카리데이모(訶梨帝母) 지보칸논, 즉 일본의 자모관음(慈母観音) 불상은 글자 그대로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의 그 '자비'의 표현은 다분히 태양숭배시대의 태양의 성모에 대한 믿음의 잔흔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관음은 자비의 불교 여신이다. 자모관음의 그 오리지날 유래는 인도의 힌두교 하리티(hariti) 불상과 전통 태양숭배시대의 신도(神道)의 성모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보칸논이 관음보살상 계열의 모자불상이라면 카리데이모, 키시모진(또는 키시보진)은 신도모자상 계열의 불상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13세기 카마쿠라 시대의 성모자상인 카리데이모(訶梨帝母) 키시보진(鬼子母神)은 신도(神道) 유래의 성모자 불상이다.  *일본의 카리데이모(訶梨帝母) 성모자 불상. 13세기 카마쿠라. 시가현 온조우지(園城寺) Kariteimo (Kishibojin, Kishimojin) Kamakura Era (Early 13th Century), Painted Wood, Height 43.9 cmTreasure of Onjouji Temple (園城寺, also called Miidera 三井寺)in Shiga Prefecture (Designated an Important Cultural Property)http://www.onmarkproductions.com/html/kariteimo.html 일본의 불상에도 이와같이 분명하게 성모자불상이 있다. 이것을 일본 천주교 성모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도 종교의 배경에서 유래하는 성모자상을 보면 고대 한반도의 선도성모상 등의 모습에서 이와같은 성모자상이 존재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 자모관음(慈母観音)의 전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힌두교와 신도의 자모관음이 합류하여 상호 거의 유사성을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잘 낳게 한다는 신도의 여신인 코야스사마는 불교의 코야스관음(子安観音), 코야스 지장((子安地藏), 코야스키시보진(子安鬼子母神), 자모관음(慈母観音), 카리테이모(訶梨帝母)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In Japan, there are many deities who are worshipped especially for their ability to bless couples with children, and to protect and save children from disaster. These guardians often appear as heroes in modern stories and cartoons. Most originated in Hindu myth and over time were incorporated into Buddhism, while others sprang from Japan's indigenous Shinto tradition. Over the centuries, however, the two traditions have merged, and many of the deities now share similar attributes. For example, the Shinto goddess Koyasu-sama, who grants easy childbirth, has Buddhist counterparts named Koyasu Kannon, Koyasu Jizo, Koyasu Kishibojin, and Jibo Kannon. http://www.onmarkproductions.com/html/child-protectors.html   인도의 관음상은 남성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 한국 일본의 관음상은 여성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것은 해돋는 동방의 나라들에서 태양숭배시대의 태양의 여신에 대한 고대 성모 신앙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시조신으로 믿는 일본의 여신 신앙은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전통에서 일본의 지보칸논, 카리테이모 모자불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의 천주교 성모상들의 일부는 일본 전통 자모관음을 모방한 면은 있지만, 일본의 성모상은 모두 천주교 성모상이라는 관점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송자관음, 자모관음, 자안관음(子安観音), 자안지장(子安地藏), 키시보진(鬼子母神), 카리테이모(訶梨帝母) 등의 성모상을 기독교 성모상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박물관의 최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고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서 말했다. 과연 불교에는 성모자상이 없는 것일까. 필자가 오랜 추적으로 찾아낸 자료들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은 모두 '기독교 성모상'이라고 전시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漆彩绘木雕 送子观音菩萨像新华网河南频道http://www.ha.xinhuanet.com/fuwu/kaogu/2005-03/24/content_3912350.htm     *清 楠木雕送子观音像http://blog.artron.net/indexold.php?50840/viewspace-197947  *명나라시대 송자관음상德化窑 送子观音像,高62CM,印款:张寿山(明代德化窑瓷塑大师),劳请师友断代并估价。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CB%CD%D7%D3%B9%DB%D2%F4&in=27917&cl=2&cm=1&sc=0&lm=-1&pn=1845&rn=1&di=2016995656&ln=1987 *송자관음상http://www.chcoin.com/bbs/read.php?tid-1502954.html   *명대 목조관음송자. 明代木雕观音送子 , 来自藏友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B9%DB%D2%F4%CB%CD%D7%D3&in=11718&cl=2&cm=1&sc=0&lm=-1&pn=70&rn=1&di=2182210536&ln=450  *송자관음(送子观音)http://www.mycollect.net/trade/show-239898-2.html    *十五世 铜鎏金送子观音像http://pm.cangdian.com/Data/2007/cj20071101/pz003679/html/pz003679-0093.html    *모자불상. 중국 쓰촨성 玉蟾山http://www.hudong.com/wiki/%E7%8E%89%E8%9F%BE%E5%B1%B1 *모자불상, 타이완http://trip.writers.idv.tw/2007_07_01_archive.html 後來世界之母濕娃女神投胎為陀剎的女兒莎蒂(雪山神女),最後成為濕婆的妻子。看著上方的濕婆神與妻子雪山神女,在凱拉薩神山上,底下的多頭魔王『羅婆有那』用千隻手臂搖動這神山,山裡的獅子都驚惶失措的站起來逃跑,然後上一層有些鳥人、象人、馬人等半人半神的動物希望濕婆能夠打走這個魔王,但濕婆一付心不在焉的樣子,根本不把魔王放在眼裡 불교와 도교는 서로 오늘날 한국 산사에서 칠성각과 대웅전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관음보살상에 융합되어 있었다. 신선도가적인 선도성모(仙桃聖母), 대지지모(大地之母), 후래세계지모(後來世界之母), 처자설산신녀(妻子雪山神女),송자관음(送子观音) 등은 불교가 과거 태양 성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結.불교에도 모자불상이 있다 일본의 카리테이모(訶梨帝母)에 영향을 미쳤을 신라의 선도성모에 대한 성모상은 지리산 성모제단에 남아 있었고 지금도 그 성모상 종류의 하나를 지리산 인근 천황사에다 옮겨 모셔놓고 있기도 하다.  신라의 선도성모(仙桃聖母)는 <삼국유사>에 나오며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신라의 동신성모(東神聖母)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동신성모(東神聖母)의 '東神'은 뜻 그대로 동쪽에서 뜨는 태양의 여신이며 일본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프로토타입이라는 것은 필자가 이미 <신화이야기> 시리즈글에서 수차 논하였다.  세계 신화에서 고대 여신은 어머니신을 말하며 아기를 태어나게 하는 태양신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시조 신화들이 모두 태양의 여신과 관련한 그 시조 아기들이 탄생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중요한 성모자 신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수탄생과 성모 마리아의 배경에도 같은 작용을 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탄생 시대에 괌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중동 인도 문명의 하리티(hariti) 성모와 마리(Mary) 성모, 커어키 비잔틴 지역의 소피아(Sophia) 성모 전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캐톨릭의 역사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과는 독립적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강하게 자리해 왔음은 이러한 고대 성모 신앙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 루터이래 개신교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불교의 그것처럼 여성적 종교를 남성화시킨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불교는 태양의 여신이 관음보살에 융합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모자불상이 남게 된 배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캐토릭이 성모자상을 유지해왔다면 동아시아 불교에서 관음보살 신앙 역시 여성적이며 모자불상을 남겨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그 유물의 정확한 감정에서나 불교의 관음보살상으로서 '모자불상' 특히 송자관음상 또는 자모관음상의 모자불상이라는 것이 판명난 것이다.  이제 '불교에도 아기를 안은 불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측은 스스로 말한대로 박물관을 문닫아야 할 것이다. 김양선 목사의 '돌십자가' 발굴에 경로에 대한 거짓은 물론 '신라 마리아 성모상'은 기독교 외의 불교모자상이라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유산에 대하여 허위나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계속되지 말아야 한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연화대가 있는 송자관음(또는 자모관음) 불상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04/25/09 오두)  * 이어서 <숭실대 '신라 마리아 성모상' 주변의 아홉 얼굴의 정체>가 이어질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모자불상에 대한 필자의 분석이 전개될 것이다.  인도 벵갈 팔라왕조. 바이라파(BHAIRAVA) 성모상 주변에 여러 명의 소불들이 있고 오른손에 아기를 안고 있다.India - Bengal - Pala Dynasty - 10th / 11th Century     *댜니 불상 계열의 금동여래. 국보 제85호 마플카톡트윗페북메일URL복사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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