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an style="font-size: 36pt;">새</span><br></p>
1901~ 1976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뷔르츠부르크 태생. 1925년에 양자학(量子學)의 한 형식인 마트릭스(Matrix)역학을 창시함으로써 미시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법칙인 양자역학(量子力學)의 태두로 불린다.
마트릭스 역학은 슈뢰딩거(E.schrdinger)의 파동역학(波動力學)과 함께 현재 이론양자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2종이 후에 동일한 결과를 낳는 것이 실증되어 양자를 포함한 일반적 이론체계로서의 양자역학이 생겼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던 그는 괴팅겐 대학 2학년 때 N. H. D. 보어의 연속강의를 들었는데, 날카로운 질문이 보어의 주목을 받아 두 사람은 사제(師弟)와 친구로서의 친교(親交)를 갖게 되었다.
23년의 학위논문은「유체(流體)의 난류(亂流)」에 관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해 괴팅겐 대학의 M. 보른의 조수가 되었으며, 24년 보른 밑에서 대학교수자격을 취득했다.
25년에 코펜하겐의 보어 밑에 유학, 반 년 동안 가장 충실한 연구생활을 보냈다.
25년 여름, 건초열(乾草熱)에 걸린 그는 요양을 위하여 북해(北海)의 헬골란트 섬에 머무는 동안 양자역학 건설의 기초가 되는 힌트를 얻었다.
만년에 그는 아내에게 그 때의 일을「나는 신(神)의 조화(造化)를 그 어깨너머로 엿보는 것을 허락받은 커다란 행운을 타고났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보른과 E. P. 요르단의 협력을 얻어 행렬(行列) 형식에 의한 양자역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아인슈타인과의 토론에서 힌트를 얻어 27년「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를 제창하고, 양자역학의 해석을 확립했다.
41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이때 F. 블로흐, H. A. 베테 등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포함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라이프치히 대학을 코펜하겐 대학과 함께 물리학의 메카로 만들었다.
양자역학 이외에도 중요한 연구를 잇따라 발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강자성체(强磁性體)의 이론」(1928),「장(場)의 양자론(量子論)」(1929),「원자핵구조론」(1932),「S행렬의 이론」(1943),「중간자다중발생(中間子多重發生)의 이론」(1949) 등이 있다.
만년의 20년간은「소립자의 통일(統一場)의 이론」의 확립에 의욕을 불태웠으나, 미완성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의 우라늄 계획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는데, 히틀러를 위하여 원자폭탄을 만들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소규모의 원자로(原子爐)의 연구에 그쳤다.
전후 독일 과학의 재건에 진력하여 1946년부터 70년까지 막스 플랑크 물리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53년에는 훔볼트 재단 종신총재가 되었으며, 57년에는 18명의 독일인 핵물리학자와 함께 독일 국방군의 핵무장에 반대하는「괴팅겐 선언」의 주도자가 되었다.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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