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쯤이었던 것 같다. <div>수요일 오전에, 작전관은 정훈교육을 하겠다며 승조원들을 사병식당으로 불러 모았다.</div> <div>정훈교육은 주적개념에 관한 것이었다.</div> <div>작전관과 행정관이 나서서 주적 개념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div> <div>후텁지근한 사병식당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승조원들은</div> <div>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꾸벅꾸벅 졸고 있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br /></span></div> <div>드디어 영겁 같던 교육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div> <div>행정관으로부터 마이크를 넘겨 받은 작전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div> <div><br /></div> <div>"행정관으로부터 주적 개념에 대해 잘 들었을텐데, 그럼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말 해 볼 사람 있습니까?"</div> <div><br /></div> <div>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므로 아무나 손 들고 일어서서 "네! 북한입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div> <div>그러나 선뜻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div> <div>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승조원들을 둘러보던 작전관은</div> <div>어서 빨리 아무나 일어나서 정해진 답변을 하고 끝내라는 듯이 재차 채근을 했다.</div> <div><br /></div> <div>"아무도 없습니까?"</div> <div>"......"</div> <div>"아무도 없으면 내가 호명을 하겠습니다"</div> <div>"....."</div> <div>"글로 하사"</div> <div>"....???"</div> <div>"글로 하사 없나?"</div> <div>"네?"</div> <div>"일어나서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얘기해봐"</div> <div>"제가 왜요?"</div> <div>".... 왜요는... 얼른 말 해봐"</div> <div>"그러니까... 왜 저한테..."</div> <div>"질문을 하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div> <div>"질문이..."</div> <div>"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얘기해 보라고!!"</div> <div><br /></div> <div>나는 잠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div> <div>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div> <div>그냥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되는 일이었다.</div> <div>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div> <div>"우리는 아직 전쟁 중인 휴전국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 되는 거였다.</div> <div>하지만...</div> <div>그 대답은 나의 평소 소신에 어긋나는 대답이었다.</div> <div>내 양심을 속여가며 윗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다.</div> <div><br /></div> <div>잠시 망설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div> <div><br /></div> <div><i><font size="3">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닙니다. 북한은 앞으로 통일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동반자이자 한 민족입니다.</font></i></div> <div><i><font size="3">오히려 우리의 해양주권과 영토주권을 위협하는 진정한 주적은 일본이나 중국입니다.</font></i></div> <div><i><font size="3">일본은 지금도 호시탐탐 독도 영유권을 노리고 있고,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독도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font></i></div> <div><i><font size="3">중국 또한 우리 기업들의 수출입 항로인 남방항로에서 자신들의 군사적 지배권을 확대하려 하고 있습니다.</font></i></div> <div><i><font size="3">또한 중국은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 고대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습니다.</font></i></div> <div><i><font size="3">만약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군사적으로 우리를 압박한다면</font></i></div> <div><i><font size="3">우리는 탈출구도 없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font></i></div> <div><i><font size="3">따라서 우리는 북한이라는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적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font></i></div> <div><i><font size="3">장기적인 관점에서 주적 개념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입니다.</font></i></div> <div><br /></div> <div>당연하게도 내 발언이 끝나자 사병식당 안은 쥐 죽은 듯 고요가 흘렀다.</div> <div>작전관도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닫았다.</div> <div><br /></div> <div>주임원사가 마이크를 넘겨 받고 나서야 장내는 정리가 됐다.</div> <div><br /></div> <div>"네, 글로 하사의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정훈교육을 마치겠습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그날부터 내 별명은 빨갱이가 됐고, 며칠 동안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집중 상담을 받아야 했다.</div> <div>한참 후에 안 사실이지만</div> <div>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의하고 공감했다고 한다.</div> <div>하지만 빨갱이로 몰려 진급에 문제가 생길까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div> <div><br /></div> <div>그 때, 조용히 내게 힘을 줬던 전기 선임하사, 작전관, 그리고 함장님...</div> <div>고맙습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