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95년 쯤이었나보다.</p><p>진해에서 수리 중이던 전남함으로 발령 받아 부임한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p><p>수리가 끝나고 인천으로 복귀하던 도중 군산 근처를 지날 즈음 갑자기 실전전투배치 구령이 나왔다.</p><p>중국 영해를 침범했다가 나포된 우리 어선이 벌금을 내고 석방되어 돌아오던 중</p><p>NLL 북쪽 공해상에서 북 해군의 조준사격에 선원 전원이 몰살한 것이었다.</p><p>(그 때 최전방에서 가장 먼저 현장에 투입된 함정이 내 동기가 근무하던 "천안함"이었다.)</p><p><br></p><p>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혀버렸다.</p><p>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공을 들이던 김영삼 정권에서</p><p>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묻어버린게 아닌가 싶다.</p><p><br></p><p>어쨌거나 그날 이후 2함대 근무자들은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p><p>안그래도 배가 모자란 판에 경비구역이 늘어나서 연간 항해일수가 300일 가까이로 늘어났다.</p><p>(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선임하사는 부인이 보고싶다며 울기도 했다)</p><p>게다가 수시로 NLL을 넘나드는 북 경비함정에 대한 경계도 강화되었다.</p><p>북 경비함정이 NLL 근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실전전투배치를 하고 대응을 했다.</p><p>그러다보니 밥을 먹다가도 실전전투배치 구령이 나오면 숟가락을 던지고 자기 위치로 뛰었고,</p><p>샤워를 하다가도 구령이 나오면 속옷차림에 비누거품을 묻힌채로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p><p>잠을 자다 말고 뛰어온 사람들은 그만큼의 수면시간을 날려야 했다.</p><p><br></p><p>그나마 대형함정들은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p><p>고속정 승조원들은 비상이 걸릴 때마다 수시로 출입항을 반복해야 했고</p><p>NLL을 사이에 두고 북 경비함정과 정면대치를 해야 했다.</p><p>특히나 자체 식사가 되지 않는 고속정들은 북 경비함과 대치 중엔 종일 굶는 일도 다반사였다.</p><p><br></p><p>그러던 어느날...</p><p>북 경비함이 우리 어선에 줄을 걸고 강제로 NLL 이북으로 납치하려는 시도를 했다.</p><p>우리 고속정들이 적극적으로 차단기동을 펼친 덕분에 무사히 어선을 구조하긴 했지만</p><p>우리 고속정들이 여기저기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p><p>그 사건 이후로 고속정 정수(함수) 부분을 강화하는 작업을 했다.</p><p>북 경비함정과 충돌해도 끄떡 없도록...</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제 1, 2차 연평해전 및 대청해전은 수년 간 이런 긴장이 지속되다 곪아터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r></span></p><p>원래 우리 해군의 대응 매뉴얼은 <경고방송 → 시위기동 <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차단기동 </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경고사격 </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격파사격>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적어도 1차 연평해전 때까진...</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그런데, 차단기동이란 말은 도대체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인지</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북 경비함이 우리 고속정을 조준하고 있는 상태에서</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국방부의 육군 장성들이 바로 차단기동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려버린다.</span></p><p>힘없는 우리 고속정들은 명령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차단기동을 펼쳤고, 결과는 처참했다.</p><p>제 2 연평해전이라고 알려진 사건이었다.</p><p>(나는 이 사건으로 친분 있던 후배 셋을 잃었다.)</p><p>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해군의 대응 매뉴얼이 바뀐다.</p><p><경고방송 및 시위기동 <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경고사격 </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격파사격></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위험한 차단기동을 없애고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동시에 하도록 해</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유사시 빠른 대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r></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어쨌거나...</span></p><p>1996년 8월... 드디어 발령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p><p>사통장은 내게 선임하사가 없는 배가 있으니 거기서 선임하사 역할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했다.</p><p>선임하사 TO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진급을 시켜주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사통장의 생각이었다.</p><p>하지만 2함대가 지겨워 1함대로 가려던 내겐 그런 솔깃한 제안 마저도 들리질 않았다.</p><p>결국 나는 <천안함>으로 발령날 기회를 버리고 1함대로 발령이 났다.</p><p>그리고 1함대로 발령난 지 불과 한 달 만인 1996년 9월 18일...</p><p>잠수함이 넘어왔다.</p><p>씨발!!!!!</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