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span style="font-size: 12pt;">"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있나이다"</span></b></p><p> </p><p>이 말은 이순신 제독께서 명량해전에 나가기 전</p><p>적함의 수는 많고 우리는 그 수가 적으니 차라리 육지에서 적을 맞아 싸우라는 선조의 권유를 뿌리치며 한 말씀입니다.</p><p>그런데, 우리 해군에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분이 이순신 제독 뿐만이 아닙니다.</p><p><br></p><p><b><span style="font-size: 12pt;">"국가와 민족을 위해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span></b></p><p><br></p><p>해군 출신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p><p>1948년 12월 15일에 손원일 제독께서 해군 초대 참모총장에 취임하시면서 남기신 해군 표어입니다.</p><p><br></p><p>오늘은 자랑스런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에 대해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p><p><br></p><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1/c491d2632349dc348e5d38fb65142d03.jpg" class="txc-image" style="clear:none;float:none;"></p><p><br></p><p>손원일 제독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신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로 1909년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습니다.</p><p>1921년에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p><p>당시 거부였던 손정도 목사는 길림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땅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고 합니다.</p><p>중학교를 졸업한 1925년에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나게 됩니다.</p><p>그러나 그곳에서 미국과 영국 해군들을 보고는 "독립이 되면 나도 조국에 돌아가 저런 해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p><p>그길로 의학 공부를 접고 <국립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들어갑니다. 1927년의 일입니다.</p><p><br></p><p>1930년 6월 졸업 후 마침 중국 해군부에서 해군보관(補官)을 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항해기술자들을 모집해 시험을 치르고,</p><p>성적우수자 5명을 선발해서 유학을 보내줬는데, 그 중 1명으로 선발되어 3년 동안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p><p>위키백과에서는 영국으로 유학을 간 것으로 나오지만 홍은혜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로 갔고 그 때 독일어를 배우신 걸로 확인됩니다.</p><p>유학시절 공부 뿐만 아니라 운동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손제독은 어느날 중국인 유학생을 두드려 패는 사고를 칩니다.</p><p>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마침 중국인 유학생들이 치고 있길래 같이 치자고 했더니 "망국놈이 무슨 테니스냐"며 놀리자</p><p>이에 격분해서 그 유학생을 두드려 패 버립니다. 얼마나 심하게 팼는지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장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p><p>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교장은 중국인 유학생이 아니라 손제독의 편을 들어주며</p><p>절대로 어느 누구도 '망국인'이라는 표현을 입에 담지 못하게 엄명을 내립니다.</p><p><br></p><p>유학생활을 마친 손제독은 1934년에 개성에 있는 누나를 만나기 위해 일시 귀국을 합니다.</p><p>그런데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상하이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의 임무를 띄고 잠입을 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합니다.</p><p>이로써 온 집안이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p><p>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무혐의로 풀려난 손제독은 다시 중국으로 가서 매부와 함께 남계양행을 세워</p><p>5년 동안 운영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합니다.</p><p>- 이때의 고문으로 인해 손제독은 날만 궂으면 허리통증을 호소하게 됩니다.</p><p>그리고 1940년 독일계 기업인 동화양행 사장의 부탁으로 동화양행에 입사해 상하이 지점장으로 파견나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p><p><br></p><p>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바로 귀국한 손제독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70명을 모아 해사협회(海事協會)를 발족하고</p><p>아버지의 땅과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돈으로 훈련을 시작합니다.</p><p>사실 당시 손제독은 남계양행과 동화양행에서 번 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기 때문에 처분한 재산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겁니다.</p><p>배도 한척 없었고, 훈련을 담당할 전문 교관도 없는 상황에서 훈련에 어려움을 겪던 손제독은 미군정청과 협의하여 많은 도움을 얻어 냅니다.</p><p>그리고 드디어 1945년 11월 11일 약 200여명의 대원들과 함께</p><p>안국동 - 안국역 방향에서 인사동길로 연결되는 초입 왼쪽 큰나무 아래 - 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합니다.</p><p><br></p><p>1946년 민간조직이던 해방병단은 미군정청에 의해 공식적인 정부조직인 "조선해안경비대"가 되고</p><p>손제독은 미국에 직접 편지를 보내 미해군 교관 15명을 초빙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합니다.</p><p>우리 해군 용어 중에 영어가 많고 미국식 생활 습관이나 예식이 많은 것은 이 때의 영향이 큽니다.</p><p>또한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생도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p><p>1척의 군함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1948년까지 총 37척의 군함을 인수하였습니다.</p><p><br></p><p>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하고</p><p>그해 12월 우리 해군 최초의 제독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합니다.</p><p>그리고 함정 건조기금을 모아 1949년 10월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했습니다.</p><p>백두산함은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부산으로 침투하기 위해</p><p>병력 600여명을 싣고 이동하던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켰으며 전쟁 기간 내내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p><p>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일조를 했습니다.</p><p><br></p><p>1949년엔 해병대를 창설합니다.</p><p>손제독은 전시에 해병대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고 해병대 창설을 준비하는데요,</p><p>지원자가 없자 궁여지책 끝에 사고 치고 감옥에 가 있는 군인들 380명을 데려다 훈련을 시킵니다.</p><p>그렇게 해서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됩니다.</p><p>6.25 전쟁이 발발하자 아직 체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변변한 무기도 없던 해병대원들은</p><p>수류탄 하나 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자폭함으로써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는 희생을 합니다.</p><p>또한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선봉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p><p>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불리한 상황에서 최일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p><p>"귀신 잡는 해병"이란 칭호는 이 때 우리 해병들의 활약을 본 외국 군인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p><p><br></p><p>손제독은 인천상륙작전 때 부인인 홍은혜 여사에게 "중요한 회의가 있어 3~4일 다녀 올테니 애들 잘 키우라"고 하고는</p><p>몰래 인천으로 가셨다고 합니다.</p><p>그리고 인천에서건 어디에서건 항상 해병대와 함께 싸우셨다고 하는데요,</p><p>당시 손제독의 지휘 방식은 "앞으로 가"가 아니라 "따라 와"였다고 합니다.</p><p><br></p><p>6.25 당시 알려진 일화로는 전쟁이 발발하자 손제독은 당시 육해공군 총사령관이던 정일권 장군에게</p><p>"정일권씨는 육지에서, 나는 바다에서 죽을 각오를 합시다"라고 말하며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p><p>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자</p><p>국군최고사령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p><p><br></p><p>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6월 예편이후 56년까지 제5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p><p>호위함 인수, 군종제도 도입,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발족 등을 통해 군의 사기 진작과</p><p>현대화된 군 조직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고,</p><p>국립묘지 창설, 국방대학원 창설 등 행정면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p><p>1958년부터는 2년간 주서독 대사를 역임하면서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p><p>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시고</p><p>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리셨습니다.</p><p>1960년 퇴임 후에는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시다가</p><p>1980년 2월 15일 작고하셨습니다.</p><p><br></p><p>무공훈장 태극장, 금성을지 무공훈장, 금성태극 무공훈장, 공비토벌기장, 6.25 종군기장,</p><p>국제연합 종군기장, 미국 은성훈장, 미국 자유훈장, 프랑스 레종드뇌르 훈장, 독일 십자훈장, 덴마크 적십자 훈장 등을 받으셨습니다.</p><p><br></p><p>부인이신 홍은혜 여사가 아직 살아 계시며</p><p>큰아들인 손명원씨의 둘째 사위가 그 유명한 홍정욱입니다.</p><p><br></p><p>이상으로 우리 해군의 영원한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p><p>저는 손제독에 대해 초임하사 때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책을 통해 알게 됐는데요,</p><p>제가 그런 분의 뒤를 이어 해군의 일원이 되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p><p><br></p><p>다음에는 우리 해군과 해병대의 어머니 홍은혜 여사에 대해 썰을 좀 풀어 보겠습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