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총이 발명되고 정규군이 도입되면서 중장갑은 역사의 뒤안길, 혹은 박물관이나 취미생활의 영역으로 물러났다.
이 시대에 그런 무식한 물건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엄청난 괴짜라는 딱지를 받기 딱 좋은 일이다.
허나 그런 물건을 대놓고 입고 다녀도 좋은 사람이 생기게 된 시기가 왔다.
소녀는 눈앞에 등장한 중장갑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저건 현대의 감각으로 재탄생한 물건이다.
박물관 표 갑옷은 여성용 갑주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구시대 갑옷에는 치마 따윈 없기 때문이다.
튼튼하면서 화려한, 실용성 여부는 입은 사람만이 알 법한 중장갑을 입은 은발 여인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백 가지 시련 속에 천 번의 전투를 겪고 만 번의 검을 휘둘렀음에도 불패, 피로 물든 갑옷에 나의 피는 단 한방울도 흘린 적 없나니!"
"...실례합니다, 잠시만 말 좀 끊어주시겠습니까."
"걸어 온 길에 오직 승리뿐이니 나아갈 길을 기다리는 것은 불패밖에 없을지니!"
"저기 잠깐만요."
"운명의 실은 가늘고 연약하나 결코 끊어지지 않는 법, 이 실의 인도로 찾아온 것은 그야말로 인연!"
"그러니까 잠깐 멈춰보라니까...."
"그 인연에 기대어 미렌 '발키리아' 아우레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반려가 되길 청하는 바입니다."
"반려합니다. 그 반려 말고 반려."
시작부터 멋대로 쏟아낸 장황한 소개와 권유를 단칼에 거절하자, 미렌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원통함을 내비춘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내 운명은 오직 그대밖에 없습니다!"
"죄송한데 제가 그런 거 맡을 처지가 안 돼요."
"운명을 받아들여 이 어려운 한국말을 이렇게나 잘 쓰기 위해 노력했는데!"
"왠지 죄송한데, 제가 배워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차라리 동정이라도 좋습니다! 아니, 동정심에 기대어 다시 한번 요청합니다!"
"그러니까 안 돼요. 일단 절 보세요."
초면부터 미렌에게 운명의 상대로 찍혀버린 소녀는 정말 기운 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히로인이죠?"
"보면 알지 않습니까!"
히로인, 비틀어진 사회를 위해 싸우는 현대의 영웅.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들로 인해 세상은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 탄생하고, 이세계의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무너지고 인류의 위기가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모두 좌절했으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녀들의 힘으로 아직까지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바로 그 히로인이, 등장 만으로 뭇사람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영웅적인 존재가 눈앞에 등장하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말한다.
허나 소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히로인이 탑라이너 찾는 이유가 뭔지 알죠?"
"아니까 찾아왔습니까!"
'탑라이너', 얼핏 보기에 평범함을 넘어 무능력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허나 그들의 내면에는 히로인들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보다 더한 힘이 숨겨져 있다.
바로 그 힘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히로인과의 결속이며,
결속 이후 히로인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힘을 건네줌과 동시에 스스로의 힘을 자각한다.
이 결속은 탑라이너와 히로인 각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서로 간의 결속력과 상성이 가장 크게 좌우된다.
그렇기에 밀라는 자신과의 가장 큰 결속력을 가질 수 있으며 상성도 극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이를 찾아
머나먼 한국까지 언어까지 완벽하게 익히고 찾아왔다.
"근데 그 탑라이너 성별이 뭐야만 하는지는 알아요?"
이런 관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규칙 중 하나는, 히로인은 항상 여성에게서 발현되고 탑라이너는 남성에게서만 발현된다.
히로인들끼리의 결속은 힘이 증폭되기는 커녕 힘이 떨어지는 쪽에 균형이 맞춰지고,
탑라이너끼리의 결속은 잠들어 있는 힘을 품고만 있는 잉여 둘 밖에 남지 않는다.
고로 같은 성별끼린 결속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허나 미렌은 눈앞에 보이는 장발 소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운명의 실이라 칭해지는 무언가는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운명의 상대의 취향 정도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운명의 실을 따르는 자의 자세!"
"...취향이 아니에요. 겉모습만 이런 게 아니에요. 싹 다 이래요."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취향이나 취미가 별나다고 해도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면의 상대에게 굉장한 오해를 사는 순간, 소녀는 한숨 푹 내쉬고 미렌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이끈다.
"만져봐요."
"죄송한데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건틀렛 벗고 다시 한 번 만져봐요."
새하얀 맨손이 교복 상의로 감싼 가슴 언저리를 훑고 지나가자, 미렌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잖습니까. 이런 억지스러운 거부를 할 만큼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으그으윽...!"
평평한 흉부를 지적당하자, 소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뒤 이를 갈아댔다.
자신의 의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과, 남자라고 여길 정도의 흉부를 가지게 된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섞인 저주를 속으로 퍼부어준 소녀는 다시 손을 뻗어 밀라의 손목을 잡는다.
"솔직히 이건 제 실수에요. 내 탓 아니지만, 아무튼 실수."
"대체 무엇 때문에...윽?"
"위쪽으로 확인이 안 되면 아랫쪽이 있죠. 그렇겠죠?"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요! 결속을 거절하시겠다는 뜻으로 너무 적나라하게 이런 스킨쉽은...!"
"있어봐요! 가슴이 없다고 댁이 말했으니 다른 쪽으로 확인할 수 밖에 없잖아!"
스커트 속에 있을 지상 최강의 육상동물 비슷한 무언가와 접촉할 상황이 되자, 밀라는 사색으로 변한다.
히로인으로서의 힘을 써 뿌리치려 하지만, 이상하게 소녀의 손길에 붙잡히자 그 능력마저 쓸 수 없었다.
순수한 완력의 밀고 당기기가 소녀들의 손아귀에서 벌어지나, 밀라의 손목이 조금씩 스커트 쪽으로 당겨진다.
점차 다가오는 충격 앞에 밀라의 표정은 점차 사색이 되어갔고, 막 닿기 직전에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 된다.
그리고 손 끝이 무언가에 닿는 순간, 밀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천천히 뜨기 시작한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굴곡에는 생각했던 육지 동물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
"...됐죠?"
"어, 하지만,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운명의 실은...."
"실은 다른 데서 알아보시고, 그만 손 좀 빼주실래요? 저 힘 안 주고 있거든요?"
"으아!"
밀라는 화들짝 놀라며 스커트에서 손을 뺐고, 엄청난 짓을 저지른 장본인인 소녀는 차분하게 스커트를 정돈한다.
다만 그녀도 이런 짓이 심적으로 한계인지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음, 그러니까...."
"이제 내 말 믿죠?"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밀라는 천천히 몸을 돌려,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멀어져 간다.
밀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이내 주저앉아 팔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탄을 내지른다.
"아아아... 이게 뭔 일이야.... 대체 내가 뭐 때문에 이런 짓 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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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갑 입은 여주 -> 잘싸우겠지 -> 중갑 입고 잘싸우는 여주 -> 그럼 남주는 잉여겠네? -> 그래도 주인공인데 뭐라도 줘야지 -> 오 각성!
->근데 각성하는 남주는 너무 흔하잖아? -> 좋아 그럼 그걸 넣어서 -> 오, 이래서 적당하게 TS! -> 그리고 충격과 공포의 도입부!
->....근데 내가 지금 뭘 쓴거지
당연히 제 머리에서 정상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 없죠. 와하하하하.
당연한 거지만, 주인공은 원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정상 저렇게 되었죠.
아, 뭐 순간적인 TS 그런 거 아닙니다. 좀 골때리는 걸 생각해놨는데... 쓰기 귀찮네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평범하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거지 그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