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근데 이 때 있다는 건, 내 인식 넘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근데 내 안에 있는 건?
타자인가? 아니면 내가 구분해놓은 인식인가?
나는 내 넘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너를 만난다. 라고 할 때
사실 '나'라고 하는 것도 색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역시 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의식이라는 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물체라고 하기에는 그렇다.
'자아란 따지고 보면 없다' 뭐 이런 말이 있다고 해보자.
근데 이건 어쨌든 간에 자아에 집착하여 고통받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그 나르시즘을 제거하는 방도로서, 논리적으로 해부를 한 것이지
실제로 인간은 자아에 집착한다. 자의식에 빠지게 되고, 자기애에 사로잡힌다.
자기가 있다라는 집착은, 바로 이런 봄과 보임에 대한 의식의 얽힘에서부터 외부의 관심욕에서부터 시작되며, 외부의 물음에 대한 대꾸에서 강화된다.
게다가 그는 계속 묻지도 않은 물음에 답을 하려고 한다. 외부의 반응에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 말하려 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나'를 강렬하고 리얼하게 인식하고 싶으면, 자기애를 언급하는 게 낫겠다.
즉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걸 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나를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능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너무 패턴화되어있다. 이렇게 하면 인간미가 느껴지나?
이 때 말하는 인간미란 가만히 있다가 한 두번 나오는 정도의 것을 말한다. 지나친 관심병이 아니다.
사족이라서 쓰기가 좀 그런데, 클라라는 지나친 관심병이고 (또는 능숙하지 못한 연기였고) 한혜진이 종종 던지던 돌직구는 능숙한 연기인 셈이다.
그 자기애와 이기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귀엽게 인식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별 쓸데없는 얘기이니 넘어가자.)
다시 내용을 이어가서
색을 주어와 목적어(대상어)로 보자.
그러나 색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차이는 주어에는 자의식이 있다는 것이고 목적어에는 자의식이랄 게 없다.
아니 어쩌면 여기서 구분을 하게 될 것이다. 저것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바로 그래서 목적어에는 주관의 자의식이 반영되지 못하며
저것은 나의 자의식을 넘어선 것이라는 의식을 부여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타자가 발생한다.
즉 인식으로만 보면 결국 당신이 지지고 볶고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순간 당신이 주어에는 자의식을 넣지만 (이 때 주어는 '나는 너를' 이 경우에 '나'를 말한다.)
목적어에는 엄연히 그게 '나'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의식이 들어가서) 자의식을 넣지 않게 되고
그 순간 목적어는 대상으로서, 대상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대상화'를 한다는 건, 자의식을 빼버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신은 대상화를 할 때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근본 성질(또는 느낌은)은 비실재성과 불완전함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주관밖에 없고 객관은 없다고 본다.
첫째 - 뇌로 봐도 불가능하다.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
둘째 - 주관의 외부에 있는 건 또 하나의 주관일 뿐이다. 근데 이를 주관이 '외부'에 있다 하여 주관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건 좀 잘못된 생각이다.
근데 이 생각이 반영되어 외부에 있는 게 주관이 아니라고 하여, 객관이라고 의식해버리면,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언어'에 영향받은 관념이 된다.
달리 말하면 만약 당신이 '외부'에 있는 걸 보면서 객관이라고 의식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의 머리속에서 이런 절차의 관념이 작동해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주관이 아닌 것'이라는 단어에 홀렸다고 보면 된다.
셋째 - 외부를 봤을 때의 흔적은 흔적일 뿐이지, 그게 객관이 되는 건 아니다. 둘째의 경우를 참조하라.
그러면 불만이 생길 것이다
주관 밖에 없는가? 과학은 뭔가? 소통은 되는가?
이 때 말하는 주관과 객관은 주관이 객관이 될 수 없다는 얘기를 한 것이고
과학은 '단위'로 수렴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주관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측정이 되고, 합의가 되는 그 눈금을 정해두는 것이다.
이게 과학이고,
소통은 된다. 이 단위로 소통하면 된다. 그게 지금 인간이 쓰는 언어다. 단위로 정해서 소통하고 있잖은가?
그리고 이 때는 온전히 소통되는 게 아니라 유사성인지로 된다. 머리속에 이 기호를 보면서 대강 어떠어떠할 떄 쓴다, 하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걸로도 충분하다. 더 들어가면 감성의 능숙함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당신이 뭐든지 엄격하게 맞추려고 하는 이상한 정신병만 없다면, 그리고 폭력적이지만 않다면, 평화로울 수 있다. (걱정하지말라.)
이제 몇 가지를 다시 점검해보자.
색을 주어와 목적어(대상어)로 보자.
그러나 색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차이는 주어에는 자의식이 있다는 것이고 목적어에는 자의식이랄 게 없다.
아니 어쩌면 여기서 구분을 하게 될 것이다. 저것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바로 그래서 목적어에는 주관의 자의식이 반영되지 못하며
저것은 나의 자의식을 넘어선 것이라는 의식을 부여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타자가 발생한다.
즉 인식으로만 보면 결국 당신이 지지고 볶고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순간 당신이 주어에는 자의식을 넣지만 (이 때 주어는 '나는 너를' 이 경우에 '나'를 말한다.)
목적어에는 엄연히 그게 '나'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의식이 들어가서) 자의식을 넣지 않게 되고
그 순간 목적어는 대상으로서, 대상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대상화'를 한다는 건, 자의식을 빼버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신은 대상화를 할 때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근본 성질(또는 느낌은)은 비실재성과 불완전함이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듯이 내 외부에 있는 것은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주관이다. 즉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 역시 하나의 자의식(에고)다.
그러면 이 때는 이걸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가?
이 때 타자란 없다라는 얘기가 나오게 된다.
분명 내 인식 넘어에 뭔가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뭔가가 있다는 얘기이고
굳이 타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서 구분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즉 내 자의식이 아닌 것이 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타자는 이렇게 정의된다. 내 자의식이 아닌 것. (내 자의식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래서 이것은 내 자의식이 아닌, 그의 자의식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나와 그가 구별이 되고 분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나고, 너는 너가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의 진의는 내 자의식은 나에게만 들어갔다는 것이고, 너에게는 안들어갔다는 것이며, 너에게는 너의 자의식이 들어갔다는 얘기다.
그렇게 존재의 중심에는 에고라는 핵이 있다. 근데 이 에고가 내것이냐 니것이냐에 따라서 나와 너가 구분되며 (에고의 소유자)
내것이 아닌 순간 구별이되면서 너가 되며, 타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대상의 느낌으로 나오는 것이고
나가 되면서 자아로 가게 되는 순간, 그것은 자의식의 혼란(비실재성과 불완전함)의 느낌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불안하고 힘들며 쓰러질 것 같고 걱정이 되며, 너도 항상 힘들며 쓰러질 것 같고 걱정하며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에 의식은 사라지므로, 대상을 보는 감각인 자신감이 생기게 되며
너 역시 나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므로, 대상을 보는 감각인 자신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는 자의식에서의 해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너와 나가 다시 엮이게 되면, 그 순간 '어떻게 해야되지?'라는 물음에서 자의식이 활개하게 되며
다시 불안하게 되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결국 나의 자의식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너라면,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내 외부에 있는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에고로 다시 본다면 (즉 내 외부에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에고다)
나는 이것을 공통으로 묶어서 '두 개의 에고'로 처리할 수 있다.
그 때 내 안에서는 타자가 있지 않으며, 오로지 두 에고만이 있는 것이며 (두 자의식이 있는 것이고)
나는 하나로서, 둘을 보게 되는 셈이 된다. 그럴 때 타자는 없어진다. 물론 이 때 나는 내 에고를 다루듯이 너의 에고를 다루는 것이다.
이 에고의 사이즈 차이, 색깔의 차이, 기능의 차이 정도는 어느정도 고려하기로 한 것이다. (이게 사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