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장학회 사건 2011년 01월 24일 (월) 15:18:48
[뉴스포스트 = 한상민 기자] 1961년 5.16 쿠데타 발생후 혁명 주도 세력은 빠른 정국 장악을 위해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특히 부산지역의 유력한 시업가 김지태는 박정희 의장 등 실세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 즉각 구속된다. 부일 장학회 사건은 구속 후 처벌을 면하는 조건으로 김지태 소유의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인 부산시내땅 100,147평(331064.463㎡)을 강제추징한 사건이다.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2006년 12월 5일 조사개시, 2007년 5월 29일 결과를 발표했다. 본지는 진실화해위로부터 ‘사건조사보고서’를 입수, 당시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박정희 정권에 비협조해 ‘괘씸죄’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28일 삼화고무, (주)조선견직, (주)한국생사, 부산일보 등 10여 개의 기업을 보유한 부산의 기업가 김지태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표한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기업인 15명과 함께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국가를 위해 재산을 기부한다는 각서를 쓰고 기소유예 처분으로 6월 30일 석방된 후, 12월30일 5억4,570만환을 납부했다. 1962년 3월27일경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는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등의 혐의로 회사 임직원 8명을, 4월 초 김지태의 처를, 4월23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지태를 각각 구속했다. 김지태의 헌납재산은 1962년 7월14일 5.16장학회를 설립할 때 기본재산으로 출연했으며, 그 후 토지 10만여 평은 국가로 이전됐다.
김지태는 1943년 5월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하였고, 8.15 후 조선견직, 한국생사, 심화고무 등을 설립했으며, 1968년 5월 생사수출조합 이사장, 1970년 한국생사협회 회장,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지태는 1949년 9월 16일 부산일보를 인수하여 경영했고, 1959년 9월23일 최초의 라디오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하여 경영하였으며, 1961년 2월21일 한국문화방송을 발족시켜 12월2일 서울지역 최초의 라디오 상업방송인 한국문화방송을 개국하여 경영했다.
무력으로 재산강탈
정수장학회 환원필요
김지태는 사업에 자리를 잡은 후,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정치인으로서 첫 시작은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제3대 민의원 선거는 자유당으로 출마 당선됐다. 하지만 1956년 12월 사사오입개헌에 반대입장을 표명하여 제명조치를 당했다. 1957년 5월 복당 후,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58년 11월 부일장학회를 설립, 장학금을 지급했고, 1960년 12월 모교인 부산상고에 부상장학회를 설립, 재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장학사업을 했다. 5.16 후에는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소유기업체 탈세 등을 통해 부정축제를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1962년 1월27일 김지태(당시 54세)가 일본으로 출국해 병원에 입원중일 때 3월27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부산지부는 부정축재처리법, 외환관리법, 국내재산도피방지법 위반 등의 9개 혐의를 적용, 부산일보 전무 겸 부일장학회 상임이사 윤우동, 조선견직 전무 배정기, 한국생사 총무 이상학 및 상무 김정호, 무역과장 조용태, 부일장학회 사무원 배병태, 토지중개인 방순목 등을 구속했다.
회사 임직원 10여 명이 중정에 연행,, 유치된 첫날 중정 부산지부장 박OO가 군 야전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들어와 “우리 군이 목숨걸고 혁명을 했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재산은 우리의 것이다.” 라고 겁을 줬다. 이에 당시 법률상으로 법인격이 없는 재단법인 부일장학회 이사회는 1962년 4월11일 기본재산인 토지 100,147평(331064.463제곱미터)을 정부에 기부하는 의결을 채택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최고회의 의장실에서 김지태의 조선견직회사를 일본기업인 몇 명에게 시찰해 주도록 하라는 연락을 받고 김지태에게 전화로 부탁했는데 거절을 해 잘못보인 것이다”, “위에서 지부장에게 전화가 와서 지부장이 나에게 ‘손을 좀 봐야 되겠다’고 해서 중정이 내사를 한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 박OO는 <진주지>에 자필서명하여 발표한 <5.16과 1군>이라는 기고문에서 “박장군의 군수기지사령관 당시 김지태의 인상은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자로서의 인식,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으며, 1962년 정초 독대시 김지태를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정부장(김종필)의 승인을 받아 내사 후 정식 수사에 착수했다고 기고했다.
그런데 국정원 발전위 면담에서 당시 박정희 의장을 독대한 것은 사실이나 김지태에 대해 직접 수사 지시를 한 것은 아니고 “잘 알아보라고 하였다”고 일부 번복했고, 진실위 조사에서는 당시 박정희 의장을 독대한 것은 맞지만 잘 알아보라고 한 일도 없고, 박정희 의장이 지시했다는 내용은 기자가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군사정권에 재산 강제헌납
1962년 5월24일 7년형을 구형받은 김지태는 다음날 부산구치소에 방문한 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 신직수가 요구하는 토지 및 부산일보 등 언론 3사 주식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포기각서’에 날인했고, 6월 20일 부산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전 법무부장관 고원중이 제시하는 위 토지 10만여 평의 등기이전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증서’ 및 언론 3사 주식 명의이전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었다.
김지태가 언론 3사 주식 및 토지를 국가에 기부하는 내용으로 이미 작성되어 제시된 서류에 도장을 찍은 이틀 후 6월22일 군검찰은 김지태가 죄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을 표명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김지태 등 구속자 전원에 대해 공소취소했고, 석방했다.
1962년 9월 4일 서울시 아서원에서 군부 관계자들과 만나 토지이용과 장학회 운용문제에 대해 나눈 대화와 관련해 “서류상 자진납부로 되어 있는지 모르나 실제로는 헌납물품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각서를 써줬다” 했고,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에 의해 자신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어 군재의 공판이 진행중 일 때 6월 20일 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원증이 지참해 온 양도서류에 날인을 강요당하고 쇠고랑 찬 손으로 본의 아니게 날인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무소불위 권력아래서 김지태는 약자일 뿐이었다. 자신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회사와 임직원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두려웠다. 신문사와 방송국은 누가 경영하든 이 나라 매스컴 발전에 이바지 하면 된다면 생각이었다. 자신이 구속된 상태에서 일이 진행되는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석방 후에 하자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이 후 작성해온 각종 양도서에 날인이 이루어졌다.
후에 김지태는 부산일보 등 언론 3사와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를 자진해서 헌납할 의사가 없었다며 반납을 요구했다. 1962년 7월 경 “군정에서는 나의 재산을 강취한 것을 시인하고 반환계획을 연구하고 있다”, “경제기획원장관 김유택으로부터 ‘재산헌납은 선의의 기증행위가 아니라 강제로 약탈행위로 반환방법을 고려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강제로 헌납된 재산이 자신에게 반환되지 않는 한 군인은 역사적으로 영구히 규탄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 직후 군사정부가 헌납사건이 쟁점화될 것을 우려해 제의한 5. 16장학회 이사직을 거절하고,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을 5?16장학회에서 분리 운영하되 자신이 주식의 51%를 보유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서울신문사를 자신에게 넘기도록 요구했다.
1971년 7월 당시 공화당 김택수 의원으로부터 5?16장학회가 경영난으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매각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5.16장학회 이사장 김현철에게 2회에 걸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인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며, 박정희 정권이 종료된 직후에는 “1962년 5월 강탈해 간 재산을 조속히 반환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반환청구서’를 5.16장학회에 보내 문서로 반환을 요구했다.
중앙정보부의 수사권 남용
중정 부산지부는 최고회의 승인을 받고 김지태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1962년 3월 27일 회사임원 8명이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재판중이던 5월 24일 김지태가 7년을 구형받은 다음날 구치소로 찾아온 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이 제시하는 재산포기각서에 날인했다. 6월 20일 전 법무부장관이 계엄사령부 법무관실로 불러 제시하는 재산양도서류에 날인하고, 이틀 후에 석방된 사건이다.
당시 중정 수사권의 범위는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범죄수사에 한정되어 있었다. 김지태의 혐의는 국가안전보장과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정이 수사권이 없는 범죄까지 수사를 행한 직권남용이다. 또한 국가에 헌납한 토지 및 언론 3사 주식은 국가의 공식적 절차를 밟지 않고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재단법인 5· 16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출연되었다. 그 후 헌납재산의 소유명의는 국유재산법 등이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5· 16장학회에 이전 되었기 때문에 원상복구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결론내렸다.
5· 16장학회에서 정수장학회로 명칭이 변경된 이래 그 재산을 운용함에 있어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은 재단법인의 공익성에 반하며, 부산일보 및 한국문화방송주식을 장학사업의 경비조달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익목적 사용으로 보긴 어렵고, 언론의 공공성 및 중립성에 반하는 일이다.
진실화해위는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헌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기본법에 의거 조사를 하여 진실규명하고 그 결과에 따라 피해회복 등을 권고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국가는 부일장학회의 재산권 및 김지태의 재산권 등 침해에 대하여 사과하고, 명예회복 및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야하며 헌납재산의 경우 책임의 귀속에 따라 원상회복이 되야한다고 했다.
헌납주식은 정수장학회로부터 국가에게 원상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보유 언론사 주식을 재단의 경비조달 수단으로 활용해 온 상황을 시정하는 등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