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rget="_blank" h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538724" target="_blank">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538724</a>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div><b><font color="#002060"><font size="4">◈ 사대문 도심에 근접한 한성부 곳곳에 대형 공동묘지가 생겨나다</font><font size="4">.</font></font></b></div> <div><br /></div> <div><u><b>조선은 도읍인 한성부(‘도성 사대문 안’과 ‘도성 밖 十里’)에서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b></u> 도성 안의 <u><b>시체는</b></u> 그래서 도성의 문 중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을 통해 <b><u>도성을 나가 십리를 더 지나 한성부 밖에 매장됐다.</u></b> 최근 은평 뉴타운 건설 현장에서 내시들의 묘가 대규모로 발굴됐던 것 역시 한성부를 벗어난 곳에 묘를 썼기 때문이다. </div> <div><br /></div> <div><b><u>그러나 조선 말기로 들어오면서,</u></b> 도성 사대문 안에 묘를 쓰지 않는 원칙은 지켜진 반면, <b><u>도성 밖의 한성부 지역 즉 도성 밖 십리(성저십리) 지역에는 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u></b> 한성부의 성저십리 지역 가운데, 시체가 나가던 남소문 밖 <b><u>신당동과</u></b> 서소문 밖<u><b> 아현동 그리고 남산 너머의 금호동</b></u>(현재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수천리’ 지역)<b><u>과 용산 등에 비공식적인 공동묘지가 서서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u></b></div> <div><br /></div> <div>여기서 남소문 밖의 신당동과 서소문 밖 아현동은 그 동네 명칭에도 맥락이 배어있다. </div> <div><br /></div> <div>도성 내 시신을 운구하는 문으로 많이 사용됐던 남소문 즉 광희문 밖에는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무당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u><b>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모여 살았고 그래서 신당이 모여 있는 동네 즉 神堂洞(신당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b></u> 그 후 이 이름은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新堂洞(신당동)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div> <div><br /></div> <div>‘아현’은 아이고개인 兒峴에서 유래했고, 우리말로 애오개로 불린다. 이 명칭 역시 ‘서소문’과 연결된다. <b><u>도성의 시체 중 아이의 시신은 ‘서소문’을 통해 나갔는데, 이때 서소문으로 나간 아이 시신이 묻힌 고개를 아이고개라는 뜻의 ‘아현’으로 불렀다는 설명이 ‘아현’ 지명 유래 중 유력한 설의 하나다</u></b>. 실제로 아현동 산 7번지 일대에 아이들의 무덤인 아총(兒塚)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런 아총과 아현의 명칭은 바로 아이 시신이 나가던 서소문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div> <div><br /></div> <div>조선 말기의 신당과 아현, 금호와 용산에 더해, <b><u>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는 일본인들의 주거지였던 남산 주변 즉 이태원과 장충동에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u></b></div> <div><br /></div> <div><b><u>그러던 1912년, 일제는 도성 사대문 밖의 한성부 지역 즉 성저십리에 공식적으로 공동묘지를 만들 수 있도록 묘지 취체 규칙을 발표한다. </u></b>1910년대까지 사대문 안과 용산만 일제강점기 ‘경성’이었고, 성저십리 지역은 경성의 경계 밖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b><u>그러면서 더욱 커진 신당동, 아현동, 장충동, 금호동, 이태원의 공식 공동묘지는 그 규모에 있어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을 묘지 터로서의 장소성을 갖게 된다.</u></b></div> <div><br /></div> <div>바로 이렇게, 사대문에 인접한 서울 도심부에 대형 공동묘지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div></div> <div><br /></div> <div><br /></div> <div><div><font size="4" color="#002060"><b>◈ 1930년대 일제의 경성부 도시계획, 초등학교가 공동묘지 터 위에 자리 잡다</b></font></div> <div><br /></div> <div>1920년대부터 서울 즉 일제강점기 경성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농민들이 경성으로 들어오면서 도시 외곽이 확장되고 도시 빈민들이 나타났다. 과밀화되는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의 확장과 새 도시계획이 불가피해졌고, 이는 1930년대 ‘대경성 계획’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u><b>1936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의 경계를 기존의 4배로 넓히는 확장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b></u></div> <div><br /></div> <div>바로 이때, 기존 경성 경계 밖이었던 ‘성저십리’ 지역들이 경성으로 편입됐다. <b><u>그러면서 새로 경성이 된 신당동, 아현동, 장충동, 이태원 등의 공동묘지는 미아리 등 경성 외곽으로 이전됐다.</u></b> <b><u>그리고 그 공동묘지 터 위에 근대적 공공 행정 시설이 세워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보통교육시설인 “국민학교”다. </u></b></div> <div><br /></div> <div>특히<b><u> 신당동과 아현동, 금호동 등은 도심 가까이 자리한 구릉지로 도시 빈민들이 대거 모여든 밀집 주거지였다.</u> </b>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 국민 보통교육 정책을 실시하던<b><u> 일제는 이들 주거지에 보통교육시설인 국민학교를 놓아야했고, 그 자리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들 주거지 옆의 공동묘지 터였던 것이다. </u></b></div> <div><br /></div> <div><b><u>일본인 주거지 근처의 공동묘지 터였던 이태원과 장충동 일대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지 즉 문화주택지구로 개발됐다. 이태원과 장충동 일대가 재벌가 및 재력가들의 거주지로 이어져 오고 있는 배경이다. </u></b></div> <div><br /></div> <div>결국 근대기 서울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b><u>서민 밀집 주거지 인근의 공동묘지 터 위에 많은 국민학교들이 세워졌고, 이 기억이 지금도 “초등학교, 공동묘지의 전설”로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u></b>이 안창모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 계획은 단지 1930년대 경성에 새로 편입된 서울 성저십리 지역에서뿐만이 아니라, 이후 급속한 인구 집중으로 서울이 더 팽창될 때에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고(미아리로 이전된 공동묘지가 다시 망우리로 옮겨지고 미아리 공동묘지는 다시 주거지와 국민학교 부지 등으로 개발되는 방식), 이는 인천, 부산 등의 다른 대도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div> <div><br /></div> <div>"초등학교, 공동묘지의 전설"이 전국적으로 번져가게 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div></div> <div><br /></div> <div><br /></div> <div><div><b><font color="#002060" size="4">◈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font></b></div> <div><br /></div> <div>우리 학창시절을 더듬어보자. <b><u>초등학교 때 맹위를 떨치던 공동묘지의 전설이 묘하게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사라져버린다.</u></b> <b><u>그것은 왜일까? </u></b></div> <div><br /></div> <div>안창모 교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b><u>일제강점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u></b>, 즉 ‘고등보통학교’<b><u>는 의무교육학교가 아닌 ‘있는 사람들의 고급학교’였다.</u></b> 그래서 이 학교들은 사대문 안에만 들어섰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이르기까지 <b><u>묘를 쓰지 않았던 사대문 안에 중고등학교가 들어섰기 때문에, 이들 학교에는 공동묘지의 전설이 애초 생겨날 수 없었다. </u></b>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 공동묘지의 전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div> <div><br /></div> <div><u><b>그렇다면, 대학의 입지는 어떨까?</b></u></div> <div><br /></div> <div><b><u>서울의 대학들은 대부분 도심부 주변 녹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해방 후 재원이 부족한 정부가 일본이 만든 공원 부지를 대학들에게 불하했기 때문이라는 것</u></b>이 안창모 교수의 설명이다. </div> <div><br /></div> <div>우리나라 대학들이 집중적으로 설립된 50년대 후반, 많은 대학들이 서울 종로에서 태동했다. <b><u>돈을 번 후 번듯한 건물을 세우고자 했던 이들 대학은, 도심 바깥으로 나가기는 원치 않았고 그렇다고 도심 중심부로 들어올 돈은 없었다. </u></b>이런 대학의 여건과 돈이 필요한 정부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것이 바로 서울의 ‘녹지 공원’ 불하였다. 이 과정에서 <b><u>한양대는 사근공원, 동국대는 장충단공원, 경기대는 금화공원, 홍익대는 와우공원, 이런 식으로 대학이 입지하게 된 것이다. 과밀 도시 서울에서 대학 캠퍼스가 유독 한적한 녹지를 품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u></b></div> <div><br /></div> <div>괴담의 계절, “초등학교 공동묘지의 전설”은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다. 근대기 서울 확장 과정에서 시행된 일제강점기 도시 계획을 근거로 하고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라는 것이 안창모 교수가 밝힌 내용이다. </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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