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 집 좋은데? 너 하나 사는 집치곤 과분한 거 아냐? "<br><br>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구 녀석의 시샘섞인 감탄사가 발이라도 달린 듯 텅빈 집안을 돌아다녔다.<br>새 집에 이사온지 1주, 새로운 직장 생활에 맞춰 옮긴 이 집은 혼자 살기에 넉넉한 점이 좋았다.<br>작게나마 2층 작은 방도 달린 새 보금자리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집이었다.<br>친구 말마따나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 과분할지도 모른다.<br><br> " 진짜 좋네.. 이만한 집을 네 벌이에 어떻게 마련했어? "<br><br> " 내가 뭐랬어. 좋다고 그랬지? 아~ 이제 마누라만 딱 있으면 되는데. "<br><br> " 생쇼를 하세요. 여친도 없는 놈이 무슨 마누라야? 김칫국을 트럭으로 드시네. "<br><br>이만한 집이라, 확실히 내 벌이로는 전세는 커녕 월세로 들어와 살기도 주저했을만하다.<br>거실에, 부엌 따로, 큰방에 2층 작은방까지. 이 모든게 공짜가 아니었다면 내 수준에 미치지 않고서야<br> 제 발로 들어왔을리가 없다. 다행히 이 집은 큰아버지 소유였기에 들어와 살 수 있는거지.<br>큰아버지 말로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셨고, 그로부터 원금에 이자를 더한 셈치고<br> 받은 주택이라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물려받긴 했으나 새로 리모델링을 할까, 은퇴 후 들어가 살까<br> 하며 고민하다 끝내 놔두던 걸 우연히 내가 이쪽 도시에 직장을 잡게 되어 공짜로 살게 내어주는 것이라며<br> 몇 번이고 거듭 강조하신 적이 있다.<br><br> " 야, 여친 없으면 결혼하고 싶단 말도 못 하냐? 언젠간 결혼하겠지! "<br><br> " 그으래..? 니 말, 아주 헛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에-? "<br><br>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짙은 송충이 눈썹을 씰룩거리는 친구의 표정.<br>인근 도시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는 녀석이 더운 날씨에 일하다 그만 돌아버렸나 싶었다.<br><br> " 뭔 개소리야. 여자라도 소개 시켜주냐? 그럼 땡큐지만. "<br><br> " 이 새-끼! 시치미 떼는 거 봐? 꼬리가 길면 밟히는 거 몰라? "<br><br>친구는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뭔가를 집어올렸다.<br>보일락 말락, 가까이 다가서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br>머리카락이다. 아주 긴 머리카락.<br><br> " 머리카락 아냐. "<br><br> " 으하하, 으와- 소름돋네. 연기 하냐? 애인 없는 척하더니 너 집에 여자 들였지?<br>이거 알고보니 선수 아냐? "<br><br> " 아냐 임마. 나 이 집에 온지 일주일 밖에 안 됬는데 무슨 여자가 왔다 가. 네가 처음 온 손님인데. "<br><br> " 이건 뭔데 그럼. 김경호 머리카락이냐? "<br><br> " 존나 재미없네. 나가자. 집에 있어봤자 뭐해. "<br><br>친구의 수준 낮은 비아냥거림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br>사실 이 긴 머리카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br><br>큰아버지로부터 집열쇠를 받아와서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은 첫 날,<br>거실에 온통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걸 봤다. <br><br> " 어으, 이게 다 뭐야. 세를 안 놨다더니 왜 거짓말을 하셨지? 이게 무슨 빈집이야. 누가 살아도 살았구만. "<br><br>이상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짐을 풀고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해야했으므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담아 버렸는데,<br>문제는 그 날 저녁부터 이상하게 한 두가닥씩 끈질기게 발견되는 머리카락이었다. 세를 놨었는데 조카한테 공짜로<br> 내어주려니 생색이라도 내고 싶으셨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긴 머리카락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올까.<br><br> " 아나, 또 나왔네. 오진다 오져.. "<br><br>처음엔 대충 넘겼던 머리카락이 심심하면 한 두가닥씩 손에 걸리고 발에 채이니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br>결국 삼일째 되던 날 나는 부엌부터 시작해서 2층까지 쓸고 닦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머리카락을 치워버렸다.<br><br><br>ㅡ<br><br><br>" 잘 놀고 간다. 다음 번엔 니가 넘어와라. 술이 목구멍을 넘어올 정도로 부어줄게. "<br><br> " 벌써부터 취하는 느낌이네. 그래. 잘 가라. "<br><br> " 그리고 임마, 제수씨 생겼으면 좀 소개 해줘, 감춰두면 더 오래 가냐? 서운하게시리. "<br><br> " 그런 거 아냐. 예전에 살던 사람 머리카락일거야. "<br><br> " 으으음.. 그래? 정 외로우면 말해. 내가 한 번 소개해줄게. 나 간다. "<br><br> " 그래, 또 연락할게. "<br><br>으으음- 하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친구의 얼굴에서 분명한 의아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br>집에 있는 동안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발견한 탓에 '자연스레 떨어진 머리카락치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했겠지.<br><br>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왼발에 밟히는 머리카락 하나.<br><br> " 아, 진짜..! "<br><br>화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머리카락을 어떻게 했길래 사방이 털 천지야?<br>탈모라도 걸렸나? 머리라도 깎았나? 그래도 그렇지, 좀 치우고 나갔어야 될 거 아냐.<br>도무지 답을 내릴 수 없어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br><br><br>ㅡ<br><br><br>- 여보세요?<br><br> " 삼촌, 전데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저 사는 집 진짜 그동안 세 안 준 거 맞아요? <br><br>- 뭔 소리야. 안 그러면 어떻게 집이 비어있어. 방 빼주는게 하루 이틀만에 되는 줄 아냐.<br><br> " 근데 집에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많아요, 완전 득실득실대요. "<br><br>- 뭐?<br><br> " 삼촌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집에 여자 살았던거죠? 맨날 머리카락 나온다고요. "<br><br>- 임마, 네 머리카락이겠지. 너도 네 아빠 따라서 머리 까지냐?<br><br> " 장난 아니에요. 진짜 길죽한 머리카락이 나온다니까요? 한두가닥이 아니에요. "<br><br>- 엥? 진짜로? 여자 머리카락이 나온다고?<br><br> " 네! 네! 제 머리카락말고요. 제 친구도 봤어요, 여자 머리카락이 분명해요. "<br><br>- 어, 이상하네. 일단 되는대로 치우고 살아봐. 나도 거기 살아봤어야 말이지.<br>네 할아버지도 가시기 몇 년 전부턴 요양 병원 계셨고, 그간에도 세 준단 이야기는 없었어.<br>내가 받아서 너 줄 때까지도 비어있었고. 좀 불편하겠지만 머리카락은 그냥 좀 치우고 살아라.<br>치우다보면 안 나오겠지, 안 그러냐? 공짜가 어디냐?<br><br> " 아.. 어쩔 수 없겠네요. 그냥 말씀대로 다 치워야겠어요. 근데 저번에 한 번 다 치웠거든요?<br>근데 계속 나와요. 스트레스 받을 정도에요. "<br><br>- 자식아, 니가 야무지게 청소를 하고 살면 안 나오지. 끊어- 삼촌 잘란다.<br><br> " 네, 삼촌. 안녕히 주무세요. 늦은 시간인데 괜히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br><br>- 아냐 아냐, 연락 좀 자주하고 살자. <br><br>결국 집주인인 큰아버지와 통화까지 했지만 알아낸 건 없었다.<br>모든 건 그대로였다. 그 날 잠에 들 때까지 나는 적어도 열댓가닥의 머리카락을 주워다 버렸다.<br><br>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평소보다 30분 늦게 일어난 탓에 머리카락 따위에 신경 쓸 겨를 없이<br> 바삐 움직여야했다. 다행히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신참내기답게 바쁜 회사생활 하루를 보내고,<br>저녁엔 직장 선배와 술자리를 가졌다. 일 얘기보다 사는 얘기를 꺼내게 될 즈음,<br>선배에게 머리카락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는 술에 완전히 꺾여버린 채 꼬부랑거리는 혀를 겨우 굴려댔다.<br><br> " 야야야아.. 머리카락이란 게.. 푸아.. 밑에서 솟는 게 아니야아.. 위에서, 어? 위에서, 툭-! <br>요렇게 떨어진다고.. 그럼.. 으후.. 뭐어겠냐아.. 위..에서 떨어진 거 아냐.. 위.. 위를 찾아보란말야.. "<br><br>더 이상 먹였다간 다음 볼 땐 저승에서 만날 수도 있겠단 생각에 선배를 부축해 집으로 모시고<br> 늦게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켜니 그제서야 선배의 말이 오싹하게 들렸다.<br>위를 찾아보라니? 천장에 머리카락 주인이 들러붙어있기라도 하단 말야?<br>오히려 그게 더 무섭잖아, 상상만 해도 기괴한 모습이었다.<br>대충 옷을 정리하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br><br> " 푸흡 "<br><br>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차가운 세숫물로 때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낸 표정을 확인하려던 찰나<br> 정면의 거울에 비치는 내 뒷편, 즉 말하자면 열린 욕실 문 너머 거실에 뭔가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br><br> " 씨발. "<br><br>세숫물도 차가웠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로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br><br> ' 위를 찾아보란말야.. '<br><br>갑작스레 선배의 말이 머릿속을 때리자 넘치고 있는 세면대 물을 잠글 생각도 하지 못 했다.<br><br> " 누구야, 씨발! 당장 나와! "<br><br>속으론 잔뜩 겁에 질려있었지만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죽인 채<br> 잔뜩 허세를 부리며 거실로 나왔지만 집 어디에도 사람 따위는 없었다.<br>이상했다. 분명 거울 뒷편으로 스쳐지나가는 형상을 본 것 같았는데.<br>그리곤 발견했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 벗어놓은 속옷 위에 떨어져있는 머리카락 3가닥.<br>확실히 기억하기론 속옷을 벗어놓았을 때 머리카락 따위는 없었다.<br>미칠 노릇이었다.<br><br> " 씨발, 누구냐고! "<br><br> ' 위를 찾아보란말야.. '<br><br>선배의 말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br>게슴츠레 실눈을 뜬 채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 보..면.. <br>휴우.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려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br>속옷에 그대로 놓여진 머리카락 3가닥을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br><br> ' 위.. 위를 찾아보라고..? 천장에는 아무 것도 없어. 확실해. 1층 천장보다 더 위인 2층으로 간다면..? '<br><br>더 고민할 것도 없이 2층으로 가는 짧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br>작은방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순간 거미줄 같은 실이 얼굴에 간지럽게 달라붙는 느낌을 받았다.<br><br> " 으악, 뭐야. "<br><br>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에서 떨어지는 그걸 받아들었더니, 그 정체는 머리카락이었다.<br>그 자리 그대로 위를 쳐다보았지만 귀신은 다행히 없었다. <br>다만, 이유를 모르게 튀어나와있는 손잡이를 발견했다.<br>1층 천장으로부터 연결되어 2층으로 빗면을 그리며 올라가는 비스듬한 계단 천장에는 여지껏<br> 삼촌도 나도 모르고 있었던 제3의 공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br><br> " 후우, 하나.. 둘.. 세엣 "<br><br>숫자 셋을 세며 손잡이를 벌컥 열었다.<br>그제서야 묵은 때가 껴서 흐릿했던 테두리게 드러다며 처음 보는 다락방이 열렸다.<br>큰방과 작은방 외에도 다락에 작은 창고가 하나 더 있었다니..<br><br> " 콜록, 콜록! 아오.. 먼지! "<br><br>내부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기에 휴대전화 조명을 켜서 안으로 들이밀었다.<br><br> " 이게 뭐야.. "<br><br>다락방 안은 온통 가발 천지였다.<br>하나도 빠짐없이 검고 긴 생머리를 한 주인 잃은 가발들이 셀 수 없이 들어가있었다.<br>아무에게도 세를 놓지 않았다던 집 다락방에 가발이 가득 들어차있다니..<br>할아버지한테 돈을 꿨다는 사람이 가발 공장이라도 했던걸까.<br>그래, 뭐 머리카락은 가발에서 흘렀다고 치자.<br>그럼 다락방에 가득 들어찬 가발의 머리카락이 왜 집안에서 계속 발견되는걸까.<br>치워도 치워도 왜 한 두가닥씩 계속 보이는걸까.<br>가발이 일어나서 그 해답을 속시원히 말해줄리도 없으니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가<br>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덜 깬 술에 출근해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더해져 더는 버틸 수 없었다.<br><br><br>ㅡ<br><br><br> 한숨 돌리기 힘든 신입치곤 의외로 빠른 퇴근을 한 날이었다.<br>웬만하면 술자리에 함께 하는 술자리도 마다한 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br>집 노트북에 설치해놓은 캠 카메라와 화장실 거울 위 선반에 녹화를 시켜둔 캠코더.<br>두 전자기기 속에 그간 나를 괴롭혀온 '머리카락'의 실체가 담겨있을테니까.<br>집에 들어서자마자 어김없이 발견한 머리카락 일곱 가닥이 그 판단을 더욱 확고히 믿게해줬다.<br>우선 노트북에 녹화된 영상을 재생시켰다.<br>평범한 집<br> 여전히 평범한 집,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br>그 다음 화면을 보는 순간 까무러칠 뻔 했다.<br>생머리 가발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듯 둥둥 뜬 채로 들썩이며 내려오고 있었다.<br>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이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두리번거리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br>그리곤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br>거울 앞을 기웃거리는 가발.<br><br> " 뭐야.. "<br><br>가발은 우뚝 멈추더니, 캠코더를 주시하기라도 한 듯 점점 캠코더로 다가온다.<br>이윽고 캠코더 화면이 검은 색으로 덮혀버린다.<br><br> " 이게 뭐야! "<br><br>믿고 싶지 않았다.<br>이 집은 귀신에 씌이기라도 했단 말인가?<br>순간 거울 앞에서 캠코더를 확인하는 내 뒤로 무언가가 스치듯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br><br> " 으아아! 씨발! "<br><br>그대로 집을 뛰쳐나가 이웃 도시에 있는 친구 집을 향해 차를 내달렸다.<br><br> " 그래서,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br><br> " 그래.. 죽겠다.. 귀신이란 게 있나봐. 차라리 내가 구라치는거면 좋겠다. "<br><br>어떻게 잡은 직장인데, '귀신 봤다'고 털어놓았다간 순식간에 직장 내에서 싸이코로 낙인 찍힐테고.<br>혼자 전전긍긍하기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친구 집까지 찾아와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br>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란 가슴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br><br> " 일단 가발이 가득 들어있다니.. 여자친구는 확실히 없는거네. "<br><br> " 야이 썅, 죽을래? "<br><br> " 그럼 뭐 어쩔거야. 다른 집으로 이사라도 갈거야? "<br><br> " 그게 가장 좋을 거 같긴한데.. 돈이 어딨냐. 이 집 아니면 당장 출근은 어디서 하고.. "<br><br>주머니를 뒤적거려 머리카락 하나를 테이블에 던졌다.<br><br> " 자, 받아라~ 내 여자친구 머리카락이다~ "<br><br>그러자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머리카락을 내동댕이쳤다.<br><br> " 알았어. 안 놀릴테니까 그만해. 근데 너 가발이 한 두개가 아니라고 그랬지? "<br><br> " 그래. 몇 개인지 세어보지도 못 했어. 다락방 한가득이라니까. 졸라 끔찍하지? "<br><br> " 그 가발이 전부 한 사람을 위한 걸까? "<br><br> " 그러면? "<br><br> " 가발이란 건.. 보통 한 가발이 하나의 주인을 가지지 않나? "<br><br> " 야! 그럼 우리 집에 있는 가발들이 하나 하나씩 다 주인이 있다고? 미친 거 아냐? "<br><br> " 진지하게 말하는거야. 그럼 한 년이 똑같은 생머리 가발을 수십개씩 가지고 있는 건 정상이냐?<br>니가 판단해봐. 어느 쪽인지. 가발 주인이 여러 명이겠냐, 한 주인이 여러 가발을 가지고 있었겠냐? "<br><br>듣고보니 친구 말이 옳은 것 같았다.<br>그렇게 생각하기 싫긴 했지만.. 가발 하나 하나에 주인이 하나씩 있는 게 맞다고 여겨졌다.<br>그럼 다락방을 가득 채운 가발 모두 저마다 주인이 있었단 얘기인가..<br><br> " 그럼, 그렇다치고 그 다음은 어떡해? "<br><br> " 그건 나도 모르지. 당사자인 네가 한 번 파헤쳐봐. 어차피 네 다락방이야.<br>귀신이고 잡귀고 간에 그 집 주인은 너잖아. 억울하면 귀신한테 집문서 갖고오라 그래. "<br><br> " 아.. 돌겠네.. 그 좁은 다락에 기어들어가서 가발을 막 뒤지라고? "<br><br> " 그래야지. 적어도 가발을 집 밖으로 치우기라도 해야 머리카락이 안 나올 거 아냐. "<br><br> " ... 하긴, 그 집에서 살긴 살아야 할거고.. 그러려면 결국 가발을 밖으로 버리는 수 밖에 없겠다. "<br><br><br>ㅡ<br><br><br> 결심이 이어진 끝에 휴일이 찾아왔다.<br>잦은 외박에 지친 몸을 뉘일 생각도 못 한 채 잔뜩 벼르며 오랜만에 집에 도착했다.<br>거실엔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br><br> ' 젠장, 진짜 최악이야. '<br><br>켜둔 노트북에 녹화되어있는 그간의 영상부터 먼저 확인했다.<br>다시 봐도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지만 생머리 가발은 매일 집안을 거닐고 있었다.<br><br> " ... "<br><br>아찔했다.<br>곧 친구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장면이 이어졌다.<br>생머리의 가발이 하나, 둘씩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br>다락의 계단을 타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br>왜 그간 머리카락이 하루만 방심해도 곳곳에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br>친구의 말대로 가발 하나 하나가 각자 움직이는 듯 했다.<br>딱히 집기를 부수거나 말썽을 부리진 않았지만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혹은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듯이, <br>눈에 보이진 않아도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러하듯 서로 어울리고 있었다.<br>그동안 모든 것을 기록하느라 터질 듯이 달아오른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br>친구의 말대로 다락을 열어 모든 가발을 꺼내기로 결심했다.<br><br> ' 그냥 가발이야. 꺼낸 다음 버리면 끝이야. '<br><br>결심한 이상 실행에 옮기는 건 순간이다.<br>하지만 역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최신 노래를 빵빵하게 틀고서, 장갑을 양 손에 낀 채<br>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다락방 손잡이를 열어제꼈다.<br><br> " 콜록! 콜록! "<br><br>여전히 먼지가 풀풀 날렸다. 안에는 언제 움직였냐는듯 가발이 잔뜩 들어차있었다.<br>가장 앞쪽에 있는 가발부터 거실 쪽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같은 가발이 하나둘씩<br> 데굴데굴 굴러가서 산발이 된 채 바닥에 뒹구는 장면은 그다지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기에 최대한 의식하지<br> 않으려 애썼다. 마침내 다락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만한 공간이 생겼다. 잠시 머뭇거렸지만<br> 이왕 한 김에 제대로 끝내야한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턱걸이하듯 몸을 끌어당겨 다락방 안으로 들어갔다.<br>생각보다 다락방 안은 넓었고, 보이지 않았던 부분에도 가발들이 꽤 쌓여있었다.<br>노래가 나오던 휴대폰을 들어 조명까지 킨 다음 다락방에 있던 가발을 정신없이 정리하고 있는데,<br>사람으로 치면 머릿가죽, 즉 가발이 사람의 두개골에 피부처럼 달라붙는 내피에 색이 누렇게 변해버린<br> 종이 하나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br><br>강보람..?<br><br> " ... "<br><br>옆에 있는 똑같은 모양의 가발을 집어들고 역시 같은 곳을 확인했다.<br><br>박은지..<br><br> ' 정말 사람 하나 하나마다 주인이 있었던거야. '<br><br>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을 오다니던 가발들의 주인은 바로 이 이름의 주인들이겠지.<br><br> " 미.. 미안하지만.. 저도 사정이란 게 있거든요.. 어쩌겠어요.. "<br><br>괜히 언짢은 마음에 혼자서 가발들에게 나름의 해명을 해가며 가발을 하나둘씩 다락 밑으로 던졌고,<br>한 쪽 벽면이 완전히 드러날 때 쯤 한 장의 사진을 찾게 되었다.<br><br> " ... "<br><br>장갑으로 대충 먼지를 닦아내고 불빛을 가까이 해보니, 나이가 지긋한 한 노인의 사진이었다.<br>사진의 아래 쪽엔 'OO병원'이란 4글자가 띄엄띄엄 프린팅되어 있었다.<br><br> ' 확실히 할아버지 계실 적에 세는 안 놨더라도 이 집이 그 전에도 빈 집은 아니었던거야. '<br><br>사진을 내려놓고 다른 벽면의 가발들마저 아래로 치웠다.<br>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나서야 가발을 모두 아래로 내려보낼 수 있었고,<br>마침내 드러난 다른 벽면에서 헌 일기장 하나와 사진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br><br> " 천사들의.. 동산..? "<br><br>헌 일기장에는 큰 글씨로 '천사들의 동산'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고, 부제로 자그맣게<br>'OO병원의 아이들' 이라고 쓰여 있었다.<br><br> [ O월 OO일 ]<br>이 병원에서 작은 천사들을 보살핀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br>하지만 아이들의 울음은 언제라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br>신이 있으시다면 왜 어린 천사들을 이렇게 일찍 필요로 하실까요?<br>내가 펼치고자 하는 의술이 당신의 부름에 반하는 것일지라도,<br>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어린 천사들의 눈물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br><br> ... <br><br> [ O월 OO일 ]<br>독한 치료 때문에 머리가 동자승처럼 벗겨진 천사들은 거울 보기를 싫어합니다.<br>어느 나이보다 거울 보며 자기 가꾸기를 좋아할 나이인데..<br>예쁜 머리띠 하나 해보지 못 하는 소녀들의 슬픔마저 치료하기엔<br> 이미 제가 너무 늙어버렸습니다.<br>슬픔을 거두고 웃음까지 찾아주고 싶건만.<br><br> ...<br><br> [ O월 OO일 ]<br>자금을 빌릴 곳을 찾았습니다!<br>천사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br>감사합니다.<br>정말 감사합니다.<br><br> ...<br><br> [ O월 OO일 ]<br>주문한 가발이 도착했습니다.<br>일단은 집 다락에 가져다 놓았는데..<br>문제는 제가 요즘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br>한 명 한 명에게 다 씌워주고, 예쁜 머리띠도 하나씩 해줘야하는데..<br>신께서 저를 지금 필요로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br><br> ...<br><br> [ O월 OO일 ]<br>일기를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br>하지만 꼭 다시 쓰겠습니다.<br>천사들에게 가발을 씌워줘야만 하니까요.<br><br><br>일기는 그 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쓰여있지 않았다.<br>다락에서 내려갈 생각도 잊은 채 옆의 앨범을 펼쳐보았다.<br>반대 벽면에서 발견했던 사진 속 할아버지가 병원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사진이 보였다.<br>그 다음 장부턴 생긴 게 다 비슷비슷한 소녀들의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야 다 개성이 있었지만,<br>모두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였기에 생긴게 비슷해보였다. 독한 치료를 한 탓일까.. 아마 백혈병인 것 같다.<br><br> " 강.. 보람.. "<br><br>가발에 적혀있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앨범 속에서 찾아냈다.<br>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였다.<br>머리카락이 없다는 것 외엔 못난 구석 하나 없는 예쁜 아이.<br><br>마침내 앨범과 일기장, 사진을 모두 든 채로 끙끙대며 다락방을 빠져나왔다.<br>온 몸이 먼지투성이라 터느라 한참을 콜록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 계단부터 거실까지 가발투성이였다.<br>박스 하나를 주워 가발을 한 곳에 모두 담은 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br>그러는 동시에 내 시선은 앨범 제일 뒷장에 적힌 병원 이름과 주소를 바라보고 있었다.<br><br>- 여보세요?<br><br> " 나야. 너 OO병원이라고 아냐? "<br><br>- 뜬금없게.. 내가 여기 원래 살던 사람도 아니고. 근데.. 들어본 것 같긴 한데.. <br><br> " 알아? 생각해봐! 이 병원 주소, 너 지금 일하는 그 도시에 있어. "<br><br>- 주소? 무슨 주소?<br><br> " 당연히 OO병원 주소 말하는거지! "<br><br>- OO병원.. 아, 어쩐지 들어봤더라 했어. 나 요즘 일하는 우림아파트 단지 알지? 저번에 얘기했잖아.<br>그 단지 공사 현장 옆에 의학기록물 관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원래는 백혈병 어린이들을 치료하던 병원이라던가?<br>바로 옆이라서 어쩌다보니 알게 됐다. 그 병원은 왜? 지금은 병원도 아니야. <br><br> " 가발이랑 관련있어. 알려줘서 고맙다. 끊는다!<br><br>- 야, 전화했으면 한 잔..<br><br>친구의 말도 잘라먹은 채 전화를 잽싸게 끊곤 차 트렁크에 앨범과 일기장을 실었다.<br>가발도 몽땅 실을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트렁크가 모자랄 것 같아 가발은 상자 그대로 거실에 둔 채<br> 자동차 시동을 걸고 네비를 켜서 우림아파트 단지로 길을 찾도록 설정한 다음 곧장 운전을 시작했다.<br>이 가발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누구인지,<br>그 모든 비밀이 풀려야만 나도, 이 가발들도 편해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br><br>오가는 차 보기 드문 늦은 밤인 덕에 1시간 남짓만에 우림아파트 단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br>놀이터 옆에 차를 세워두고 의료기록원이라는 글씨가 써진 건물 정문으로 들어가려했지만 철제 울타리가 쳐져있었다.<br>주위를 둘러보니 경비실 창문 너머로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경비원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br><br> " 경비 아저씨, 저 좀 들어가볼 수 있을까요? "<br><br> " 지금은 늦었고 안에 사람도 없어요.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내일 오세요. "<br><br> " 지금 아니면 안 돼요. "<br><br> " 거참, 왜 이래요? "<br><br>억지라는 걸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기 힘들 것 같았기에 더 막무가내로 매달려보았지만<br> 그럴수록 경비 아저씨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 경찰을 부르겠다는 엄포에 한 풀이 죽어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br><br> " 아저씨! 저 우림아파트 현장의 김 대리입니다. 기억하시죠? "<br><br> " 엇, 자네가 이 시간에 왠일이야. "<br><br> " 새벽에 찾아와서 꼬장 부리는 이 자식이 제 친구거든요. 하하. "<br><br>기록원을 찾아왔을 나를 위해 굳이 찾아와 준 친구가 고마웠다.<br>친구가 경비 아저씨와 함께 조용히 속닥이더니, 묵직한 비닐봉지 하나를 건넸다.<br>포장된 족발, 소주와 맥주가 한 병씩 담겨있었다.<br><br> " 그럼, 잠시 들어갔다 나올게요. 어차피 저희 CCTV에 얼굴도 다 찍힐텐데 다른 걱정 마시구요. "<br><br> " 자네도 오고 했으니 뭐 뒷탈은 없지 않겠어? 대신에 빨리 다녀오게. "<br><br>앨범과 일기장을 급히 챙겨 기록원 안으로 들어섰다.<br><br>제1기록실<br> 제2기록실<br> 영상실<br> 행정실<br> 강당<br>...<br><br>당장 가까운 대로 제1기록실로 들어갔지만 많은 사물함이 자물쇠로 잠겨있었다.<br><br> " 아, 다 잠긴 거 아냐? "<br><br> " 저쪽은 안 잠겨있어. "<br><br>친구가 가리킨 쪽으로 다가가자 'OO병원'이란 이름표가 선명히 드러났다.<br><br> " 맞는 거 같아. " <br><br>사라진 병원의 기록물을 담고 있는 만큼 보관함도 낡아있었기에 여는데 힘을 들여야했다.<br>끼익, 끼익, 비틀리며 열린 사물함 안에는 들고온 앨범과 비슷한 수준으로 낡았지만 제법 보관이 잘 된 <br> 자료들이 수두룩했다. 그 중엔 다양한 종류의 일지들이 들어있었고, 매 해별로 근무 명부 또한 정리되어 있었다.<br>들고온 일기를 펼쳐 일기가 쓰여진 날짜에 해당하는 근무 일지와 환자 기록 카드를 꺼내고,<br>그 해의 근무 명부 또한 꺼냈다.<br><br> " 이 일기하고 앨범을 위주로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어. "<br><br> " 내가 왜 여기 따라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br><br> " 니 발로 왔으면 입 다물고 도와주라. 시간 없어. "<br><br> " 아오. 망했다.. "<br><br>황인호.<br>아이들을 '천사'로 부르며 그녀들에게 '가발'을 남긴 의사의 이름이었다.<br>백혈병에 걸린 소녀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병원이었으나 후원 재단이 점차 지원을 중단함에 따라<br> 경영난을 앓고 있었고, 결핵만 걸려도 사람이 죽고 살고를 하늘에 맡겨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br> 소녀들은 낙엽이 지듯 하나 둘씩 떠나고 있었다. 기록물에 그녀들이 떠난 날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br>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의술을 행하는 황인호 의사였다지만 그녀들을 모두 살릴 순 없었고,<br>점점 어려워지는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재산을 점차 팔아치웠지만 끝내는 가발 하나 해주기 어려울 정도로<br> 사정이 악화되던 중 돈을 빌려 소녀들 모두에게 가발 하나씩을 선물했던 것이다.<br>아마 돈을 빌려온 곳은 할아버지로부터였던 것 같다. 그 댓가로 지금 사는 집을 받은 거겠지.<br>그 증거로 일기엔 할아버지의 가발을 자신의 집 다락에 보관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까.<br>하지만 결국 황인호 의사는 늙은 몸을 오래 가누지 못 했고, 몇 남지 않은 소녀들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br>가발은 그렇게 씌워주지도 못한 채 다락에 남았고,<br>그 많은 가발의 주인들도 하나 둘씩 하얀 세상 저편으로 저물어갔던 것이다.<br><br> " ... "<br><br>주인 잃은 가발들의 사연을 읽고 나니 코 끝이 괜히 찡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끝까지<br> 소녀들을 위해 살았던 한 의사의 인생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가발은 주인을 잃은<br> 셈은 아니었다. 자신의 집에서 （달리 말하자면 황인호 의사의 남겨진 집에서） 목격했던 모습대로라면,<br>소녀들은 가발을 쓰고 있었던 셈이 아닌가.<br><br> " 야. 더 볼 거 없으면 나가자. "<br><br>몇몇 참고할 사항을 서둘러 사진으로 남긴 후 우리는 기록원을 나섰다.<br>족발과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는 올 때와는 달리 콧노래를 부르며 극진히 우리를 배웅했다.<br><br> " 가발 주인 찾았네. 어쩔거야? "<br><br> " 이미 잠 자긴 글렀어. 황인호 의사 장례식 때 주소가 적혀있던데. 가발은 그곳에 두어야겠어. "<br><br> " 안 갖다버리고? 너 영혼 상담소라도 차릴 셈이야? "<br><br> " 진짜 영혼이 있단 걸 믿는 이상 함부로 하기 찝찝해. 이 할아버지가 소녀들이 가발을 잘 쓰고 있다는 걸 알까?<br>소녀들이 감사하다고 말을 전하고 싶어할지도 몰라. 못된 귀신이라면 몰라도 순수한 영혼이란 생각이 드니까 왠지<br> 측은한 마음이 들어. 처음엔 얼른 갖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 "<br><br> " 얼른 해치우고 같이 술 한 잔 하러 나왔더니 이게 무슨 감동의 도가니탕이야? 별 수 없네..<br>너 알아서 해라. 난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다. 나 잘 왔지? "<br><br> " 진짜 고맙다. 꼭 보답할게. 먼저 가라, 난 가발들 모셔놓으러 갈게. "<br><br>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친구를 향해 나도 손을 힘껏 흔든 뒤, 앨범과 함께 다시 차로 돌아왔다.<br>새벽이 깊었지만 상관없었다. 해가 뜨고 출근하기 전에 황인호 의사가 묻혀있는 곳에 가발을 가져다두어야 한다.<br><br><br>ㅡ<br><br><br>" 끄응, 으. 겨우 왔네.. "<br><br>한자를 읽어보니 황인호라는 사람이 이 무덤의 주인이 분명했다.<br>기록원에 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가발을 챙겨 옆 도시의 무덤에 오기까지 달이 몹시 기울었다.<br>슬슬 박명이 찾아오면 해가 살짝 고개를 내밀 즈음이었다. <br><br> " 저어.. "<br><br>무덤 앞에서 말을 하는 자신이 왠지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려다가 이내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br>자신이 본 가발들의 아우성을 생각하면 황인호 의사가 정말 이 말을 듣고 있을거란 확신이 들었다.<br><br> " 안녕하세요. 저는 의사 선생님이 살던 집에 살게 된 청년입니다. 우연히 다락에 있던 가발과<br> 일기장을 봤어요. 좋은 분이셨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셨나요? 가발들.. 주인이 찾아왔어요.<br>모두 가발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집이 좀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오해가 풀렸어요.<br>하지만 소녀들은 가발만큼이나 선생님을 보고싶어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가발을 가져왔어요.<br>근데 생각해보니 무덤이 있네요? 하나님 얘기하시길래 크리스천이신 줄.. 아니 무슨 소리 하는거지 지금.<br>죄송해요. 잠을 못 잤거든요.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이 가발을 오늘 전해드리지 못 했더라면 결국 오늘 밤은<br> 잠을 설쳤을 거에요. 천사들은 결국 부름을 받았지만,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인사 드리고 싶어했을지 모르겠어요.<br>가발하고.. 놔두신 유품들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돌려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br><br>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왠지 홀가분해져 있었다.<br>꼬박 밤을 지새운 무거운 눈꺼풀도 신기하게 가벼워져 있었다.<br>산뜻한 발걸음으로 동산을 내려갔다.<br><br><br>ㅡ<br><br><br>" 너 갈수록 얼굴이 환해진다? 드디어 애인 생겼냐? "<br><br> " 그랬으면 여기서 너랑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까.. " <br><br>친구 놈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br>당연한 일이지만 더 이상 집에 머리카락은 나타나지 않았고,<br>직장에선 자리를 완전히 잡았고 혼자 살기 넉넉한 집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br>이제 정말 사랑하는 사람만 찾으면 모든 게 완벽할 거란 생각이 든다.<br><br>언제는 이런 꿈을 꾸었다.<br>익숙한 동산에 한 할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br>긴 생머리를 한 예쁜 소녀 무리가 키득거리며 살며시 다가와선 짖궂게 장난치고 꺄르르, 도망가고,<br>그 바람에 단잠에서 깬 할아버지가 화 내긴 커녕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는..<br>무척이나 행복해보이는 풍경이었다.<br>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된 건 다행이고 바라던 일이지만,<br>아주 우연히 또 머리카락 한 가닥을 줍게 된다면..<br>어쩌면 그땐 경악이 아니라 이 시대가 잃어버린 따뜻한 마음 한 가닥을 추억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