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우선 어릴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해서 많이 봤지만 보는 것만 좋아했지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녀석임을 미리 말해둡니다 ㅡ,.ㅡㅋ
KBS 스페셜로 화제가 되었던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 이야기" 이 편을 오늘 KBS 온라인으로 보게 되었네요..
이 방송을 보기전에도 추성훈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추성훈이 겪어야 했던(자신이 만든 아픔이 아니라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던) 실연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봤음에도 감동적이네요.. 그 감동이 방송사가 쥐어짜내려고한 감동스토리가 아닌 속을 들여봤을때 진심으로 다가오는 감동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네요..
못보신분들은 KBS 인터넷사이트에도 나와 있으니까 한번쯤 보셔도 시간 아까우시지 않을겁니다..
(그렇다고 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한국방송공사랑..)
추성훈은 일본 교포 4세로 아버지도 유도를 하신 분이었습니다.. 72년 전국체전에서 일본교포 대표로 나오셔서 우승을 하셨지만 얼마후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상으로 추성훈의 아버님의 할아버지세대부터 평생 살아오신 일본이었지만 그 할아버지 세대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시다가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의 꿈을 접지 않으셨던 분인데 결국 이루시지 못합니다..
결국 72년 참가했던 전국체전에서 수영대표였던 지금의 추성훈님의 어머님을 만나서 결혼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75년 추성훈이 태어나고 추성훈 역시 대한민국 대표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의 귀화후 실업팀의 특급대우라는 당근을 뿌리치고 부산시청에 합류하게 됩니다..
허나 그의 앞에는 용인대라는 벽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유도뿐만 아니라 한국 무도계(태권도를 비롯한 여러분야)에서 비용인대의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심판부터 높으신 곳에 있으신 분들 대부분이 용인대출신이죠..
그 용인대라는 벽의 앞의 조인철이란 남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조인철을 비하하는 게 아니고 조인철 역시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허나 추성훈, 그리고 추성훈전의 윤동식이라는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유도 천재라 불리울 만한 이분도 비용인대라는 이유 만으로 단한번도 올림픽에 나서질 못했습니다..
솔직히 그때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초기 조인철 대 윤동식의 대결이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실력만으로는 한번 나가고 한번 못나가고 그런식으로 진행됬어야 맞는 말이죠.. 추성훈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게 안됬네요..
계속되는 석연찮은 심판의 판정(이 판정이 항상 결승에서 그랬으니 문제가 되겠죠..) 으로 그는 비용인대 선수지만 한국선수였던 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용인대 생에다가 그가 평생 살아온 일본에서도 한국국적이라는 이유로 멸시받고.. 자신이 사랑한 조국에서조차 멸시받고.. 윤동식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받겠죠.. 말로 해서 석연치 않은 판정이지 자신이 계속 경험하면.. 만약 글을 읽으시는 분이 추성훈의 입장이 된다면 두말없이 한국에 대한 미련 안가질겁니다.. 저도 영상을 보며 그런 생각 가졌거든요..
많이 울었답니다.. 계속되는 판정시비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에 나서지도 못했으니까요..
마지막 한국 국가대표로 참여하려고 한 대회에서 마져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는(한국) 말도 안되요 바꿔야 합니다.,.,국적을 바꿔서 일본대표로 출전할껍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귀화를 결심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더 사랑하는 유도를 위해 이 유도밖에 모르는 유도바보(추성훈의 별명입니다.. 유도를 너무 사랑했고 자신의 삶의 즐거움이 유도밖에 없다고 해서..)는 2001년 9월 일본으로 귀화합니다..
귀화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일본대표로 한국의 선수와 결승에 맞붙어 우승하게됩니다..
그의 팔엔 일장기를 붙이고서..
이후에 비로소 언론들은 들이닥치죠..(귀화전에도 비용인대생의 설움이라고 기사를 쓰는 언론도 있었지만 부산 아시안게임 후에가 엄청났죠..) 내셔널리즘이 지독히도 강한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귀화후 한국에서 펼쳐진 아시안 게임.. 그것도 결승에서 한국선수와 맞붙어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해 버렸으니까요..
허나 일본에서도 유도 종주국인 일본에서 81Kg 최강이었지만 결국 올림픽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하고 2004년 은퇴후에 K-1에 진출합니다.. K-1이 프라이드에 떨어진 인기를 만회해보려 MAX와 HEROES를 만들었는데.. 그곳 4경기에 출전에 제롬 르 반나에게만 1패를 당하고 3승1패를 기록중입니다.. MAX와 HEROES경기란 간단히 얘기해서 반은 K-1식의 입식타격룰로 진행하고 반은 프라이드식의 그라운드를 허용하는 룰입니다.. 두경기다 조금 틀리지만 경기방식 설명을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줄입니다..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 이야기" 에서 인상깊었던 점은 그의 아버지가 인터뷰 내내 단 한번도 한국말로 대화한적이 없이 일본어로만 얘기 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어머니도 추성훈도.. 한국어로 물으면 조금은 어설플 수 있지만 한국말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네요.. 자신의 할아버지서 부터 한국국적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 또한 추계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서 한국을 찾았고, 또한 한국여인과 결혼을 해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단 한마디 한국말을 하지 못할까 의문이 생기더군요..
그냥 단순히 제 느낌으로 얘기하자면 자신의 피붙이 아들에 대한 사무친 조국에 대한 애증때문에 한국어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가 혹은 한국어를 잊고 살아가야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K-1 선수로 한국에서 한국대 세계 올스타(이벤트성이 강해서 세계올스타 수준은 아니구요..) 한국 국가대표로 참가한 추성훈은 한국대표로 참가해서 2승8패로 열세였던 경기 마지막 11경기에 참가하고 멋지게 승리한 후 3승 8패를 만들고 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간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시합하는게 너무 기쁘구요 진짜 행복합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 한국사람이 아니에요.
(국적이) 일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여기 가슴 안에는
그리고 지금 여기 들어가 있는 피는
완전 한국입니다.
다시 열심히 해서 한국에 돌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현 유도부 부산시청의 감독이신 이준희 감독님은 추성훈이 처음 부산시청에 들어왔을때 "추성훈 추성훈 추.. 추.. 이렇게 불렀는데.. 우리한텐 언제나 추성훈이야" 말씀하시더군요..
추성훈, 요시히로 아키야마..
한문으로 추산성훈의 일본식 발음인 요시히로 아키야마..
그는 두개의 이름 추성훈, 요시히로 아키야마.. 모두가 자신이라 말합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한국에서는 추성훈으로 불리웠으면 좋겠답니다..
추성훈.. 당신이 가지고 싶어서 가져야 했던 연유가 아닌 태초부터 어찌할 수 없었던 사연을 아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여전히 우리의 추성훈이고.. 당신이 일장기를 달고 아키야마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더라도 당신을 우리의 추성훈으로 응원할 겁니다..
추성훈의 이야기를 아시는 오유분만이라도 그를 아키야마 일때일지언정 추성훈으로써 응원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