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3/283de223b16e6186a32f6cfc299e9e45.jpg" class="txc-image" style="clear:none;float:none;" /></p></div><p></p><p>어제 베스트간 <span style="font-family: Gulim; font-size: 12px; line-height: 21px;"><a target="_blank" href="http://todayhumor.com/?bestofbest_103859" target="_blank" class="tx-link">http://todayhumor.com/?bestofbest_103859</a></span> 글에 좀 콜로세움이 열렸네요.</p><p>물론 사제폭탄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고 </p><p>왜 당시에 안내상씨와 그를 비롯한 운동권의 반미(反美)성향이 극심했는지 써봅니다.</p><p><br></p><p>198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미국의 최고 우방국으로 전 국민적으로 친미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p><p>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항상 중요했고 당시 독재정권은 언론을 통해</p><p><b>미국은 항상 좋은나라, 선진국, 고마운 나라</b>로 포장하고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었습니다.</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그러다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12.12쿠데타가</span><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 일어납니다.</span></p><p><br></p><p>반미가 생겨난 이유</p><p><b><span style="font-size: 14pt;">1. 군사쿠데타 묵인</span></b></p><p>당시엔 평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으므로(1994년 반환) 미국의 동의도 없이 군사를 움직인 겁니다.</p><p><b>미국은 쿠데타 8일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항의했지만 곧 묵인</b>합니다.</p><p>(주한미군과 통신선이 엄연히 존재했는데 8일이나 지나서 알았다는 게 미스터리..지만 이건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br><br></p><p><span style="font-size: 14pt;"><b>2. 광주 학살 묵인</b></span>(은 곧 동조)</p><p>제가 5.18 자유공원에서 직접 찍어온 사진입니다.</p><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3/1f83edab36ed55c3d3ea756af4b74810.jpg" class="txc-image" style="clear:none;float:none;"></p><p style="text-align: left;">사진 내용 :</p><p><u>16일 <b>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b><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b>을 요청하자 </span></u></p><p><u>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b>"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b>는 기록이 남아있다.<br></u></p><p><u><br></u></p><p><u>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b><span style="font-size: 12pt;">"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span></b>며 연락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u></p><p><u>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b><span style="font-size: 12pt;">동의(agreed)함</span></b>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u></p><p><u><br></u></p><p><u>한편 5월 22이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b>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b>시키기로 결정했다.</u></p><p><u><br></u></p><p><u>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b><span style="font-size: 12pt;">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span></b>시켰다.</u></p><p><u><br></u></p><p><u>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u></p><p><br></p><p>미국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있던 것입니다.</p><p>전두환과 신군부는 미국에 밉보이면서 까지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선 미국의 지지가 꼭 필요했으니까요.</p><p>미국은 신군부가 친미적이라는 걸 확인했고 자국의 이익에 된다고 생각해서 묵인해줍니다.</p><p>결과적으로 <b>미국을 등에 업은 신군부는 정권을 잡고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b></p><p><br></p><p><b><span style="font-size: 14pt;">3. 주한</span><span style="font-size: 14pt;">미군 범죄</span></b></p><p><span style="color: rgb(102, 102, 102); font-size: 12px; line-height: 18px;">연도별 발생현황을 살펴보면, SOFA가 처음 발효된 1967년부터 1987년까지 20년간의 통계를 살펴보면 총 39,452건의 미군범죄가 발생하였는데, 평균 1년에 1,972건, 하루 5건의 범죄가 발생한 셈이다.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92년에는 총 발생건수가 754건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 뒤 적게는 6백건대에서 많게는 9백건대까지 오르다 2000년 들어 총 발생건수가 5백건대로 대폭 감소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span><font color="#0066CC" style="font-size: 12px; line-height: 18px;">2001년 현재 전체 미군범죄는 총 552건으로, 이틀에 3건 정도다. </font></p><p><font color="#0066cc"><span style="font-size: 12px; line-height: 18px;">-출처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span></font></p><p><br></p><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3/ddba16182394ea61fa20d65ba9163891.jpg" class="txc-image" style="clear:none;float:none;"></p><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3/76164da9fb144dc5b054e9926b8960e6.jpg" class="txc-image" style="clear:none;float:none;"></p><p><br></p><p>가장 유명한 주한미군 범죄가 바로 <b>'윤금이 피살 사건' </b>일 것입니다.</p><p>1992년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 술집 종업원이었던 윤금이씨가 주한 미군인 케네스 이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p><p>(피살 현장 사진은 웬만하면 안 찾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p><p>이외에도 수많은 미군범죄를 보며 주한미군 철수문제도 자주 거론되게 됩니다.</p><p><br></p><p>4.<b>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한국 학생운동의 기조가 반미로 흐르기 시작합니다.</b></p><p>그리고 <b>민족주의</b>가 부상하게 됩니다. </p><p>이때 바로 한국의 특수한 좌파운동계열인<b><span style="font-size: 12pt;"> NL(민족해방)의 탄생</span></b>합니다.</p><p>민족해방은 미국이 광주항쟁을 묵인하는 걸 보고 <b><span style="font-size: 10pt;">한국 사회를</span><span style="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1px;"><span style="font-size: 10pt;"> </span><span style="font-size: 10pt;">'식민지반(半)자본주의'로 평가했고 </span></span><span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sans-serif; line-height: 21px;">대한민국 사회를 미국 제국주의</span><span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sans-serif; line-height: 21px;">의 식민지로 보았습니다.</span></b></p><p>민족해방이 주류로 흐르자 일부에선 타민족이자 식민의 주체인 미국보다는 한 민족인 북한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p><p>사실 그때는 남과 북의 경제적인 차이도 크지 않았고(이제 막 대한민국이 역전하던 시기)</p><p>대북정보가 민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악랄한 북 정권의 실체를 모르던 민중들은 그렇게 믿을만도 했습니다.</p><p>북한과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왕국 중국에 대해서 리영희 선생이 문화대혁명을 옹호했던 흑역사가 있던 것 처럼 말입니다.</p><p><br></p><p>뭐 어찌되었든 독재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반미는 주류였습니다.</p><p>그리하여 일어난 미국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직접적인 사건이 안내상씨가 연루되었던<b> 美문화원 폭파, 방화사건이 있었고 성조기 소각, 美영사관 투석사건</b> 등이 일어나게 됩니다.</p><p>민족과 통일을 내세우며 무단방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p><p>당시 민중가요에도 반미를 많이 노래하고 있습니다.</p><p><br></p><p>그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반미기조는 사그라들었다가 2000년대 초<b> 미군장갑차 압사사건</b>과 김동성 선수 사건 등을 통해서 잠시 반미가 부활했으나 현재는 다시 사그라든 상태라고 보입니다.</p><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