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광해에 대한 논쟁이 계속 되고 있네요 ㅎㅎ </STRONG></SPAN></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STRONG></SPAN>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광해군에 대한 옹호글. 그리고 반박글은 많이 보이지만, </STRONG></SPAN></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그에 대한 재반박글은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STRONG></SPAN></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STRONG></SPAN>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대부분이 여기저기서 퍼온거라서 내용이 조금 부실함을 이해해 주시길....</STRONG></SPAN></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U></STRONG></SPAN>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U></STRONG></SPAN>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U></STRONG></SPAN> </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302/8a1f85496630c19e77bbc586eea6432b.jpg"></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U></STRONG></SPAN>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1. 광해군은 대동법의 적극적인 시행을 하지 않았다</U></STRONG></SPAN></P> <P> </P> <P> </P> <P>하지만......</P> <P> </P> <P>대동법에서 광해군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것은 맞다. </P> <P>하지만 이는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북인이 방납으로인해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P> <P>그 지지세력들을 달래주느라라고 이해할수도 있다. </P> <P> </P> <P>그렇지만 결국 대동법은 (경기도에서만 한정적이었지만) 광해군이었기에 시행될 수 있었다. </P> <P>그렇지만 결국 광해군이 '선해청'을 설치하면서 대동법은 시행될 수 있었다. </P> <P>기득권(양반, 지주)층이 극렬하게 반대한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것은, 어쨋든 광해군의 용단때문이다. </P> <P>이처럼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었던것은 임진왜란의 2년여 동안 '분조'를 통해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P> <P> </P> <P>특히, 동의보감을 통해서도 광해군의 민생회복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P> <P>선조의 어의였던 '허준'은, 선조의 죽음으로 귀양이나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P> <P>하지만 이러한 죄를 모두 사면해주고, 광해군은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도성출입 허용, 내의원 도서 출입 허용 등)</P> <P>이처럼 광해군이 동의보감 집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것은 민생회복에 대한 의지때문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P> <P> </P> <P> </P> <P> </P> <P><STRONG><U><SPAN style="FONT-SIZE: 12pt">2. 광해군시절, 경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SPAN><SPAN style="FONT-SIZE: 12pt">광해군의 지나친 독단성을 나타낸다</SPAN></U></STRONG></P> <P> </P> <P> </P> <P>하지만......</P> <P> </P> <P>광해군은 정통성이 크게 없는 왕이었다. </P> <P>영창대군에게 정통성에서 밀리고, </P> <P>임해군에게는 장자가 아니라는점에서 밀리는 등 </P> <P>광해군은 안팍으로 적이 무척 많았던 인물이다. </P> <P> </P> <P>따라서, 신하들과의 경연을 피했던것은 이러한 점을 인식해야한다. </P> <P> </P> <P>또 광해군이 경연을 피하기는 했지만, </P> <P>연산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P> <P>국방과 외교, 민생 등 자신이 직접 챙긴 부분도 상당히 많다.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3. 임진왜란 직후, 대규모 궁궐공사는 너무 무리수였고,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U></STRONG></SPAN></P> <P> </P> <P> </P> <P>하지만.....</P> <P> </P> <P>임진왜란을통해 조선의 왕의 권위는 엄청나게 떨어졌다. </P> <P> </P> <P>경복궁은 불에타서 없어졌으며, </P> <P>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 궁궐에서는 분노한 백성들에의한 약탈과 방화가 난무하는 등 </P> <P>'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왕의 권위'가 실추되었으므로</P> <P>왜란 때 실추된 왕의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했다. </P> <P> </P> <P>처음에, 파주 교하 부근에 새로운 도성을 지으려고 했지만 결국 이를 취소하기도 했다. </P> <P>따라서 광해군이 무턱대고 대규모 궁궐공사만을 쫓은 인물은 아니었다. </P> <P>한양에서의 궁궐공사는 왜란에 의해 대부분이 타버렸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P> <P>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4. 실상은 중립외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원칙이 없는 외교'일 뿐이다. </U></STRONG></SPAN></P> <P> </P> <P><STRONG>일례로, 심하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1만3천명의 조선군 중 9000명은 전사하고, 나머지 4000명은 모두 포로로 잡힌다. </STRONG></P> <P><STRONG>즉, 분명한 원칙도 없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눈치만 살살보다가 어설픈 투항으로 조선군의 궤멸을 자초한 것이다. </STRONG></P> <P><STRONG>(단, 다른 사서를 보면 9000명의 전사가 아니라 8000여명이 포로로 잡힌다는 기록이 있다)</STRONG></P> <P> </P> <P> </P> <P>하지만........</P> <P> </P> <P>광해군은 명나라의 3차례 출병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P> <P>또 후금에게는 밀서를 보내기도 한다. </P> <P>비록 명나라의 4번째 요청에 어쩔수 없이 파병했지만, 이를두고 원칙이 없는 외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P> <P> </P> <P> </P> <P>광해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명'과 '청'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중립외교를 펼쳐 왔으며,</P> <P>비록 마지막에는 명나라와 사대부들의 요구로 출병요청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P> <P>3차례나 명의 파병요구를 거절했다는것은 명나라와의 '사대의 예'로 시작한 조선의 역사에서 이는 엄청난 외교이기도하며, </P> <P>실제로 3차례의 출병요구를 모두 거절하는것에 성공하며 오히려 이 과정에서 명나라에대해 외교적 우위에 서있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P> <P> </P> <P> </P> <P>그리고, </P> <P>중립외교로 눈치를 보던 중에 심하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궤멸한것은 사실이지만, </P> <P>불과 몇년후 맹목적인 명나라와의 사대로 수십만명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병자호란'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P> <P> </P> <P>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P> <P>만일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끝까지 시행이 잘 되었다면, </P> <P>병자호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P> <P>따라서 심하전투에서의 손실로 더이상의 조선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P> <P> </P> <P> </P> <P> </P> <P><STRONG><U><SPAN style="FONT-SIZE: 12pt">5. 광해군 재평가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시절 </SPAN><SPAN style="FONT-SIZE: 12pt">'이나바 이와키치'라는 식민사학자가 시초이다. </SPAN></U></STRONG></P> <P> </P> <P>이나바라는 일본인학자가 광해군의 재평가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고해서, </P> <P>'광해군의 재평가=식민사관' 이라고 매도하는것은 말도 안된다. </P> <P> </P> <P>이것은 논리의 이탈이며 논의할 가치가 없는 항목이다. </P> <P> </P> <P><STRONG></STRONG> </P> <P><U></U> </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U>6. 따라서, 광해군 15년 동안은 민생안정, 외교, 국방 등에서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U></STRONG></SPAN></P> <P><U><SPAN style="FONT-SIZE: 12pt"><STRONG> 우물쭈물하다끝난 세월일 뿐이다. </STRONG></SPAN><SPAN style="FONT-SIZE: 12pt"><STRONG>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연한 숙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STRONG></SPAN></U></P> <P> </P> <P> </P> <P>그래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P> <P>그 답은 여러분이 알것이라고 믿습니다. </P> <P> </P> <P> </P> <P> </P> <P> </P> <P>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