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조작일까요?</P> <P> </P> <P>율곡이이는 퇴계 이황과함께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P> <P>지금 시대에도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P> <P>(5000원짜리 지폐에 율곡이이선생님의 모습이 들어가있죠 ㅎㅎ)</P> <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11/45f6ac3a1d097089a9657a3293eb5b28.jpg"></P> <P> </P> <P> </P> <P>율곡이이선생은 성릭학의 대가이시고, </P> <P>퇴계이황선생이 '주리론'(이론중심)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설명했다면, </P> <P>율곡이이선생은 '주기론'(실리중심)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설명하셨죠. </P> <P> </P> <P>하지만, 이러한 성리학에 관련된것들은 아마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것들이고, </P> <P><STRONG><U>일반인들이 알고있는점은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일겁니다. </U></STRONG></P> <P> </P> <P><SPAN style="FONT-SIZE: 24pt">십만양병설에대한 근거</SPAN></P> <P> </P> <P>십만양병설은 율곡이이의 제자 '김장생'이라는 사람이 기록한 '율곡행정'에 그 일화가 나오는데, </P> <P> </P> <P>율곡이이가 일찍이 경연에 나와 왕에게 이르되, </P> <P>"10만의 양병을 길러 완급을 도모해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않아 토붕와해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P> <P> </P> <P>하지만 옆에있던 유성룡이 왕에게 이르되,</P> <P>"특별한 사변이 없는데도 사병을 기르는것은, 화근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라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P> <P> </P> <P>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서 임진왜란은 발발하게되고, </P> <P>임진왜란이 끝난 후 유성룡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이제와서보니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P> <P> </P> <P> </P> <P> </P> <P>즉, 율곡이이의 재자였던 김장생이 쓴 율곡행정이라는책이 그 근거가 됩니다. </P> <P>바로 위의 일화가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의 핵심입니다.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24pt">하지만...</SPAN></P> <P> </P> <P>하지만, 이는 국사학계에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P> <P> </P> <P><STRONG>이덕일</STRONG> 한가람역사연구소장, <STRONG>송복</STRONG>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STRONG>이가원</STRONG> 연세대교수 등이 중심이되어 비판했는데,</P> <P>그 요지는 확실한 출처도 없는 일화가 어느 순간부터 정사로 자리잡았다는 것입니다. </P> <P> </P> <P>그렇다면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P> <P> </P> <P> </P> <P> </P> <P> </P> <P><STRONG><SPAN style="FONT-SIZE: 11pt">1)율곡이이 본인의 남긴 기록에는 '십만양병설'에 대한 구절이 전혀 없다는점.</SPAN></STRONG></P> <P> </P> <P>즉, 율곡이이선생이 생전에 쓴 책이나, 일기, 상소문 등을 모두 종합해보아도 </P> <P>십만양병설이나 그와 비슷한 구절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P> <P>문치국가인 조선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는것은 국가의 엄청난 개혁이자 과제인데,</P> <P>율곡이이선생이 이를 주장했다면 최소한 율곡이이선생의 생전의 글에서 이와 관련된 글이 조금이라고 나와야하는데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11pt"><STRONG>2)선조실록에는 나오지가 않는다</STRONG></SPAN></P> <P> </P> <P>김장생이 율곡행정에 기록하기에는, </P> <P>분명 왕과의 경연장에서 율곡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P> <P>하지만 선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P> <P> </P> <P>단, 인조반정이후에 반정세력이 선조실록을 다시편찬하게되는데, </P> <P>이것이 "선조수정실록" 입니다.</P> <P>여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사관의 논평형식으로 분명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P> <P> </P> <P>하지만, 반정 이후에 기록된것이 선조수정실록이기때문에,</P> <P>인조반정의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산 선조수정실록에는 그 왜곡이 많다는 주장이 있습니다.</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11pt"><STRONG>3)율곡이이가 이문성이라는 칭호를 받기전에도 이미 이문성이라는 말을 썼다?!</STRONG></SPAN></P> <P> </P> <P>김장생이 쓴 율곡행정에는 분명히,</P> <P>유성룡이 한탄하기를, "이문정(율곡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P> <P> </P> <P>하지만 나중에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에는, </P> <P>유성룡이 한탄하기를, "이문성(율곡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구절이라고 나옵니다. </P> <P> </P> <P>"이문정"이라는 명칭은 중국 고사에서 율곡이이와 비교하기 위해 인용된 문구라서 문제가 없지만, </P> <P>"이문성"이라는 명칭은 율곡이이가 죽은 후 임금이 직접 내려준 시호입니다. </P> <P> </P> <P>유성룡이 죽은 시기는 1607년(선조 40년), </P> <P>율곡이이에게 이문성이라는 칭호가 수여된것은 1624년(인조 2년),</P> <P> </P> <P>따라서 율곡이이에게 "이문성"이라는 칭호가 내려지기도 전에 유성룡이 '이문성'을 운운하며 십만양병설을 한탄했다는이야기는,</P> <P>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버리게됩니다. </P> <P>즉, 서인의 거두인 율곡이이의 위대함을 지나치게 강조하기위해 십만양병설을 조작했다는 것이죠.</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11pt"><STRONG>4)인구통계학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인구는 230만명</STRONG></SPAN></P> <P> </P> <P>여러 역사학자들이 추론해본결과, </P> <P>그 당시의 조선인구는 조선8도를 통틀어서 230여만명이라고합니다.</P> <P> </P> <P>즉, 인구가 230만명밖에 안되는데,</P> <P>군병으로만 10여만명을 양성하는것은 너무 현실성이 없는 정책이라는것입니다.</P> <P><BR> </P> <P><SPAN style="FONT-SIZE: 24pt">그렇다면 왜 조작을...?</SPAN></P> <P> </P> <P>그렇다면 왜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했던 것일까요?</P> <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11/e5a4681e99b50d0994c2f62ed1a30e52.jpg" class="txc-image" style="FLOAT: none; CLEAR: none" /></P> <P></P> <P>그 이유로는, </P> <P> </P> <P><STRONG>1)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서인들이 자신의 대스승인 율곡이이를 추켜세우기 위해서이고, </STRONG></P> <P><STRONG>2)반대파인 유성룡(동인)을 십만양병설에 반대한 인물로 깎아내리기 위해서, </STRONG></P> <P>라고 합니다. </P> <P> </P> <P>특히 <STRONG>송복</STRONG>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P> <P>"율곡제자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율곡이이는 성인으로, 유성룡은 속류정치인으로 깎아내리기위해서라는것은 삼척동자도 아는사실" </P> <P>이라며 비판합니다. </P> <P> </P> <P>특히 <STRONG>김연수</STRONG>같은 학자는 </P> <P>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한 뒤 이이를 높이기 위해 없던 사실을 지어내 선조수정실록 말미에 사관 의견으로 끼워 넣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라고 비판합니다. </P> <P> </P> <P> </P> <P>즉,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얻은 서인들이</P> <P>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율곡이이를 높이기 위한 조작을 했다는것이 그 요지입니다.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 24pt">아니다...십만양병설은 존재한다...!</SPAN></P> <P><BR>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론을 한번 들어볼까요?</P> <P> </P> <P> </P> <P><STRONG><SPAN style="FONT-SIZE: 11pt">1) 이이는 황해감사시절 조선8도에서 군적을 제일 잘 정비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SPAN></STRONG></P> <P> </P> <P>이이는 황해감사로 부임하면서, 이원익을 군관으로 수행하여 군적을 정리하게 하였는데, </P> <P>이후 황해도가 조선 8도 중에 군적이 가장 잘 정비되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P> <P>즉, 이는 이이가 생전에도 국방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P> <P> </P> <P><SPAN style="FONT-SIZE: 11pt"><STRONG>2)율곡전서의 "이문성"논란은 단순한 교정자의 해프닝이다</STRONG></SPAN></P> <P> </P> <P>순조 14년(1814년)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성'이라고 기재되어있지만, </P> <P>영조 25년(1749)년에 기록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으로 기재되어있습니다.</P> <P>아마, 이는 교정자가 율곡이이의 시호가 '이문성'이라는것을 알고, 실수로 '이문정'이라고 고친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합니다. </P> <P> </P> <P><SPAN style="FONT-SIZE: 11pt"><STRONG>3)선조수정실록에 정치적 의도가 들어갔다는것은 위험한 생각</STRONG></SPAN></P> <P> </P> <P>선조수정실록에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들었갔다는것은 무척 위험한 생각이라고합니다. </P> <P>그렇게 따진다면, 조선왕조 28대왕의 실록은 모두 믿을만한것이 되지 못한다는 귀결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P> </P> <P> </P> <P> </P> <P> </P> <P>재미있지 않나요?</P> <P>바로 이러한점이 역사의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P> <P> </P> <P>물론 아직까지는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정론인것이 사실입니다. </P> <P>국사책에서도, 역사책에서도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정론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P> <P> </P> <P>뭐 어쨋든, </P> <P>이러한 역사학자끼리의 논쟁과 비판이 </P> <P>조금 더 진실에 더 가깝게 갈수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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