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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anic_86517
    작성자 : nangbi
    추천 : 28
    조회수 : 4078
    IP : 110.9.***.217
    댓글 : 11개
    등록시간 : 2016/02/27 13:46:00
    http://todayhumor.com/?panic_86517 모바일
    스쿠터
    옵션
    • 창작글

    전생에 나는 장군이었다. 품종 좋은 명마 위에서 시대를 호령했다. 나의 말은 고풍스럽고 우아했으며 기개 높았다. 말과 함께 나는 시대와 운명 속을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나의 칼은 날카롭고 예리했으며 적의 칼은 무디고 녹슬었다. 나의 칼만이 오로지 동시대의 유일한 정의로움이었다.


    더불어 칼날은 말의 등 위로 풍요로왔다. 또렷한 눈동자가 총명하던 말 위에서 칼끝은 화려하게 춤을 췄다. 쥐어진 칼과 올라탄 말 덕에 나는 스스로 역사가 되었다.


    그 무렵 한 여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언제나 대의 앞에 사랑은 무참할 뿐. 나라를 위해, 또한 전쟁을 위해 집중해야 할 정신이 어느덧 여자 안에 온전했다. 그것은 기쁨이자 모욕. 나는 다시 여자를 찾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허전함에 찾는 술은 그칠 줄 몰랐고 취하면 여지 없이 말은 나를 업어 여자 품에 안겼다.


    여자를 잊고자 함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거추장스런 총명함으로 말은 오로지 나만을 위했다. 허나 여자의 품에서 노닥이기엔 대의란 실로 높은 것. 결국 사랑하는 말의 목을 자를  수밖에. 예리한 칼끝이 단번에 뼈와 살을 갈랐다. 나와 함께 적을 베던 말이 결국 내 칼 끝에 고꾸라지던 그날. 콸콸, 쏟아지는 피속에서 칼을 분질렀지만 떨어진 말의 목은 여전히 내게 조아렸다.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을 묻으며 눈물로 사죄했다.


    하지만 다음 생에도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환생할 때마다 전생의 기억을 잊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또렷한 건 언제나 말에 대한 애틋함 뿐이었다. 허나 다섯 번의 생애가 지나도록 말을 찾지 못했고 이제는 우리의 재회도 아주 잊힌 일처럼 희미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환생.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당시 내게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쟁취하기 어려웠고 대신 빠르고 날렵한 오토바이가 가지고 싶었다. 혹 결석을 하더라도 아르바이트는 빠짐없이 이행하며 세 달 사이 중고 스쿠터 한대 값의 돈을 모았다. 그리고 달뜬 맘에 오토바이 가게로 달려갔다. 가장 빠르고 화려한 스쿠터를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오토바이 가게에 들어선 그때, 어쩐지 낡은 택트 한대에 눈길이 갔다. 그리곤 난데없이  머릿속으로 떠오는 어떤 영상.


    너른 마당 한켠 슬픈 말의 눈망울과 햇빛을 받아 번쩍이던 칼날의 섬광과 말의 목을 내리치며 오열하는 나의 모습. 
    그 녀석이다. 가물거려 이제는 윤곽조차 희미해진 기억으로, 모질게도 품고 있던 나의 말. 내가 목을 베고 내 손으로 묻어버린, 그럼에도 원망 없이 머리를 조아리던. 

    억겁의 세월만에, 가까스로 우리는 만난 것이다. 

    열쇠를 받아 쥔 나는 감격을 감출 수 없었다. 두근대는 맘으로 열쇠를 넣고 힘차게 돌렸다. 나의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울어댔다. 그 길로 애마를 몰고 한강변을 신나게 내달렸다. 오랜 옛날 전장을 누비던 기개로, 천년고도 신라의 영광과 함께한 추억으로, 우리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해가 저물고 달이 비추고 달이 저물고 다시 해가 비출 때까지.


    지칠 때 까지 달린 우리는  기진맥진하여 열여덟 시간 만에 휴식을 위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경사가 가파른 우리 동네의 비탈을 넘어 집을 바로 앞에 둔 골목 어귀를 돌 때 하얀 아반떼 한 대가 예고 없이 튀어나와 세차게 말을  들이받았다.


    우두둑, 하며 순식간에 부러져 나가는 머리통. 시뻘건 선혈 대신 끊어진 선 몇 개가 흉측하게 튀어 나왔고 헤드라이트는 무참히 박살 났다. 나는 그대로 말에서 튕겨나가 좁은 골목 벽면에 세차게 부딪혔지만 그것보다 내 말의 고꾸라진 육체와 완전히 돌아간 머리통이 온 감각을 비틀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데 아반떼에서 내린 운전자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나를 내려다 보며 '어머,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오래전 대의를 위해 저버린 사람,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기 위해 애마의 목까지 잘라야 했던 그 사람과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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