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무학이지만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다. 전쟁 이후, 한때 이 땅 위에 존재했던 신화적인 가난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이다. 지금 시대는 상식과 합리가 그나마 하나의 관념으로 대접이라도 받지만,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는 광기와 비이성이 관념이 아니라 명징한 실존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수렴하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는 먹고 살기 위해 모두들 조금씩은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버지의 본질이 내 아버지의 실존을 따른다 해서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는가. 불행한 시대를 온 몸으로 밀어 올리느라 이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늙은 아버지를, 합리와 정의라는 관념 위에 편히 누워 있는 아들이 무슨 자격으로 비난할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의 정치적 자유에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럽고 죄송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제 밤에 내가 너무 성급했으며 아버지가 좋아하는 후보자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고 사과드렸다. 그리고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찍으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원래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 다른 법이다. 특히나 정치로 가면 더 심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그러면서 이 사회가 점점 나아지는 기라. 그러니까 정치로는 아부지하고 아들이 좀 싸워도 된다. 신경쓰지 마라 그런거. 아부지는 박근혜가 참 좋다. 그런데 니가 볼때는 아니겠지. 니는 니가 옳다고 믿는 대로 찍으면 된다. 아부지도 아부지가 좋은 대로 찍으면 되는 거다. 그라고 지난 번에 니가 노무현 찍으라 그래서 내가 찍어 줬잖아. 요번에는 내가 찍고 싶은 사람 찍을란다. ㅎㅎㅎㅎㅎ그런데 언제 내려올끼고? 얼굴 잊어먹겠다"
나는 그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제대로 배웠다. 민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말이 아니라 독재조차 품는 말이다. 당신이 호모포비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성적 지향을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거나 공격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순혈민족주의자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외국인노동자를 차별하거나 착취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애국 보수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을 좌좀빨갱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자기와 다른 사람, 자기와 다른 생각과 싫든 좋든 공존할 줄 아는 태도. 그게 민주주의다. 이 위대한 룰 안에서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으로 서로 공정하게 경쟁해보자. 그래서 우리 다 같이 잘 사는 방향으로 꾸역꾸역 좀 가보자. 이게 민주주의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적은 친일 독재의 잔당들이 아니라 투표도 안 하면서 관념 위에 누워 정치가 썩었네 어쩌네 하는 족속들이다. 그러니 투표해라. 당신이 누구를 지지하든. 투표해라. 두 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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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페북에 썼던 글인데 오유인들은
이런 글 싫어하시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