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오유 바로가기
http://m.todayhumor.co.kr
분류 게시판
베스트
  • 베스트오브베스트
  • 베스트
  • 오늘의베스트
  • 유머
  • 유머자료
  • 유머글
  • 이야기
  • 자유
  • 고민
  • 연애
  • 결혼생활
  • 좋은글
  • 자랑
  • 공포
  • 멘붕
  • 사이다
  • 군대
  • 밀리터리
  • 미스터리
  • 술한잔
  • 오늘있잖아요
  • 투표인증
  • 새해
  • 이슈
  • 시사
  • 시사아카이브
  • 사회면
  • 사건사고
  • 생활
  • 패션
  • 패션착샷
  • 아동패션착샷
  • 뷰티
  • 인테리어
  • DIY
  • 요리
  • 커피&차
  • 육아
  • 법률
  • 동물
  • 지식
  • 취업정보
  • 식물
  • 다이어트
  • 의료
  • 영어
  • 맛집
  • 추천사이트
  • 해외직구
  • 취미
  • 사진
  • 사진강좌
  • 카메라
  • 만화
  • 애니메이션
  • 포니
  • 자전거
  • 자동차
  • 여행
  • 바이크
  • 민물낚시
  • 바다낚시
  • 장난감
  • 그림판
  • 학술
  • 경제
  • 역사
  • 예술
  • 과학
  • 철학
  • 심리학
  • 방송연예
  • 연예
  • 음악
  • 음악찾기
  • 악기
  • 음향기기
  • 영화
  • 다큐멘터리
  • 국내드라마
  • 해외드라마
  • 예능
  • 팟케스트
  • 방송프로그램
  • 무한도전
  • 더지니어스
  • 개그콘서트
  • 런닝맨
  • 나가수
  • 디지털
  • 컴퓨터
  • 프로그래머
  • IT
  • 안티바이러스
  • 애플
  • 안드로이드
  • 스마트폰
  • 윈도우폰
  • 심비안
  • 스포츠
  • 스포츠
  • 축구
  • 야구
  • 농구
  • 바둑
  • 야구팀
  • 삼성
  • 두산
  • NC
  • 넥센
  • 한화
  • SK
  • 기아
  • 롯데
  • LG
  • KT
  • 메이저리그
  • 일본프로야구리그
  • 게임1
  • 플래시게임
  • 게임토론방
  • 엑스박스
  • 플레이스테이션
  • 닌텐도
  • 모바일게임
  • 게임2
  • 던전앤파이터
  • 마비노기
  • 마비노기영웅전
  • 하스스톤
  • 히어로즈오브더스톰
  • gta5
  • 디아블로
  • 디아블로2
  • 피파온라인2
  • 피파온라인3
  • 워크래프트
  • 월드오브워크래프트
  • 밀리언아서
  • 월드오브탱크
  • 블레이드앤소울
  • 검은사막
  • 스타크래프트
  • 스타크래프트2
  • 베틀필드3
  • 마인크래프트
  • 데이즈
  • 문명
  • 서든어택
  • 테라
  • 아이온
  • 심시티5
  • 프리스타일풋볼
  • 스페셜포스
  • 사이퍼즈
  • 도타2
  • 메이플스토리1
  • 메이플스토리2
  • 오버워치
  • 오버워치그룹모집
  • 포켓몬고
  • 파이널판타지14
  • 배틀그라운드
  • 기타
  • 종교
  • 단어장
  • 자료창고
  • 운영
  • 공지사항
  • 오유운영
  • 게시판신청
  • 보류
  • 임시게시판
  • 메르스
  • 세월호
  • 원전사고
  • 2016리오올림픽
  • 2018평창올림픽
  • 코로나19
  • 2020도쿄올림픽
  • 게시판찾기
  • 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오니쯔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12-03-03
    방문 : 1181회
    닉네임변경 이력
    회원차단
    회원차단해제
    게시물ID : sisa_513789
    작성자 : 오니쯔
    추천 : 0
    조회수 : 655
    IP : 119.195.***.112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4/05/19 07:58:09
    http://todayhumor.com/?sisa_513789 모바일
    부마민주화항쟁을 아시나요??
    5.18이 어제였습니다. <div><br /></div> <div>광주분들이 5.18에 대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부산, 마산에는 부마민주화항쟁이 있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저는 그 이후 태생인지라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적어도 80년대 후반까지만해도</div> <div><br /></div> <div>서면로터리 등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아래와 같이 부마민주화항쟁에 대한 내용을 한번 남겨봅니다.</div> <div><br /></div> <div><br /></div>개요 <a target="_blank" href="#s-1" class="perma" target="_blank">¶</a> <div id="sc-1"><div id="aline-23"><a title="1979년" href="/wiki/1979%EB%85%84" class="wiki" target="_blank">1979년</a> <a title="10월 16일" href="/wiki/10%EC%9B%94%2016%EC%9D%BC" class="wiki" target="_blank">10월 16일</a>부터 <a title="10월 20일" href="/wiki/10%EC%9B%94%2020%EC%9D%BC" class="wiki" target="_blank">10월 20일</a>까지 <a title="부마" href="/wiki/%EB%B6%80%EB%A7%88" class="wiki" target="_blank">부마</a> 지역<tt class="foot"><a title="[[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와 [[마산]](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일대)" href="#fn1" id="rfn1" target="_blank">[1]</a></tt>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a title="박정희" href="/wiki/%EB%B0%95%EC%A0%95%ED%9D%AC" class="wiki" target="_blank">박정희</a>의 <a title="제4공화국" href="/wiki/%EC%A0%9C4%EA%B3%B5%ED%99%94%EA%B5%AD" class="wiki" target="_blank">제4공화국</a> <a title="10월 유신" href="/wiki/10%EC%9B%94%20%EC%9C%A0%EC%8B%A0" class="wiki" target="_blank">유신 독재</a>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23"></span></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2"></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2"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25"><a id="s-2"></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2</a> </span>배경 <a target="_blank" href="#s-2"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2"><div id="aline-26"><a title="1970년대" href="/wiki/1970%EB%85%84%EB%8C%80" class="wiki" target="_blank">1970년대</a>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인권 탄압 논란이 불거졌다. 또한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 그리고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임금 상승으로 인해 대중들의 불만도 팽배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대중들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불신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렇듯 당시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로 인해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경제난은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26"></span></div><br /> <div id="aline-28">이런 상황 속에서 <a title="오일 쇼크" href="/wiki/%EC%98%A4%EC%9D%BC%20%EC%87%BC%ED%81%AC" class="wiki" target="_blank">제 2차 석유 파동</a>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부가 한창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또한 휘청거렸다. 게다가 당시 <a title="미국" href="/wiki/%EB%AF%B8%EA%B5%AD" class="wiki" target="_blank">미국</a>은 <a title="지미 카터" href="/wiki/%EC%A7%80%EB%AF%B8%20%EC%B9%B4%ED%84%B0" class="wiki" target="_blank">지미 카터</a>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었고 덕분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28"></span></div><br /> <div id="aline-30">결국 1978년 총선에서 야당이 득표율에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때문에 국회에서는 <a title="유신정우회" href="/wiki/%EC%9C%A0%EC%8B%A0%EC%A0%95%EC%9A%B0%ED%9A%8C" class="wiki" target="_blank">유신정우회</a>의 <a title="백두진" href="/wiki/%EB%B0%B1%EB%91%90%EC%A7%84" class="wiki" target="_blank">백두진</a>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30"></span></div><br /> <div id="aline-32">1979년 <a title="김영삼" href="/wiki/%EA%B9%80%EC%98%81%EC%82%BC" class="wiki" target="_blank">김영삼</a>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과감하게 민주주의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때 신민당 당사에서 <a title="YH 사건" href="/wiki/YH%20%EC%82%AC%EA%B1%B4" class="wiki" target="_blank">YH 사건</a>이 일어나 이를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야당 당사에 직접 경찰이 들어갔다)에서 벌어진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강한 논조로 비난했고 이에 국회에서는 국가 체제에 대한 모독<tt class="foot"><a title='결정적으로 김영삼이 꼬투리가 잡힌 계기는 그 해 9월 경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중 김영삼이 "미국은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할 것" 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이를 사대주의적 발상에 의한 국가 모독으로 꼴리는 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href="#fn2" id="rfn2" target="_blank">[2]</a></tt>을 이유로 10월 4일 날치기로 김영삼을 강제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한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32"></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3"></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3"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34"><a id="s-3"></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3</a> </span>발단 <a target="_blank" href="#s-3"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3"><div id="aline-35">1979년 10월 15일 <a title="부산대학교" href="/wiki/%EB%B6%80%EC%82%B0%EB%8C%80%ED%95%99%EA%B5%90" class="wiki" target="_blank">부산대학교</a> 이진걸은 민주선언문을 인쇄,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그 날 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가 경찰에게 쫓기자 이번에는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래서 10월 15일 도서관 앞에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날 시위는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무력감에 좌절하는 상황에서도 법정대 그룹, 언더 써클 그룹, 아카데미를 비롯한 민주 동아리 계열, 상대 경제사학회 등에서 다시금 시위 준비를 했고 그 결과 10월 16일 오전 도서관에서 드디어 시위가 벌이지기 시작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35"></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4"></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4"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37"><a id="s-4"></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4</a> </span>부산에서의 전개 <a target="_blank" href="#s-4"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4"><div id="aline-38">데모 안하기로 유명해 유신대학교라는 오명이 붙던 부산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tt class="foot"><a title='이에 관한 [[카더라 통신]] 일화가 있다. 당시 대학 내에서 시위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도 부산대학교에서는 잠잠한 모습을 보이자 이화여대에서 뭔가를 부쳐왔단다. 여대에서 보낸 물건에 기대하면서 포장을 뜯어보니 [[고추]]와 [[가위]]가 들어있었다(=니들이 남자 맞냐? 차라리 ([wiki:"고자되기" 이보시오! 안 돼!]) 하지?). 이에 어이가 상실한 부산대가 발끈하여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더라]]. 그런데 이런 소문은 사실 굉장히 광범위하게 많아서... 부산대에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니까... 일설에 따르면 이대가 고대에게 가위를 보냈다, 서울대에 보냈다, 연대에 보냈다 등등 여러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게다가 시대 상황까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6.3 항쟁,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신 반대, 부마 항쟁, 5.3 인천 사태 등등...' href="#fn3" id="rfn3" target="_blank">[3]</a></tt>하자 순식간에 시위 인원이 늘어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 를 부르짖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38"></span></div><br /> <div id="aline-40">늦은 오후부터는 <a title="동아대학교" href="/wiki/%EB%8F%99%EC%95%84%EB%8C%80%ED%95%99%EA%B5%90" class="wiki" target="_blank">동아대학교</a>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a rel="nofollow" href="/wiki/%EA%B5%AD%EC%A0%9C%EC%8B%9C%EC%9E%A5" class="nonexistent wiki" title="국제시장" target="_blank">국제시장</a> 일대를 무대로 게릴라식 전개되었다. 여타 시위와 달리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a title="빵" href="/wiki/%EB%B9%B5" class="wiki" target="_blank">빵</a>이나 <a title="김밥" href="/wiki/%EA%B9%80%EB%B0%A5" class="wiki" target="_blank">김밥</a>, 청량음료, 캔<a title="맥주" href="/wiki/%EB%A7%A5%EC%A3%BC" class="wiki" target="_blank">맥주</a> 같은 먹을거리와 담배,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40"></span></div><br /> <div id="aline-42">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도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을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범 시민 항쟁으로 전개되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42"></span></div><br /> <div id="aline-44">밤이 되어 시민들이 더욱 합세하자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파출소, 어용 신문사와 방송사,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되었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44"></span></div><br /> <div id="aline-46">10월 17일부로 부산대는 긴급 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계속 전개되었다.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a target="_blank" href="/wiki/KBS" title="KBS" class="wiki" target="_blank">KBS</a>, <a target="_blank" href="/wiki/MBC" title="MBC" class="wiki" target="_blank">MBC</a>, <a title="부산일보" href="/wiki/%EB%B6%80%EC%82%B0%EC%9D%BC%EB%B3%B4" class="wiki" target="_blank">부산일보</a>사, <a title="경상남도" href="/wiki/%EA%B2%BD%EC%83%81%EB%82%A8%EB%8F%84" class="wiki" target="_blank">경남도청</a>, 그리고 <a target="_blank" href="/wiki/TBC" title="TBC" class="wiki" target="_blank">TBC</a>-TV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46"></span></div><br /> <div id="aline-48">당시 부산시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을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에서의 시위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a title="계엄령" href="/wiki/%EA%B3%84%EC%97%84%EB%A0%B9" class="wiki" target="_blank">계엄령</a>을 선포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48"></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5"></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5"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50"><a id="s-5"></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5</a> </span>마산에서의 전개 <a target="_blank" href="#s-5"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5"><div id="aline-51">부산에 공수여단 50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10월 18일 <a title="경남대학교" href="/wiki/%EA%B2%BD%EB%82%A8%EB%8C%80%ED%95%99%EA%B5%90" class="wiki" target="_blank">경남대학교</a>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51"></span></div><br /> <div id="aline-53">마산에서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츰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53"></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6"></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6"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55"><a id="s-6"></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6</a> </span><a title="해병대" href="/wiki/%ED%95%B4%EB%B3%91%EB%8C%80" class="wiki" target="_blank">해병대</a> 모습 <a target="_blank" href="#s-6"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6"><div id="aline-56">당시 부산 마산에는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 해병대 1사단 7연대(박구일 대령이 지휘)가 계엄군으로 들어왔는데 신동아 기사에 나온 해병대 출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둘이 진압방식이 아래와 같이 달랐다고 한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56"></span></div><br /> <div id="aline-58"> <ul> <li>공수부대 경우<tt class="foot"><a title="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1.html" href="#fn4" id="rfn4" target="_blank">[4]</a></tt><span class="line-anchor" id="line-58"></span><br /> <ul> <li>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타서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위협함<span class="line-anchor" id="line-59"></span><br /> <ul> <li>송기석 씨 증언: <span class="line-anchor" id="line-60"></span></li></ul></li></ul></li></ul><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얼굴에 시커멓게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부대원들이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치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61"></span></blockquote> <ul> <li>당시 31세이던 전병진씨는 서면 한독병원 앞을 지나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휘두른 M16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62"></span><br /></li></ul> <ul> <li>해병대 경우<tt class="foot"><a title="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2.html" href="#fn5" id="rfn5" target="_blank">[5]</a></tt><span class="line-anchor" id="line-64"></span><br /> <ul> <li>계엄 1진으로 투입됨<span class="line-anchor" id="line-65"></span><br /> <ul> <li>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벽돌과 돌멩이를 던지고 그것에 맞고 그래서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 밀어냄.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함.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음<span class="line-anchor" id="line-66"></span></li> <li>김동일 씨 증언: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67"></span></li></ul></li> <li>당시 정신교육 때 박구일 7연대장이 했던 지시: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span class="line-anchor" id="line-68"></span></li> <li>김현숙 씨 증언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69"></span></li></ul></li><span class="line-anchor" id="line-70"></span><br /> <li>박정희 죽은 뒤 했던 위민활동과 선무활동과 모습<span class="line-anchor" id="line-71"></span><br /> <ul> <li>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듬.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span class="line-anchor" id="line-72"></span></li></ul></li> <ul> <li>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를 제자리에 놓음<span class="line-anchor" id="line-73"></span><br /> <ul> <li>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span class="line-anchor" id="line-74"></span></li></ul></li> <li>당시 주둔하던 해병 중 한병사는 시민과 연애감정을 싹틈. 결혼함.<span class="line-anchor" id="line-75"></span></li> <li>박경미 씨 증언: <span class="line-anchor" id="line-76"></span><br /><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77"></span></blockquote></li> <li>강민호 씨 증언: <span class="line-anchor" id="line-78"></span><br /><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79"></span></blockquote></li> <li>육군 예비역의 증언: <span class="line-anchor" id="line-80"></span><br /><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1980년대 초반 친구인 해병대 장교와 함께 부산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버스 안내양이 나한테는 차비를 받으면서 해병대 친구의 차비는 한사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야, 왜 네 차비는 안 받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멋쩍게 웃음만 짓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버스 안내양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해병대가 인기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왔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81"></span></blockquote></li></ul> <li>5.18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 했던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당시에 부산과 마산엔 공수부대는 내려오지않고 해병대 1사단 2연대이 주둔했는데 큰 유혈충돌은 없었다. <tt class="foot"><a title="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3.html" href="#fn6" id="rfn6" target="_blank">[6]</a></tt> <span class="line-anchor" id="line-82"></span></li> <li>박구일 대령은 13년 후, <a title="민주자유당" href="/wiki/%EB%AF%BC%EC%A3%BC%EC%9E%90%EC%9C%A0%EB%8B%B9" class="wiki" target="_blank">민주자유당</a>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a title="통일국민당" href="/wiki/%ED%86%B5%EC%9D%BC%EA%B5%AD%EB%AF%BC%EB%8B%B9" class="wiki" target="_blank">통일국민당</a>으로 당적을 옮겼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83"></span><br /></li></ul>하지만 이상은 해병대 출신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기사화한 것일 뿐, 진실화해위원회의 공식 조사결과 보고서엔 전혀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 기사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85"></span></div><br /> <div id="aline-87">예를 들어 저 기사엔 시위대와 해병대가 맞부딛쳤고 시위대가 해병대에게 엄청난 폭력을 가하는데도 해병대는 맞으면서도 비폭력으로 맞서는 천사표 부대로 묘사됐지만, 위 공식 보고서엔 해병대는 아예 시위대와의 충돌 자체가 없었고, 예외적으로 한번 접촉했을 때 해병대가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기도 하는 등 실제론 신동아 기사에 나온 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87"></span></div><br /> <div id="aline-89">해병대 제2연대 1대대 소속 해병대원 이○○(이등병) 씨는 이렇게 증언하였다.<tt class="foot"><a title="출처: [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400&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진실화해]보고서에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431쪽" href="#fn7" id="rfn7" target="_blank">[7]</a></tt><span class="line-anchor" id="line-89"></span><br /><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다고 들었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발생한 것이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90"></span></blockquote>자세한건 <a target="_blank" href="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400&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진실화해위원회</a>보고서 참고<span class="line-anchor" id="line-91"></span></div><br /> <div id="aline-93">그리고 위 공식 보고서엔 저 기사에 나온 것 같은 공수부대에 의한 심한 폭력에 대한 증언은 없다. 실제로 부마항쟁 때는 훗날의 5.18 광주 때와는 달리 군과 시위대 간에 무력충돌이 거의 없었다 (군 투입 전에 경찰과는 마찰이 있었지만). <span class="line-anchor" id="line-93"></span><br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해병대를 띄우기 위한 목적이 다분한 저 기사는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94"></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7"></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7"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96"><a id="s-7"></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7</a> </span>항쟁 그 후 <a target="_blank" href="#s-7"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7"><div id="aline-97">나흘간의 시위 결과로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일단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지만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후 6일 뒤에 일어난 <a title="10.26 사건" href="/wiki/10.26%20%EC%82%AC%EA%B1%B4" class="wiki" target="_blank">10.26 사건</a>이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97"></span></div><br /> <div id="aline-99">기소된 사람들은 10.26 이후 석방되거나 재판을 거쳐 1982년 <a title="전두환" href="/wiki/%EC%A0%84%EB%91%90%ED%99%98" class="wiki" target="_blank">전두환</a>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99"></span></div><br /> <div id="aline-101">항쟁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에는 <a title="10.26 사건" href="/wiki/10.26%20%EC%82%AC%EA%B1%B4" class="wiki" target="_blank">10.26</a>으로 인하여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박정희도 이에 동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무력을 통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을 것이며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김영삼의 체포도 임박한 상태였다(김영삼의 체포는 10월 30일에 실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01"></span></div><br /> <div id="aline-103">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구상했던 무력 진압은 결국 7개월 뒤 <a title="5.18 광주민주화운동" href="/wiki/5.18%20%EA%B4%91%EC%A3%BC%EB%AF%BC%EC%A3%BC%ED%99%94%EC%9A%B4%EB%8F%99" class="wiki" target="_blank">광주</a>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광주에서 김대중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으로 그대로 재현된다(김정남<tt class="foot"><a title="김영삼 정권 때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냈다." href="#fn8" id="rfn8" target="_blank">[8]</a></tt>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중).<span class="line-anchor" id="line-103"></span></div><br /> <div id="aline-105">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 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a target="_blank"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63931"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a>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a target="_blank"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49609"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a>받았다.<tt class="foot"><a title="한편 이 조사 결과에 대해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법률에 규정된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고 주장했다." href="#fn9" id="rfn9" target="_blank">[9]</a></tt>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a target="_blank"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012794"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a>가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2005년에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진실규명신청을 접수했다. 그 뒤 2009년 12월에 진상조사가 시작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에 대한 간략한 조사 결과<a target="_blank" href="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47366"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a>가 2010년 7월 발표되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05"></span></div><br /> <div id="aline-107">그러나 <a target="_blank"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77519"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99년</a>에 이루어진 입법청원 추진과, <a target="_blank"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82671"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2010년</a>에 추진된 대규모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에 필요한 특별법이 모두 통과되지 않아 부마항쟁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유예되었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 보상법<a target="_blank" h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453359&ctg=1000"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a>이 국회 통과되어 부마항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07"></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8"></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8"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109"><a id="s-8"></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8</a> </span>의의 <a target="_blank" href="#s-8"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8"><div id="aline-110">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부마항쟁은 서슬 퍼런 긴급 조치 시대의 숨 막히는 억압 구조를 뚫고 <a title="4.19혁명" href="/wiki/4.19%ED%98%81%EB%AA%85" class="wiki" target="_blank">4.19혁명</a>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10"></span></div><br /> <div id="aline-112">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strong><a title="4.19 혁명" href="/wiki/4.19%20%ED%98%81%EB%AA%85" class="wiki" target="_blank">4.19 혁명</a>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a title="5.18 광주민주화운동" href="/wiki/5.18%20%EA%B4%91%EC%A3%BC%EB%AF%BC%EC%A3%BC%ED%99%94%EC%9A%B4%EB%8F%99" class="wiki" target="_blank">5.18 광주민주화운동</a>과 <a title="6월 항쟁" href="/wiki/6%EC%9B%94%20%ED%95%AD%EC%9F%81" class="wiki" target="_blank">6월 항쟁</a>으로 이어진다.</strong><span class="line-anchor" id="line-112"></span></div><br /> <div id="aline-114">부마항쟁은 단순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박정희의 유신 정권을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은 당시 전국의 각 대학으로 확산되어갈 조짐을 보이던 유신 말기 반독재 항쟁의 거대한 중심으로 솟아오르면서 정권 내 권력 암투를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a title="10.26 사건" href="/wiki/10.26%20%EC%82%AC%EA%B1%B4" class="wiki" target="_blank">10.26 사건</a>과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114"></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9"></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9"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3 id="line-116"><a id="s-8.1"></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8.1</a> </span>부마항쟁과 10.26 <a target="_blank" href="#s-8.1" class="perma" target="_blank">¶</a></h3> <div id="sc-9"><div id="aline-117"><blockquote class="quote indent quote">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a rel="nofollow" href="/wiki/%EB%82%A8%EB%AF%BC%EC%A0%84" class="nonexistent wiki" title="남민전" target="_blank">남민전</a><tt class="foot"><a title="[[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줄임말. 유신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던 지하반체제 조직이었으나 1979년 초 정권에 모조리 체포되었다." href="#fn10" id="rfn10" target="_blank">[10]</a></tt>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17"></span></blockquote><br /><a title="김재규" href="/wiki/%EA%B9%80%EC%9E%AC%EA%B7%9C" class="wiki" target="_blank">김재규</a>가 10.26 재판에서 증언한 것처럼 이 사건은 유신 체제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직접 이 지역을 방문한 김재규는 이 사건의 처리를 놓고 <a title="차지철" href="/wiki/%EC%B0%A8%EC%A7%80%EC%B2%A0" class="wiki" target="_blank">차지철</a>과 대립, 결국 박정희 살해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19"></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10"></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10"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121"><a id="s-9"></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9</a> </span>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a target="_blank" href="#s-9"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10"><div id="aline-122">부마민주항쟁은 4.19 이후 다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된 민주화 대장정의 분수령임에도 불구 의외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달리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다. 실제로 위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은 드문 편이고,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은 불필요하게 낮은 편이다. 흔히 부산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져 있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흔히 부마민주항쟁은 부마사태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이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22"></span></div><br /> <div id="aline-124">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의 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 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strong><a title="5.18 광주민주화운동" href="/wiki/5.18%20%EA%B4%91%EC%A3%BC%EB%AF%BC%EC%A3%BC%ED%99%94%EC%9A%B4%EB%8F%99" class="wiki" target="_blank">광주에서 대학살이 일어나</a></strong> 민주화를 추구하던 세력은 믿기 어려웠던 대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a rel="nofollow" href="/wiki/%EC%84%9C%EC%9A%B8%EC%97%AD%20%ED%9A%8C%EA%B5%B0" class="nonexistent wiki" title="서울역 회군" target="_blank">서울역 회군</a>)을 가진 것이라는 시각. <span class="line-anchor" id="line-124"></span></div><br /> <div id="aline-126">이는 <strong>박정희는 죽었으되 군사독재가 종결되지 않은</strong> 시기적 사건전개에서 역사적 관심편중의 원인을 찾는 해석이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126"></span></div><br /> <div id="aline-128">이 해석에 따르면 4.19는 이승만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을 물리쳐 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strong>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strong> 의의가 있었음에도,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창궐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28"></span></div><br /> <div id="aline-130">이 외에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이 있다. 부산-경남 지역이 1990년 <a title="3당 합당" href="/wiki/3%EB%8B%B9%20%ED%95%A9%EB%8B%B9" class="wiki" target="_blank">3당 합당</a> 이후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130"></span></div><br /> <div id="aline-132">3당 합당 이후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계승한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그에 대항하는 운동을 <strong>전면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이를 옹호할 수도 없기 때문에</strong>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존재하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전면 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이런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부마민주항쟁이 받는 무관심은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딜레마에 희생된 결과이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32"></span></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11"></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11"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134"><a id="s-10"></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10</a> </span>기념 운동 <a target="_blank" href="#s-10"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11"><div id="aline-135"> <ul> <li>현재 부산에는 민주공원이 있어 부마민주항쟁을 기리고 있다. 문제는 2009년경 보수 단체의 압력을 못 이기고 민주공원 버스 종점 이름을 중앙공원으로 바꿨다는 점. 부산시의 <a title="병크" href="/wiki/%EB%B3%91%ED%81%AC" class="wiki" target="_blank">병크</a>. 다행히 2011년부터는 종점 이름이 중앙공원, 민주공원으로 바뀌었다.<tt class="foot"><a title="중앙공원이 먼저 생겼고 두 공원이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공원 이름을 병기하는 선으로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 href="#fn11" id="rfn11" target="_blank">[11]</a></tt> 그런데 시내버스 LED는 '중앙공원' 으로 나오고, 행선지 스티커의 상당수가 '중앙공원' 만을 표기하고 있다.<tt class="foot"><a title="43번의 도로쪽 측면 스티커와 뒷면 스티커는 '중앙공원,민주공원'으로 되어 있지만, 38번 등 다른 노선의 일부 또는 전체 차량은 '중앙공원' 으로만 되어 있다." href="#fn12" id="rfn12" target="_blank">[12]</a></tt><span class="line-anchor" id="line-135"></span></li> <li>부산대에는 10.16 기념관을 통해 부마민주항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부산대학생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36"></span></li> <li>교향시 여명의 발표를 통해 여러 차원에서 이를 기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37"></span></li> <li>2011년 부마민주항쟁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되었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38"></span></li> <li>2011년 야권통합정당인 <a title="민주통합당" href="/wiki/%EB%AF%BC%EC%A3%BC%ED%86%B5%ED%95%A9%EB%8B%B9" class="wiki" target="_blank">민주통합당</a>에서 강령으로 부마민주항쟁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이는 부산, 경남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이 통합에 참여하면서 된 것으로 보인다. <span class="line-anchor" id="line-139"></span></li> <li>마산(지금 창원)에도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위치는 한국 방송대학교 마산 학습관 옆의 공원(해운동)<span class="line-anchor" id="line-140"></span><br /></li></ul></div></div></div> <div class="section"><a id="sect-12"></a> <div style="float: right" class="sectionEdit"><span class="sep">[</span><span><a target="_blank" href="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action=edit§ion=12" class="external" target="_blank"><span>edit</span></a></span><span class="sep">]</span></div> <h2 id="line-142"><a id="s-11"></a><span class="tocnumber"><a target="_blank" href="#toc" target="_blank">11</a> </span>진상규명 작업<tt class="foot"><a title="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72319" href="#fn13" id="rfn13" target="_blank">[13]</a></tt> <a target="_blank" href="#s-11" class="perma" target="_blank">¶</a></h2> <div id="sc-12"><div id="aline-143"> <ul> <li>처음에는 여야 모두 ‘부마민주항쟁특별법안’이었다. 4·3항쟁이나 5·18민주화운동처럼, 특별법으로 진행되다가 국회 상임위에서 <strong>일반법으로 바뀌었다</strong>.<span class="line-anchor" id="line-143"></span></li> <li>법의 명칭에서 여야 원안에 있었던 <strong>‘진상규명’이 빠지고 결국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strong>'이 됐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44"></span></li> <li>부마민주항쟁의 시간적 범위도 제한적이다. 공간적으로 ‘부산과 마산·창원을 포함한 경남 일원’으로 넓게 규정하면서 시간적으로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로 한정했다. 10월 16일 이전 사전 시위계획을 했다가 실패하고 수배된 사례나 20일 이후 10·26사태 이전에 유사 사례는 포함되지 않는다. 항쟁 당사자인 부산의 김종세 씨는 “10월 15일 부산대에서 주동자들이 유인물을 뿌리고 300여 명을 모았지만 결행하지 못했다. 이런 활동이 있었기에 다음날 시위가 가능했다”며 “기간설정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5·18 특별법’에는 ‘12·12부터 5·18 전후’로 기간을 잡았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45"></span></li> <li>여야 원안의 위원 수 <strong>20명이 15명으로 축소</strong>됐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와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수를 <strong>6명에서 2명으로 크게 줄이고</strong> <strong>대통령의 임명 위원 수를 크게 늘렸다</strong>. 박근혜 대통령이 <strong>누구 딸</strong>인지를 생각하면 영 좋지가 않다. 때문에 중립성 걱정이 나오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참여 폭을 넓히거나 대통령 지명 위원보다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 추천 위원을 포함해야할텐데······.<span class="line-anchor" id="line-146"></span></li> <li><strong>동행명령권도 결국 삭제</strong>됐다.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있었던 동행명령권의 삭제는 당연히 부실한 진상조사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가해자 조사가 부실하게 될 것이며, 피해자의 보상 청구권도 실질적으로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span class="line-anchor" id="line-147"></span><br /></li></ul><del>어디서 많이 본 <a title="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href="/wiki/%EA%B4%91%EC%A3%BC%EB%AF%BC%EC%A3%BC%ED%99%94%EC%9A%B4%EB%8F%99%EC%A7%84%EC%83%81%EC%A1%B0%EC%82%AC%ED%8A%B9%EB%B3%84%EC%9C%84%EC%9B%90%ED%9A%8C" class="wiki" target="_blank">과정</a>인데?</del><span class="line-anchor" id="line-149"></span></div></div></div> <div class="foot"><div class="separator"><tt class="wiki">----</tt></div> <ul> <li id="fn1"><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1" id="fn1" target="_blank">[1]</a></tt> <a title="부산광역시" href="/wiki/%EB%B6%80%EC%82%B0%EA%B4%91%EC%97%AD%EC%8B%9C" class="wiki" target="_blank">부산직할시</a>와 <a title="마산" href="/wiki/%EB%A7%88%EC%82%B0" class="wiki" target="_blank">마산</a>(지금의 <a title="창원시" href="/wiki/%EC%B0%BD%EC%9B%90%EC%8B%9C" class="wiki" target="_blank">창원시</a> <a title="마산합포구" href="/wiki/%EB%A7%88%EC%82%B0%ED%95%A9%ED%8F%AC%EA%B5%AC" class="wiki" target="_blank">마산합포구</a>, <a title="마산회원구" href="/wiki/%EB%A7%88%EC%82%B0%ED%9A%8C%EC%9B%90%EA%B5%AC" class="wiki" target="_blank">마산회원구</a> 일대)</li> <li id="fn2"><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2" id="fn2" target="_blank">[2]</a></tt> 결정적으로 김영삼이 꼬투리가 잡힌 계기는 그 해 9월 경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중 김영삼이 <strong>"미국은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할 것"</strong> 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이를 사대주의적 발상에 의한 국가 모독으로 <del>꼴리는 대로</del> 해석한 것이었다.</li> <li id="fn3"><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3" id="fn3" target="_blank">[3]</a></tt> 이에 관한 <a title="카더라 통신" href="/wiki/%EC%B9%B4%EB%8D%94%EB%9D%BC%20%ED%86%B5%EC%8B%A0" class="wiki" target="_blank">카더라 통신</a> 일화가 있다. 당시 대학 내에서 시위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도 부산대학교에서는 잠잠한 모습을 보이자 이화여대에서 뭔가를 부쳐왔단다. 여대에서 보낸 물건에 기대하면서 포장을 뜯어보니 <a title="고추" href="/wiki/%EA%B3%A0%EC%B6%94" class="wiki" target="_blank">고추</a>와 <a title="가위" href="/wiki/%EA%B0%80%EC%9C%84" class="wiki" target="_blank">가위</a>가 들어있었다(=<strong>니들이 남자 맞냐? 차라리 (<a title="고자되기" href="/wiki/%EA%B3%A0%EC%9E%90%EB%90%98%EA%B8%B0" class="wiki" target="_blank">이보시오! 안 돼!</a>) 하지?</strong>). 이에 어이가 상실한 부산대가 발끈하여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a title="카더라" href="/wiki/%EC%B9%B4%EB%8D%94%EB%9D%BC" class="wiki" target="_blank">카더라</a>. 그런데 이런 소문은 사실 굉장히 광범위하게 많아서... 부산대에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니까... 일설에 따르면 이대가 고대에게 가위를 보냈다, 서울대에 보냈다, 연대에 보냈다 등등 여러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게다가 시대 상황까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6.3 항쟁,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신 반대, 부마 항쟁, 5.3 인천 사태 등등...</li> <li id="fn4"><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4" id="fn4" target="_blank">[4]</a></tt> <a target="_blank" h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1.html" class="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1.html</a></li> <li id="fn5"><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5" id="fn5" target="_blank">[5]</a></tt> <a target="_blank" h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2.html" class="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2.html</a></li> <li id="fn6"><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6" id="fn6" target="_blank">[6]</a></tt> <a target="_blank" h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3.html" class="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0/200711100500005/200711100500005_3.html</a></li> <li id="fn7"><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7" id="fn7" target="_blank">[7]</a></tt> 출처: <a target="_blank" href="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400&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class="named 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진실화해</a>보고서에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431쪽</li> <li id="fn8"><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8" id="fn8" target="_blank">[8]</a></tt> 김영삼 정권 때 교육문화<a title="수석비서관" href="/wiki/%EC%88%98%EC%84%9D%EB%B9%84%EC%84%9C%EA%B4%80" class="wiki" target="_blank">수석비서관</a>을 지냈다.</li> <li id="fn9"><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9" id="fn9" target="_blank">[9]</a></tt> 한편 이 조사 결과에 대해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법률에 규정된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고 주장했다.</li> <li id="fn10"><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10" id="fn10" target="_blank">[10]</a></tt> <a rel="nofollow" href="/wiki/%EB%82%A8%EC%A1%B0%EC%84%A0%EB%AF%BC%EC%A1%B1%ED%95%B4%EB%B0%A9%EC%A0%84%EC%84%A0" class="nonexistent wiki" title="남조선민족해방전선" target="_blank">남조선민족해방전선</a>의 줄임말. 유신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던 지하반체제 조직이었으나 1979년 초 정권에 모조리 체포되었다.</li> <li id="fn11"><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11" id="fn11" target="_blank">[11]</a></tt> 중앙공원이 먼저 생겼고 두 공원이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공원 이름을 병기하는 선으로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li> <li id="fn12"><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12" id="fn12" target="_blank">[12]</a></tt> 43번의 도로쪽 측면 스티커와 뒷면 스티커는 '중앙공원,민주공원'으로 되어 있지만, 38번 등 다른 노선의 일부 또는 전체 차량은 '중앙공원' 으로만 되어 있다.</li> <li id="fn13"><tt class="foot"><a target="_blank" href="#rfn13" id="fn13" target="_blank">[13]</a></tt> <a target="_blank" href="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72319" class="external externalLink" target="_blank">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72319</a></li></ul> <div><br /></div> <div>출처- 엔하위키 부마민주항쟁 항목</div> <div>http://mirror.enha.kr/wiki/%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div>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푸르딩딩:추천수 3이상 댓글은 배경색이 바뀝니다.
    (단,비공감수가 추천수의 1/3 초과시 해당없음)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99
    가성비 짱짱인 290 +_+ [1] 오니쯔 14/10/14 12:26 147 0
    198
    피파에서 선수만들고 난다음 웃는모습보면 [1] 오니쯔 14/09/29 17:59 126 1
    197
    요즘 밤에 창문열어놓으니 춥더군요 [2] 오니쯔 14/09/26 08:37 57 0
    196
    피파15 3시간 플레이 소감 오니쯔 14/09/26 07:50 107 3
    195
    왜 컴게에서는 그래픽 카드 추천할때 290레퍼에 대해서는 소극적인가요? [9] 오니쯔 14/09/17 13:50 100 1
    193
    갤노트 8.0 킷캣 업데이트가 OTA로 떠서 좋구나 하고 업데이트 했는데 오니쯔 14/09/03 11:22 25 1
    192
    이거 하나 있으면 레이싱 게임할려고 트리플 모니터 구축할 필요 없겠네요 [1] 오니쯔 14/08/25 13:39 175 6
    191
    차량이 사고가 난게 아니라 이상없는 상태에서 궁금한게 있다면 오니쯔 14/07/18 07:26 75 0
    190
    게임에서도 현실과 같이 한결 같은 선수 [1] 오니쯔 14/07/14 10:21 158 2
    189
    차량 선택에 고민하시는 분들 [3] 오니쯔 14/07/10 07:28 169 1
    188
    이걸여기다 올려야하는지 애매하지만 오니쯔 14/07/07 12:26 103 0
    187
    메로나 녹여먹는거 좋아하시는 분 있나요? [2] 오니쯔 14/07/02 14:22 92 0
    186
    우리나라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오니쯔 14/06/26 17:00 56 0
    185
    저는 이제부터 국대를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오니쯔 14/06/13 19:14 39 0
    184
    피파15 PC판도 이그나이트 엔진!!!!! [5] 오니쯔 14/06/11 18:57 113 1
    183
    부산사시는 분중에 오늘 저녁에 나 [5] 오니쯔 14/06/11 14:08 48 2
    182
    운전면허시험 경험담 풀어봅니다 +_+ [5] 오니쯔 14/05/27 22:56 38 3
    181
    6.4 투표전에 각 후보들 공약은 꼭 확인하세요~~ 오니쯔 14/05/27 08:27 50 2
    180
    신호대기시 중립 신경 안써도 되는 차들도 있습니다. [7] 오니쯔 14/05/26 00:51 137 1
    179
    다른건 모르겠지만 이것하나는 확실한거같아요 오니쯔 14/05/23 13:06 63 0
    부마민주화항쟁을 아시나요?? 오니쯔 14/05/19 07:58 72 0
    177
    지금 다음 네이버 상태가 왜이런거죠??? [3] 오니쯔 14/05/18 12:23 220 0
    176
    투싼 연료전지차량 연비관련 글 어디갔나요?? [2] 오니쯔 14/05/14 02:24 40 0
    175
    2013년식 SM3 RE 오너입니다. 질문받습니다 [17] 오니쯔 14/05/08 15:45 121 1
    174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 소감 오니쯔 14/05/07 00:19 20 2
    173
    80년대생이라서 행복합니다 [4] 오니쯔 14/04/10 11:46 96 3
    172
    현대기아차의 어메이징한점 [4] 오니쯔 14/04/04 07:29 409 7
    171
    가격제한없이 짜는 최소비용의 컴퓨터라면 이전도는 [12] 오니쯔 14/04/01 15:33 112 0
    170
    본격 운전연습게임_City Car Driving 오니쯔 14/03/31 23:09 77 0
    [1] [2] [3] [4] [5] [6] [7] [8] [9] [10]
    단축키 운영진에게 바란다(삭제요청/제안) 운영게 게시판신청 자료창고 보류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모바일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