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r></p><p><span style="font-size: 12pt;">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 cogito ergo sum - 는 기본적으로 방법론적 회의를 전제한다. 내가 느끼고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사실 100%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다. - 과학의 기본적인 전제,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이 믿음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은 조작의 여지가 있으며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 이러한 의심을 전혀 할 여지가 없는 것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의심하는 패기를 보였다. - 내가 지금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가? - 비록, 내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의심의 여지는 남아 있다. 어떤 원통형의 수조 안에 우리의 뇌가 담겨있고, 그 뇌에 전기 충격을 가해 우리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고 느끼게 조작하는 것이라면 어떠한가?</span></p><p><br></p><p><span style="font-size: 12pt;">일견 공상적으로 보이는 이 '방법론적 회의'는 때로는 매우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일베가 보이는 도착증적 팩트에의 집착은 일견 이런 방법론적 회의의 일환으로 보인다. - 좌익들의 그것은 언제나 믿을 수 없다. 언제나 조작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의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바로 실재를 볼 수 있는 주체다. - 이러한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히 의심과 회의가 담겨있으며, 그들 망상의 가장 기본 전제 - 한국 사회가 좌경화되었다는 환상에 의거해 자신들이 믿고 보고 듣는 것들이 전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은 담론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부분을 실제로 확인하였고 - 광우병 파동 당시, 그 담론 이면에 조작되고 과장된 이미지를 그들은 포착해내지 않았던가? - 그러한 행동들은 그들의 망상을 어느정도 뒷받침 해주었다. 분명 이들은 정말이지 '급진적인' 회의감을 품고 있다는데에 있어서 데카르트적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r></span></p><p><span style="font-size: 12pt; line-height: 1.8;">그러나 이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냉소다. 이들은 명백히 '모든 것을 비웃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쿨한 것인 양, 이들은 담론의 모든 부분을 비웃고 냉소한다. 이것이 이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냉소주의자들은 - 그것이 비록 어떤 긍정적인 면, 예컨대 기존 질서에 대해 냉소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정치적 포지션을 낳는다는 점이 있을지라도 - 근본적으로 대안을 창출해낼 수는 없다. 또 하나의 함정은 이렇게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 결과, 다시 말하면 극단적인 현실을 지각하게 된 결과, 환상을 믿어버린다는 점이다. 현실의 극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혼란의 상태에 빠지게 한다. - 이러한 혼란은 종종 인간으로 하여금 그 혼란 상태 자체를 '조화로운 것'으로 믿어버리는 환상을 낳는다. 이들에게 국가와 법은 언제나 조화롭고 선하며, 또한 여기에 대한 비판은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냉소가 만든 환상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r></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span style="font-size: 12pt;">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가지는 한계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유용한 도구를 제공했을지라도 그것이 자가당착적이라는 데에서 비롯한다. 절대적 확신만이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해준다면, '절대적 확신만이 믿음을 뒷받침해줄 수 있다'라는 명제 자체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기본적으로 자기 회의와 부정의 과정이다. 일베는 결코 자신들의 기본적인 믿음 - 팩트만이 실재다! - 자체를 회의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회의론은 좌익에 대해서는 무서운 급진성을 발휘하지만 자신들의 도구 - 국가, 법치, 나아가 '북한'으로 표상되는 외부의 악마적 존재와 그에 대한 기술적 대응(통상 일베는 이것을 '종북'이라고 지칭한다.</span><span style="font-size: 12pt;">), 자신들의 모든 이데올로기 - 앞에 서면 그 회의는 에포케(판단중지</span><span style="font-size: 12pt;">)에 들어가게 된다. 그 모든 회의론은 - 엄밀히 말하자면 - 사실 그들의 정치적 요구 - 즉, 자신들의 존재론적,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요구의 일환인 것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br></span></p><p><span style="font-size: 12pt; line-height: 1.8;">소크라테스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모르는데 남에게 어떻게 지식을 가르쳐 주며,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는가? 난 이걸 좀 다르게 해석해보고 싶다. "너 자신을 회의하라." 일베는 자기 자신을 회의할 수 있는가? 그들의 그 모든 회의와 의심의 칼날을 자기 자신을 향해 돌릴 수 있는가? 많은 면에서 그들은 여전히 방어적이며, 심지어 그러한 정신적 빈곤함은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사이버 테러리즘과 탈레반스러운 행동들을 양산해내는 근원이라고 보여진다.</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