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강혜란] "아이고, 강화백이라고 부르지마세요. 늙다리처럼 들리잖아요."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투실한 얼굴의 30대 남자가 손사래를 친다. 2억대 페이지뷰('미디어다음' 연재 장편 5편 누적 PV)의 인터넷 만화가 강풀(33. 본명 강도영)씨. 지난달 26일 파주 헤이리 신혼살림집을 찾았을 때, 호젓한 아파트엔 애완고양이 '고돌이'가 한가로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가족은 나의 힘…신작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
"3년 사귄 학교 후배와 지난해 11월에 결혼했어요. 의지가 돼서 좋긴 한데, 가장이 되니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커지네요."
공교롭게도 결혼 후 첫 작품도 사랑과 가족에 관한 얘기다. 다음달 10일부터 미디어다음에 연재될 '순정만화 시즌 3: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3년 10월 첫선을 보인 '순정만화', 2004년 11월 '순정만화 2: 바보'에 이은 연작물 3탄이다. 그의 출세작 '순정만화'를 TV 외화처럼 '시즌제'로 이어가는 것이다.
미디어다음에 올린 예고편에 따르면 "살만큼 살았고, 알만큼 알고 있는 분들" 즉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다.
"분가 전에 3년 정도 할머니(93)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노인이라고 사랑 못하는 법 있나, 또다른 사랑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주차장 관리인 할아버지, 파지 줍는 할머니 등 10명 안팎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정만화 시즌 3'은 30화 정도 예정돼 있다. 스토리 얼개는 이미 머리 속에 있지만 디테일을 끝내기 위해 당분간 청평 콘도에서 '칩거'할 계획이다.
강풀은 보기 드물게 인터넷만화로 생계를 유지하는 복 많은 만화가다. 지금까지 낸 장편만화 5편(순정만화.아파트.바보.타이밍.26년)이 모두 영화화됐거나 영화화 과정에 있다. 미디어다음 연재원고료, 출간된 책 인세, 영화 판권과 모바일 인세 등 그의 수입구조는 꽤 다각화된 편. 이러한 성공은 그의 인터넷만화가 폭넓은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최근작 '26년'(6720만 PV)을 포함, 장편 5편의 누적 PV는 2억3800만에 이른다. 네티즌을 통해 흥행성을 검증받은 원작을 출판.영화계로 팔고, 그로 인한 수입 덕에 창작에만 몰두하는 선순환 구조다.
장편 5편 누적 PV 2억3800만, 모두 영화 판권 팔린 스타작가
그가 생각하는 인기의 비결은 뭘까. "대중성이죠. 전 철저하게 대중 상업만화가예요. 보통 소시민이니까 시대의 보편성과 호흡할 수 있는거죠." 실제로 예술영화는 질색이고,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터미네이터 2'란다. TV를 볼 겨를이 많지 않지만 '무한도전' 'VJ 특공대' '무릎팍도사' 'MBC 9시 뉴스'는 빠짐없이 챙겨본다. 특히 무한도전 광팬. "자기들끼리 놀면서 그렇게 웃긴 프로 첨 봐요. 다들 '또라이' 같은 게 제 친구들 보는 것 같아요."
작품 스토리는 말 그대로 '살면서 생각나는 것들'이다. 대부분 1 ̄2년 정도 묵혔다가 작품으로 다듬어낸다. 미디어다음에 예고한 차기작이 무려 네편. 스스로 "정말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한다"고 말할 정도로 창작정신이 투철하다. 연재 중엔 잠을 서너시간밖에 못 자고, 끼니는 짬날 때 챙겨먹는다. 그 좋아하던 술도 거의 끊었다. "만화 그리는 게 취미이자 직업이자 낙이에요. 하루 1시간 헬스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고요."
혹자는 그가 우연히 인터넷으로 떴다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은 철저한 '자구 마케팅'이었다. "만화는 그리고 싶은데 내보내줄만한 매체가 없잖아요. 스스로 광고하려고 홈페이지에 옴니버스 단편들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면서 대박이 났죠."
'순정만화'를 필두로 한 장편 5편 모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담은 최근작 '26년'은 각별하다. 94학번으로 입학, 학생회 활동을 했던 '청년 강도영'의 사회적 채무감이 녹아난 작품이기 때문. "'29만원밖에 없다'는 전두환씨 말을 듣고 3년전부터 구상했어요. 5.18을 정면으로 다루되, 사람들이 많이 읽게끔 재밌게 그리고 싶었어요."
'노빠 만화가' 딱지에 곤욕, "앞으론 작품으로만 이야기하겠다"
광주에 수차례 내려가 당시 시민군 생존자를 만나는 등 기초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탄생한 '26년'은 5.18 당시 계엄군으로서 시민군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려온 대기업 회장이 시민군의 자녀인 경찰관.건달.조각가.사격선수 등과 함께 당시 최고책임자의 단죄를 시도하는 내용.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하다보니 논란이 되기도 했다. 12만여건의 댓글은 대체로 "감동적인 만화"라는 평가지만 "폭력을 미화했다" "역사에 대한 또다른 단순이분법적 해석"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이에 대해 작가의 입장은 분명했다. "제 작품의 시각에 독자가 일방적으로 영향받는다고 생각지 않아요. 인터넷의 '열린 광장'에 작품으로써 제 의견을 털어놓을 뿐이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줬으면 해요."
최근 합천공원에 '일해공원' 명칭을 붙이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그의 입장을 묻는 인터뷰가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의 배경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탄핵반대 릴레이카툰'을 주도하면서 홍역을 치른 경험이 깔려 있다. 당시 그에겐 '노빠 만화가'라는 딱지가 붙었고, 그것은 만화가 강풀에게 족쇄가 됐다. "제 모든 작품을 그런 '코드'로 걸러 보는 게 힘들더라고요. 전두환씨나 우리 현대사에 대해선 '26년'에서 할말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뜨겁게 살면서 지켜야 할 게 있다고 믿는다"는 이 만화가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노무현 정부나 2007년 대선에 대한 입장도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은 앞으로 작품으로 말하겠다"고 말했다. 밥벌이이자 세상과의 소통기구이자 때때로 싸움의 무기가 되는 '만화'를 통해서 말이다.
글.촬영 강혜란 기자 ▶강혜란 기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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