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외로움
한통의 편지를 받고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 보는 아침이였습니다.
인간이 300년만 살 수 있다면 제 삶의 태도는 또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천 년을 살 수 있다면 나의 삶의 태도는 또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100년 미만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런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것에 관한 고민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분들에게 염려를 끼쳐 드린 부분도 없지 않아 많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것들에 대한 미안함 보다는 제 삶의 무게가 더욱 무겁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원칙과 잣대들은
분명 그 나름의 이유와 타당성이 있겠지만, 그것이 또다시 개인의 삶에 적용이 될 때
그것이 꼭 진리라는 보장도 없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인연과 이별이나 죽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며,
그 뒤로 찾아드는 그리움과 외로움은 허덕이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늪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써 잊으려 새로운 뭔가를 찾으려 합니다.
문제는 그 새로운 것이 어떤 것인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방황은 한 번쯤 재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혹 감상을 통한 자기부정, 그 자기 부정을 통한 세상에서의 도피, 뭐 그런 것.
우리가 외롭다는 것은 삶에 열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어느 분에게도 말했지만
살아가는 동안 혼자있음을 외로움으로 내버려 두느냐,
또는 고독으로 인도하도록 허용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간혹 외로움과 고독은 같은 말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으나 사실은 틀립니다.
외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고독은 내부에서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고독은 평화스러운 일입니다.
혼자(외로움) 있음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남에게 매달리게 하고,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존재의 독특성을 존경하게 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내게 합니다.
인간은 모두 본질적으로 외롭지만, 그러나 삶에 대한 열정으로 들떠 있는 사람은
그러한 단어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법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독을 즐깁니다.
칼도 연필을 깎을 땐 유용한 도구이지만 사람을 죽일 땐 흉기가 되듯이,
이러한 우리의 공간도 이용하기에 따라선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도구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해보지 않고
이런저런 흉기에의 가능성만을 털어놓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이별이나, 죽음이 물론 갑작스런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소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더라도 삶에 있어서의 변화란 어쩔 수 없는 조건이 아닐련지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각자의 삶의 몫이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청소년 시절, 뒤늦은 출발, 나의 능력에 대한 회의 등으로 고민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은 나의 큰 위로였습니다.
달란트 비유라든가, 큰 그릇보다는 깨끗한 그릇을 원하신다는 말씀 등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혹자는 그것이 약자를 위한 위로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짜피 모든 언어는 오해를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비난을 논리적으로 방어하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도로 나에게 그러한 위로라도 해준 이가 있었던가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삶의 몫은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 무렵입니다.
지금도 삶의 자세에 있어 그 이상의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그 단어도 약자의 스스로를 위한 변명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묵묵히 우리 길을 갈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 인생이 힘들 때 나는 나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것도 개인적인 이윤을 위해서가 아닌, 공의를 위해 몸을 바쳤던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힘이 솟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불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힘을 얻곤 합니다.
삶의 힘겨움에 방황하는 것...이해합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으니...
하지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by 초산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