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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를 처음 접한 것은 고3때였다.
당시에 난 처음으로 맞게 된 인생의 시련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늘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상태였다. 아직까지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가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내 고3 시절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간 그러던 어느날 인터넷을 떠돌다 "오늘의 유머" 사이트를 발견했고 그 힘든 생활에 소소한 재미를 발견했다.
일단 처음에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만 가끔 들어가 둘러보는 수준이었다. 매일매일 야자가 끝나 집에 들어가 유머 게시글 몇개로 하루를 달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베스트 게시판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결국 거의 모든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덧글을 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실로 빠른 변화였다. 그렇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오유 폐인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난 결국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교 때 시작했던 오유를 끊지는 못했고 언제나 시간이 날 때마다 오유를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이미 내 인생에 벌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린 오유 사이트에 대해서 기억나는 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에피소드를 한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부족한 글 실력이라 재밌을지는 모르겠다.
이 에피소드의 등장인물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설명을 해보자면 제일 처음에 '나'가 있다. 뭐, 당연하겠지만 이건 내 이야기니까. 그리고 두번째 등장인물로는 우리 과에 들어온 어떤 여자 후배가 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이 여자 후배와 내가 나눴던 대화의 일부분이다.
흠, 일단 등장인물을 소개했으니 그 등장인물에 대해 묘사하는 차례일 것이다.
일단 나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체격에, 평범한 성격에, 평범한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다. 더 이상 나를 잘 묘사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알지 못하니 여기까지 하겠다. 글 실력이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혔으니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인 그녀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과 후배이고....... 많이 착한 애다. 솔직히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 묘사하는데에는 좀 어려움을 느낀다. 학기 초에는 그저 어려보이는 대학 신입생의 모습이었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그런 신입생. 그런데 어느새 화장법이라도 배웠는지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고, 살도 빼서 제법 날씬해져서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고 있다. 이게 고작 한 학기 사이의 변화다. 그래서 지금 난 어느 쪽의 모습을 묘사해야 되는건지 모르겠고 그렇기에 그녀의 외모를 묘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 아까의 부족한 묘상에 조금만 살을 덧붙이자면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술도 무지하게 못하는 주제에 꼭 술자리에 따라나선다. 그 애의 동기들한테 물어보니 동기들 술자리에는 거의 참석도 안 한다는데. 이상하게 난 거의 모든 술자리에 그녀를 보았다. 선배들 술자리에만 따라다니는 건가 싶은데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하여간 그래놓고서는 곧 얼굴이 빨개져서 헤롱헤롱 거리며 선배들한테 집에 바래다달라고 징징거린다. 보통 집이 가까운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또 정작 술집 밖으로 나가면 말짱하게 잘 걸어간다. 도대체 이건 뭔가 싶은데 가끔은 선배들한테 술 약한 척하는구나 싶어서 귀엽기도 하다.
어쨋건 이 에피소드도 술집에서 나와 그녀를 바래다주면 했던 대화 중 일부이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약간 쌀쌀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난 먼저 술집에서 나와서 우산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는 우산도 없는데 따라나와서 어쩔 수 없이 그 날을 집앞까지 데려다주어야 했다. 잠시 그녀를 기다리는 사이에 난 평소처럼 핸드폰을 꺼내 오유에 접속했다. 일단 베오베부터 시작해 뭐 새로운 글이 올라왔나 뒤적여보고 있었다.
"오빠, 뭐하고 있었어요?"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그녀가 빤히 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왔으면 나왔다고 얘기라도 하지. 난 바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놓고 우산을 씌워줬다.
"그냥 뭐, 오유나 하고 있었는데?"
"오유요?"
"그러니까 오늘의 유머라는 사이트인데. 혹시 알아?"
"아, 네! 그거 알아요. 오유 예전에 들어본 적 있어요. 그 '안생겨요'를 인사 대신 쓰는 곳이잖아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 사실이긴 하다.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단순히 그렇게 말하면 왠지 상대한테 저주를 퍼붙는걸 일상적으로 하는 곳 같잖아.
"오빠는 오유 자주 해요? 평소 때에도 자주 핸드폰 들여다보고 있던데."
"응, 뭐 거의 매일"
"거기 좀 정치적인 사이트 아니에요? 심하게 진보적이라구 인터넷에서 말이 많던데, 오빠는 그래서 하는 거에요? 저도 몇 번 들어가본 적이 있는데 약간 그래보이던데"
"너 혹시 일베하니?"
"네? 일베가 뭔데요?"
그래, 분명 이 말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괜히 위험할 뻔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직접 들어가봤는데도 오유가 진보 사이트라고 생각해?"
"어라? 아니에요?"
난 그 순간 한 명의 오유인으로서 내가 서식하는 오늘의 유머에 씌워진 오해를 푸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 되었다. 오해는 편견을 낳고, 편견은 고정관념을 낳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아직 1학년이라고 해도 우리 과 특성상 어느 정도 철학적 개념 정리는 필요해보였다.
"나는 말이야. 오유만큼 보수적인 사이트를 본 적이 없어."
"보수적이라고요?"
"너 아까 오유가 진보적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진보주의가 뭐라고 생각해?"
"그.... 그야 뭐 그런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모두 평등해야한다고 주장하고 행동하는 사상?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회사랑 노조랑 싸우면 노조의 편을 들어주고 무상급식 같은 복지 제도를 만들려고 하는 것들요."
"흠, 정확히 말해서 틀렸어. 진보주의의 정확한 뜻은 인류의 역사가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상이야. 쉽게 말해서 세상이 좀 더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공유하고 그 역사의 흐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먼저 전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진보적인 사람들이구. 그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의 유토피아의 도래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아. 왜냐면 세상이 점점 좋게 발전해간다면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는 최고의 상태가 오지 않겠어?"
"아......"
"그럼 너가 진보주의의 반대라고 생각하는 보수주의는 뭘까?"
참 유치한 문답놀이였지만 나는 이 방법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 산파술 같은 고급스러운 방법을 쓰기에는 나 역시 많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우산 안에서 웃고 있었다.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믿음인가요?"
"그 대답은 약간 애매한데..... 좀 달라. 그러니까 보수주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지켜야 할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상이야. 쉽게 말해서 오래된 것이라고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거지.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전통들을 수호하는게 보수주의자들의 목표이고."
"오유가 그런데 그렇다고요?"
"응. 한번 예를 들어볼께. 일단 나 같은 자유주의자들, 리버럴들이 생각하기에는 최대한 인간은 자유로워야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나 한명에게 밖에 없어.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래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세금을 줄여야한다고 말해."
"어? 그건 보수적인 주장 아니에요?"
"아니야.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데 자유주의랑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달라. 대표적으로 만약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총을 들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생각해봐. 흔히 말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지. 그럼 자유주의자랑 보수주의자는 각각 어떻게 말할까?"
"어..... 자유주의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겠고, 보수주의자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 같아요."
"응.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지켜야하는 가치, 즉 '애국'이라는 가치를 그 사람은 배신한거거든. 그렇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그 것에 분노하는거지."
"너무 예시가 극단적인거 아니에요?"
"그럼 다른 문제를 생각해보자. 매일 잠자리 상대를 바꾸면서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고 쳐. 그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관계를 맺고 심지어 가끔은 상대가 한명이 아니라 그 이상일 때도 있어. 그런 사람에 대해서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싫어하겠죠."
"응. 그렇겠지.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달라. 자유주의자들이 워낙 다양하긴 하지만 최소한 서로 합의하는 부분이 있어. 바로 적어도 자기 몸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거야.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이 무엇을 잘 못 했지?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사했을 뿐이잖아."
"어........"
"내가 오유를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거야. 한번 오유에서 순결 문제에 대해서 물어봐바. 어떤 대답이 나올까? 혹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문신, 성형에 대해 물어봐도 되고. 모두 아주 개인적인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문제인데도 그들은 부정적으로 볼꺼야. 왜냐면 최소한의 지켜야하는 가치들인 '순결'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 같은 것을 지켜야만 하니까."
그녀는 혼란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
이유는 예상은 간다. 자신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니까. 이 나라 국민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하지만요. 오유에서 동성애는 보통 지지를 받잖아요. 전통적인 가치에 따르면 이럴 수는 없는거 아닌가요?"
"먼저 언제부터 전통적인 가치에서 동성애가 배제적이었는지부터 따지고 싶지만 넘어가구. 동성애 문제는 그런게 아니야. 단순히 행동을 통해서 그 성향을 확인해서는 안돼. 그 이유를 들어봐야지. 오유에서 동성애 문제가 포섭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치야. 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드려야한다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동성애는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지지하는게 아니라구. 겉으로 보기에는 오유인들 대부분이 그런 논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라. 만약 그렇다면 난교나 SM 플레이 같은 흔히 말하는 변태적 성행위에 대해서도 똑같이 개인의 자유 문제이기 때문에 지지해야지."
"응? 아니, 어떻게 동성애와 그런 것들을 같은 묶음에 넣을 수 있어요?"
"그럼 그 사이의 차이점은 뭔데. 당연하잖아. 아까도 말했듯이 전통적 가치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 때문이라구. 오유인들이 안생겨요 안생겨요 하지만 모두 사랑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야."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진짜 얘도 대단하기는 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재미 없는 얘기를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주다니.
"아까 너가 무상급식 얘기를 했었잖아. 그렇기 때문에 오유는 진보적이라고 했었나? 하여간 물론 진보주의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들도 무상급식을 지지해. 그들은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사회가 나눠갖어야 한다는 사람들이니까."
"그것도 행동이 아니라 그 이유를 들어봐야하나요?"
"응. 맞아. 보수주의자인 오유인들도 무상급식을 지지해. 왜냐면 굉장히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가 있잖아. '적어도 내 아들딸과 그 친구들이 밥은 먹고 학교 다녀야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복지는 본래 굉장히 보수적인 정책이야. 어쨋건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게 오유인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는 되지 못하지"
"흠...... 이것도 특별한 차이가 있어요?"
"대표적으로 범죄자 처우 문제. 사회주의자들은 범죄자가 저지른 범죄의 책임도 사회가 나눠 짊어져야한다고 생각해. 왜냐면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도 문제가 있다는거지. 인터넷에서 가끔 봤지? 북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삐까번쩍한 교도소 모습."
"네. 진짜 호텔급이던데."
"사회주의자들한테 범죄자들한테 필요한건 처벌이 아니라 교화이니까. 하지만 한번 오유에서 범죄자 처우 문제에 대한 글 몇개만 읽어볼래? 거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나올꺼야. 다시 말하지만 오유인들은 보수주의자들 맞아. 가끔 그 모습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상식적이게 보이기 때문에 내가 오유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난 가볍게 웃었다.
어느새 나와 그녀는 비가 내리는 사이에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좀 먼 거리인데 신나게 떠드느라 시간이 흐르는지도 몰랐었다. 평소에는 내가 좀 돌아가야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바래다주는 일 없었는데, 그 날은 나 밖에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이제 들어갈께요."
"응. 그래"
그녀는 나한테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더니 쪼로로 달려들어갔다.
아..... 괜히 오유에 대해서 얘기했나. 다시 한번 내가 한 얘기들 확인하러 접속하면 우리 과에 오유 폐인이 두명이나 생겨버릴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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