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div style="text-align:left;">펌</div> <div style="text-align:left;">----</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2056120orgFMkntYyVBMpHtR7qzQcJQnZW.png" width="720" height="453" alt="캡처.PNG" style="border:none;"></div><br></div> <div><br></div>제가 3군단에서 군복무 시절, 유해발굴을 몇 달해서 그런지, 현충일이나 6.25 때 면<br>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1만 9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해<br>3군단 자체가 전멸해버린 현리전투의 전사자분들이 떠오릅니다<br><br> 현리의 왠만한 산에서는 조금만 삽을 푸면 각종 6.25 물품이 나올 정도로 희생이 컸던 전투입니다.<br><br>유재흥이라는 당시 우리말도 못하던 친일파가 자기 휘하의 장병들을 뒤로 하고 파렴치한 도주를 했죠...<br>박정희 일본육사 3년 선배라 그런가..죽을 때까지 국방부장관, 태국/이탈리아/스웨덴 대사를 하는 등<br>91세까지 잘먹고 잘살았던 인간이라 더 슬픕니다.<br><br>출처 : <a target="_blank" href="http://top-dog.tistory.com/268" target="_blank">http://top-dog.tistory.com/268</a><br> -----------------------------------------<br><p style="margin:0px;"></p>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2056107oSsCl7AtsGFbjXaaj7H7U7FlUSZ4NkEk.jpg" width="480" height="230" alt="1335913020252_1.jpg" style="border:none;"></div><br><p></p><br>앉아있는 사람이 유재흥.<br><br><br>지금부터 쓰는 글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인 현리전투의 이야기<br><br>자세한 작전상황은 밀덕(밀리터리 덕후)이 아닌 이상엔 의미없을테니 간략하게 쓰겠음<br><br><br>3군단은 1950년 10월에 창설되었음. 주로 후방작전을 담당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이후<br><br>최전선에 투입되어 중동부 방어선을 담당하게됨<br><br><br><br>사건은 강원도 현리에서 벌어짐. 현리는 국군 3군단이 방어하는 거점이었으며 좌측에는 미군 10군단<br><br>우측에는 국군 1군단이 방어전선을 구성하고 있었음<br><br>중공군은 현리에 주둔중인 3군단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수립하고 공격을 감행<br><br><br><br>당시 3군단의 보급로는 오마치 고개라는 작은 통로하나뿐이었는데 3군단장 유재흥은<br><br>그곳에 일부 병력은 배치했으나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중공군은 밤사이에 산악지형을<br><br>30키로나 돌파해서 오마치고개를 점령해버림. <br><br>당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병력은 달랑 중공군 1개중대 백여명.<br><br>포위당한 3군단은 총병력 2만 2천명. <br><br><br>하지만 포위당했다는 공포에 휩싸인 군단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경비행기를 타고 1등으로 도주해버렸고<br><br>지휘관을 잃은 부대는 고위 장교들부터 차례로 겁에질려 계급장을 떼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도망침.<br><br>군단의 지휘체계는 순식간에 공중분해.<br><br>병사들은 아무런 지휘를 받지 못한 상태로 처절하게 패주.<br><br><br>중공군의 추격으로 70킬로미터 이상 밀려나고나서 미군이 급히 구원부대를 파견해 겨우 정신을 차린 국군은<br><br>병력의 절반이상 장비의 대부분을 잃게되었고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됨<br><br><br><br> 미군 총사령관 밴플리트가 이후 유재흥을 만나 물어봄<br><br>밴: 자네의 부대는 어디있는가?<br><br>유: 잘 모르겠습니다.<br><br>밴: 당신 예하 사단들은 어디간거야. 모든 포와 장비는 상실한건가?<br><br>유: 그런거 같습니다.<br><br>밴: 당신의 군단을 해체한다. 다른 일자리나 알아봐<br><br><br><br> 지휘관 유재흥 약력<br><br>대표적인 친일파 일본군 출신 장교. 미군에 의해 해방이후 국군장교로 발탁<br><br><br>의정부에서 패배로 2사단 해체<br><br>- 6.25 발발 직후 바로 옆지역 1사단이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인민군의 T-34 탱크에 맞서 <br><br>대전차 무기 하나없이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피를 쏟으며 기적에 가까운 방어를 해내며 버텼으나 <br><br>유재흥이 담당한 2사단이 순식간에 공중분해 당하면서 곧바로 방어선이 뚫렸고 이로인해<br><br>서울이 그대로 점령당하고 전쟁초반에 저항할 수 있는 시간, 공간적 여유를 날려버림.<br><br>결국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림. <br><br><br><br>중부전선에서 패배로 2군단 해체<br><br>-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UN 군과 국군이 북진하여 북한을 완전히 점령하기 직전의 상황에서<br><br>대규모의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투입되었고 대부분의 부대가 기습에도 불구하고 각부대의 <br><br>영웅적인 저항 ( 예를들면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 에 힘입어 단번에 망가지지 않고 버틴 상황에서<br><br>유재흥의 2 군단이 곧바로 공중분해<br><br><br>뚫린 방어선으로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전면적인 전선붕괴로 1. 4 후퇴 시작<br><br>결국 사라진 2군단의 지역을 터키군 1개 여단( 군단의 10 분의 1병력 ) 이 대신 틀어막고 버틴덕에<br><br>겨우 완전 포위를 면하고 UN 군은 후퇴함. 하지만 역시 서울을 다시 빼앗김.<br><br><br><br>현리전투에서 패배로 3군단 해체<br><br>- 휴전선 부근에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 전쟁후반부에 군단장이 단 백수십명의 적군에게 겁에질려<br><br>부대를 버리고 도주. 군단은 결국 전멸당했고 다시한번 방어선에 대규모 구멍이 남.<br><br>이 패배로 전선이 다시 수십킬로미터 밀려났고 그 거리는 수십만의 국군과 UN 군 병사의 피와 목숨으로<br><br>다시 회복해야 했음.<br><br><br>정전협상 당시 남한측 옵저버로 참석하였으나 일본군 육사 출신이라<br><br>"" 한국어 "" 를 제대로 못알아듣는 바람에 통역을 데려감.<br><br><br>본인이 지휘한 부대는 전부 전멸 혹은 해체당함.<br><br>4. 19 혁명이후 군에서 쫓겨났으나 박정희의 군사반란이후 요직에 중용.<br><br>(유재흥은 박정희의 일본군 육사 3년 선배)<br><br>국방부장관, 각국대사, 대통령 특별 보좌관 등 각종 자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함.<br><br>이후 성우회(퇴역장성모임) 회장으로 활동.<br><br><p style="margin:0px;"></p>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2056097sMp96SsQ5kY.jpg" width="459" height="565" alt="1335931839143.jpg" style="border:none;"></div><br><p></p><br><br>전시작전 통제권 환수논의당시 성조기를 들고 앞장서서 반대운동주도<br><br><br> 당시 현리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송. 북한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br><br>1994 년 전쟁종전 후 40 년 만에 남한으로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에게 면담을 요구했으나<br><br>끝까지 면담거부.<br><br><br>원균과 다른점은 그래도 원균은 전투에서 패전후 죽었으나 유재흥은 살아서 나라를 망치고 다녔음.<br><br>작년에 91 세의 나이로 잘먹고 잘살다가 사망. 이명박 정부는 즉시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br><br><br>원균: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 파괴, 임진왜란 후기 칠천량 해전. 조국의 운명을 말아먹는급의 무능 2회.<br><br>유재흥: 6.25 초반 서울 북부 방어선 파괴, 6.25 중반 1.4 후퇴 직접적 원인, 6.25 후반 3군단 전멸<br><br>조국의 운명을 말아먹기 3회 달성. 500 년 만에 원균을 능가하는 업적 달성.<br><br><br><br>현리전투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 강원도 인제군. <div><br></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2056083P5c8hh8FGnnmx4n5Oa9C6NKrxN6kkg.jpg" width="514" height="734" alt="1335913020252_2.jpg" style="border:none;"></div> <div style="text-align:left;"><br></div> <div style="text-align:left;">----------</div> <div style="text-align:left;">펌 끝</div> <div style="text-align:left;"><br></div> <div style="text-align:left;">현리전투는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div> <div style="text-align:left;">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div> <div style="text-align:left;">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div> <div style="text-align:left;">....</div> <div style="text-align:left;">지 같은 넘 때문에 전작권이 사라져서 그른가...</div> <div style="text-align:left;">전작권 환수 반대에 가장 앞장 섰다네요</div> <div style="text-align:left;"><br></div> <div style="text-align:left;">1차 출처 : <a target="_blank" href="http://top-dog.tistory.com/268" target="_blank" style="font-size:9pt;line-height:1.5;">http://top-dog.tistory.com/268</a></div> <div style="text-align:left;">2차 출처 : <a target="_blank" href="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29732875" target="_blank">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29732875</a></div><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