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실업계 고교를 다녀 3학년 2학기 때는 거의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span></div> <div><br></div> <div>시월부턴 취직한 친구들 자취방에 모여 술 먹고 노는 게 일이었다.</div> <div><br></div> <div>어차피 집에선 내놓은 자식이고 아버지와는 사이가  안 좋았기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div> <div><br></div> <div>내년 3월에 졸업을 하면 다시 집에 가려나?</div> <div><br></div> <div>학교에서도 나오지 말라고 선언한 겨울, 인천에 있는 친구 집을 찾았다. </div> <div>짐이라곤 스포츠백에 든 팬티 서너장과 반바지, 긴바지에 잠바 하나...</div> <div><br></div> <div>당시엔 완행 열차가 있어 돈이 없는 나 같은 학생에겐 정말 딱 맞았다.</div> <div>저녁에 타면 새벽에 도착하고, 북적이다 텅비어가는 열차 안에서 이리저리 휘적고 다니는 맛도 상당했다.</div> <div><br></div> <div>핸드폰도 없던 시절,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입김 하하 나오는 서울역에 내려 인천에 있는 그 친구 집까지 어떻게 찾아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div> <div><br></div> <div>친했던 친구 둘이 인천의 어느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한 친구는 그저 착했고 한 친구는 그저 잘 생겼다. 지금 만나면 그때 배우라도 했어야 했다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잘 생겼었다.</div> <div>얼굴도 하앴고 이목구비가 선명했던 친구 이름은 '지천'이었다.</div> <div>얼굴과 이름이 매치되지 않던 친구....</div> <div><br></div> <div>자취방은 제법 컸다. 방이 두 개였고 거실도 넓다랬다. 나는 기생충 처럼 그 집에 얹혀 살았다.</div> <div>3년을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던 친구들이라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div> <div>설거지를 했고, 방을 청소했고, 담배를 피웠고 재떨이를 비우면 친구들이 술을 사들고 퇴근했다.</div> <div><br></div> <div>어느날 친구 둘이 주말에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여자도 있다고 했다. 너무도 신나서 매일매일 샤워를 했다. 원래 겨울엔 씻지 않지만 정성을 들이면 누군가는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div> <div><br></div> <div>금요일 오후에 착한 친구가 말했다. 잘생긴 친구의 여자친구도 오고 자신이 점 찍은 친구도 온다고 했다. 다 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잘생긴 친구의 여자 친구는 동갑이고 자기가 점 찍은 여자는 두 살이 많다고 했다.</div> <div><br></div> <div>내 짝은? 하고 물었고,</div> <div>여자는 두 명 뿐인데? 하는 대답을 듣고 그 친구에게 쌍욕을 했으며 그날은 씻지 않고 잤다.</div> <div><br></div> <div>같이 놀러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 공간을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한 달 내내 재떨이만 비운 것 같아 온몸에 냄새가 밴 것 같았다.</div> <div><br></div> <div>버스를 탔다.</div> <div>잘 생긴 친구의 여자친구는 '미숙'이라고 했다. 착한 친구의 연상 여자는 '은지'라고 했다.</div> <div>버스에 자리가 없어 서서 갔는데 미숙이가 급커브에서 휘청거렸다. 엉겁결에 팔을 잡아 주었고, 잠시 후 우리 다섯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div> <div>착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div> <div>지천이 미숙이랑 결혼할 거래. 너 그러지 마.</div> <div><br></div> <div>내가 뭘 그랬는데? 난 넘어질까봐 팔을 잡아줬을 뿐이라고! </div> <div>착한 친구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었겠거니, 싶었던 모양이다.</div> <div><br></div> <div>바닷가는 엄청나게 추웠다. 잘생긴 친구는 미숙이도 은지도 둘 다 챙겼다. 착한 친구는 나처럼 깍두기가 되었다.</div> <div><br></div> <div>저녁엔 술을 마셨다.</div> <div><br></div> <div>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두 커플의 건승을 기원했다. 어차피 내 짝도 아니고, 둘이 잘 되면 내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거라는, 최소한 두 수 앞은 내다본 전략이었으나, 효과는 없었고 배만 아팠다. </div> <div><br></div> <div>집에 도착했을 때 잘생긴 지천과 미숙은 큰 방으로 들어갔고 착한 친구는 쩔쩔매며 은지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나섰다. 마치 엄마를 모시는 것처럼 준엄했다. </div> <div>나는 어설픈 기타를 튕기며 행여 큰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까 두려웠다.</div> <div><br></div> <div>들렸다.</div> <div><br></div> <div>곧 미숙이를 바래다 주러 지천이까지 나가고 나는 혼자 기타를 튕기다 줄을 끊어먹었다.</div> <div>나는 내가 나쁜 사람 같았다.</div> <div><br></div> <div>한 달을 더 지내며 기타를 튕겼고, 겨울 막바지엔 유흥가가 밀집한 동네에서 웨이터를 했다. 무슨 풍차 같은 이름의 레스토랑이었다. 돌아갈 차비를 벌어야 했다.</div> <div><br></div> <div>디제이를 하던 노랑머리 여자애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상관 없었다. 내겐 여자 복이 없나보다 했다.</div> <div><br></div> <div>지천이 미숙과 우리 가게를 찾았다. 그 전날 지배인 형한테 엉덩이를 얻어터져 절뚝 거리며 둘에게 서빙을 했다. 2월도 상당히 추웠고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술을 마셨다.</div> <div><br></div> <div>친구들은 공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자취방을 정리했다. 그 바람에 나도 그곳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div> <div>기생충은 숙주가 떠나면 함께 떠나야 한다.</div> <div>지천이 데이트를 하러 나가고 박스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거실에서 착한 친구와 소주를 마셨다.</div> <div><br></div> <div>난 그저 신났다. 차비도 충분했고 노랑머리는 전화번호를 주지 않았고 엄마는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꼭 아버지 몰래 오라고 말했다.</div> <div>내일 오후에 떠나는 완행열차를 타면 밤중에 도착할 것이다.</div> <div><br></div> <div>소주는 달았고 끝에 착한 친구가 울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우린 다시 만날 거니까... 공장은 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위로했다.</div> <div>착한 친구가 말했다. 지천이 은지를 좋아한다고. </div> <div>너무도 어이가 없어 나는 기타를 튕겼다.</div> <div>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 중에 '은지'가 들어가는 노래가 있었다. 친구는 더 서럽게 울었다. </div> <div><br></div> <div>근데 지천이 미숙이랑 결혼한다며?</div> <div>헤어진대...</div> <div>은주는 니 여자 친구잖아.</div> <div>은주는 애초에 지천이를 좋아했대.</div> <div>근데 세 명이 같이 여행을 갔어? 다들 제정신이야?</div> <div><br></div> <div>그해 겨울엔 제정신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은지 누나는 지천이를 좋아했고, 지천이는 미숙이와 잤고, 은지는 착한 친구를 싫어했고, 지천이도 착한 친구를 싫어했고 </div> <div><br></div> <div>나는 그제야 미숙이가 좋았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