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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soccer_140282
    작성자 : 선지의피
    추천 : 4
    조회수 : 2899
    IP : 121.156.***.141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5/04/08 18:00:42
    http://todayhumor.com/?soccer_140282 모바일
    축구천재 김병수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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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는 효창운동장. 그라운드에서는 포철공고와 남강고 선수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뛰고 있었다. 눈에 띄는 선수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관중석 한쪽에서 40대로 보이는 아저씨의 난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구 천재 김병수 파이팅~!"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번엔 주변의 학부모들까지 합세해서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미동 초등학교 전국 최우수 축구선수 김병수 파이팅!" 

    목청이 큰 아저씨가 구령을 부치듯 크게 외치면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치면서 "와~!" 하고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한 두번으로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게아니었다. 경기 중간 중간 잊을만하면 한번씩 되풀이 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시 경기장을 바라봤다. 물론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 중엔 미동 초등학교를 나온 김병수는 없었다. 그저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는 한 사내의 뒷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챙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저도 모르는 분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시더라구요. 초등학교 때 내가 뛰던 경기 심판을 보셨데요. 그 때부터 기억하신다고..." 


    대구에서 벌어진 2000년도 문화관광부 장관기 고교축구대회 우승은 포철공고에게 돌아갔다. 이동국을 배출한 포철 재단의 축구 명문인 포철공고가 전국 대회 우승을 한 번 더 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뉴스는 물론 아니다. 그런데, 개인상 수상자 명단을 확인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이 김병수가 그 김병수 맞는거야?" 

    포철공고 감독은 국가대표를 지낸 턱수염의 사나이 김경호 감독. 그런데, 지도상 수상자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할 그의 이름 대신 김병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너무나 의외였다.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가 이렇게 등장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김병수. 

    요즘도 올림픽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의 이름. 92년 1월 27일 말레이지아 콸라룸푸르에서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고 트랙을 달리며 포효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전방으로 찔러 넣는 정확한 패싱과 천부적인 득점감각' '문전 앞 직접 프리킥은 90%이상 골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스핀킥' '게임 리더이자 찬스 메이커이며 스트라이커 이기도 한 축구천재' 그리고 90년대 '한국 축구의 희망' 

    이상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략 4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수사다.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장담하긴 어렵다. 특히 직접 프리킥을 90% 이상 차서 넣었는지 못넣었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시들어버린 그의 축구 인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축구팀 박재영 부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단언한다. 

    "비교가 안된다. 잘하는 선수는 많아도 그처럼 '축구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선수는 흔치 않다. 앞으로도 어렵다." 

    5월 말이었다. 대통령 금배에 포철공고가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만날꺼에요?" 

    후배 기자가 묻는데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만나긴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날 것인지 말 것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과연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찌든 남루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너무나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내가 간직하고 있던 환상이 참담하게 깨질 것이다.' 

    솔직히 그게 걱정스러웠다. 참으로 약삭 빠른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초조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망가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기다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안녕하세요. 제가 김병수입니다."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20년전 일이다.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그를 스카우트해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되어 아저씨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했다.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다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리 만무였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불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축구의 불운이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제가 바보 같아서 그런거지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그 몸을 해가지고 경기엔 왜 나갔냐고 물었더니, 씩 웃으며 자기 탓이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미련하도록 착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는 절대로 못할...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배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보지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 디트마르 크라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인생 50년만에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그리고, 운명의 콸라룸푸르. 쿠웨이트와의 첫경기를 어렵게 비긴 한국팀은 2차전에서 바레인에게 1대 0으로 승리를 거두며 28년만의 올림픽 자력 진출길을 여는듯 했다. 그러나, 3차전에서 복병 카타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예선탈락의 위기에 몰리고 만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 약체로 평가받았던 일본은 3차전에서 바레인에게 대승을 거두며 느닷없이 중간 순위에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비기는 경우에도 골득실차 때문에 본선 진출이 좌절될 판이었다. 일본과 바레인 사이에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골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전 끝에 어느새 전광판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 2년 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왼쪽 사이드에서 낮은 센터링이 일본 문전으로 날아 들었다. 그리고, 골문 앞에 서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김병수였다. 빈자리를 보고 쏜살같이 뛰어들며 자세를 낮추고 왼발을 갖다 댔다. 골이었다. 극적인 결승골이었다. 

    그는 환호했다. 아니 미친 사람처럼 두팔을 벌리고 트랙을 따라 달리며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한국 올림픽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을 3 대 1로 꺽으며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그해 3월 북미 전지훈련을 떠난다. 하지만, 원정 명단에 김병수의 이름은 없었다. 다시 부상이었다.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한국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 자동차도 그런 구단 가운데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림픽 최종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92년 2월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93년 '산푸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 

    "그냥 걸었어요. 하루종일 술에 취해서 걸었어요. 원래 술을 못마셨는데 그땐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어요. 떠나고 싶었어요. 그냥 아무 곳이나... 그래서 자꾸만 걸었어요." 

    강원도 산골 천재 소년의 꿈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이어가는 모습에서 그가 느꼈을 환멸과 절망의 깊이를 어림짐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읽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아픔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끼는 못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리프팅을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리 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봤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동네에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심심할 때마다 운동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거기 관장님이 제가 마음에 드셨나봐요. 어느날 갑자기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는 거예요."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헬스클럽 관장님의 딸이었다.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허은영씨는 고등학생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없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 줬어요. 밝고 착하고 건강했어요. 그래서 끌렸나봐요."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복덩이를 만난 것일까. 암울하기만 하던 그의 진로가 마침내 열렸다. 일본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적지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일단 수술부터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92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름 사이로 멀리 한국 땅이 보였다. 아픈 기억과 상처만 안겨준...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하여 - 


    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 


    "아 그러니까..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미디어에서는 별로 관심을 안보이는 그런 분들을 모시고 인터뷰를...." 

    "제가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처음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그는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한 때 이 나라 축구의 희망으로 불리울만큼 유명세를 치렀던 사람답지 않게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축구천재 김병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다는 말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그럴리가 있나요. 제가 뭘 했다고..."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던 자신감 넘치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두 다리에 남은 깊은 수술 자욱처럼 쓸쓸한 모습일까. 그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머리 속은 온통 그의 현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인터뷰 대신 그냥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97년 초에 팀이 해체됐어요. 귀국해서 한일 생명에 입단 계약을 했는데..." 


    92년 7월. 그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93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조건이 좋았어요. 환경도 좋았고..." 

    J리그도 아니고 일본실업리그 소속팀, 그 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최고액 연봉 선수 못지않은 금액이었다. 4년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파격적이었죠. 감독님도 저를 믿어줬고... 팀 훈련은 거의 못했어요. 하루 두시간정도 훈련 하다가 집에 가서 쉬고, 그러다 시합 있으면 나가고..."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푸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 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솔직히 말하면 98년까진... 뭐랄까 원망 같은게 있었어요. 왜 나만..." 

    홍명보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김봉수... 동년배의 고대 출신 선수들이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이국 땅에서 쓸쓸히 지켜봐야하는 그의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그런거 없어요. 내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부인 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단다. 그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생긴건 날 닮았는데 축구보다는 예능 쪽에 재능이 있는거 같아요. 재주는 엄마를 닮았는지..."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늘어났다. 그의 일본 생활은 다행스럽게도 평화로운 것이었다. 

    "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천황배에 나갔을 때 나고야 그램퍼스랑 붙었어요. 스토이코비치도 그 때 나왔는데 우리가 이겨 버렸어요." 

    J 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경기에서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93년에 국내 복귀설이 나왔던건 사실이랑 달라요. 당시엔 한국프로축구에 별 매력을 못느꼈어요."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이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김병수 입장이라도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이 아들 다훈이에게 보여주려고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선수들과의 경기였지만 그는 여전히 유연한 몸놀림과 정확한 킥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다. 필름을 보며 지금이라도 몸을 만들면 프로리그에서 하프 게임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역시 그건 나의 욕심일 뿐이었다. 

    "한 게임 한 게임 진통제 맞고 나가서 뛴 거에요."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 아시안컵 대패 이후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대표팀에 그가 기용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박경화 씨의 주선으로 오이타 팀에 입단한 것이다. 

    "이상하게 거긴 적응이 어려웠어요. 한국 선수들도 많았는데..." 

    갈등 끝에 은퇴를 결심하고 짐을 꾸린 것은 98년 봄. 조용히 귀국한 그는 모교인 경신고에 잠시 머무르다 고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당시 고대는 94년 이후 계속된 스카우트 실패로 라이벌 연대는 물론 아주대 한양대등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남대식 감독이 퇴진하고 김성남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던 상황. 

    "좋은 후배들을 만났죠. 후배들도 저를 따랐구요." 

    그 때 만난 선수들이 지금 올림픽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과 부천의 이성재, 부산의 박민서 등. 하지만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버티고 있던 연대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전력이었다. 결국 그해 정기전은 2 대 0으로 연대의 승리.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와 대구대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대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를 4 대 3으로 꺽고 우승컵을 안았다. 

    "아이들 가르치는게 재미있어요. 체질인가봐. 하하하..." 

    고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 당시 고대 축구부는 지도 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결국 김성남 감독도 99년 6월 뚜렷한 사유없이 해임되고 만다. 

    "순호 형이 추천을 했어요. 처음엔 못믿어워 하셨죠. 감독님도 안계시니까. 지난번 대구 대회에서 우승을 하니까 이젠 학부모님들도 신뢰를 하세요. 감독님도 이제 안심하시고..." 

    올해 초 프로축구 포항은 포철공고 김경호 감독의 인솔 하에 연고 고교팀의 유망 선수들을 브라질에 연수를 보내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코치 신분으로 팀을 이끌게 된 김병수는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이다. 

    "페어 플레이죠. 절대로 거친 반칙 못하게 해요.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거에요."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때리긴 왜 때려요. 이해를 시켜야죠. 능력이 부족해서 노력해도 안되면 할 수 없는 거에요.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혹시 선수들이 못하면 때리기도 하느냐는 질문에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페어 플레이와 스포츠맨쉽이 그의 교육방침 1호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했다. 

    "선수들도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어요. 가르쳐보니까 알겠어요. 이론이 중요해요. 한번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을 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이해해요. 한글도 잘 못쓰는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고 충격 받았어요." 

    98년 귀국한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귀가 번쩍뜨였다. 그리고, 한없이 고마웠다. 능력은 나중 문제고 적어도 기본적인 마음 자세만큼은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갖춘 셈이다. 천재답게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맹점을 그는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요즘 살이 찌나봐요. 몸이 불어서 무릎에 조금씩 부담이 와요. 그래서, 시범을 못 보여주는게 아이들한테 미안하죠. 이거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되는데...하하하." 

    지도자가 선수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미련한 방법이 폭력으로 겁을 줘서 쥐어잡는 것이고 가장 현명한 것이 실력과 품성으로 이해시키는 것이다.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코치 김병수는 전자의 경우는 아니었다. 

    "공부하고 싶죠. 기회가 주어지면 유학을 갔으면 해요. 나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이론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죠." 

    그의 기본적인 축구 철학은 이 글 서두에 소개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노트에 가감없이 적혀 있다. 때마침 개막한 유로 2000에 나타난 플레이 경향은 공교롭게도 그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 결코 아니다. 

    "움직임을 강조하죠. 플라티니나 마라도나를 좋아했어요. 그 땐 그 선수들이 제일 잘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지났어요. 모든 선수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야해요. 기본 기술이 점점 더 강조되는 거에요." 

    그 또한 스페셜리스트 가운데 하나였다. 한 번에 상대 수비벽을 무너뜨리는 스루 패스는 김병수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스루패스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결국 공간 싸움이에요. 압박을 하는 이유가 미드필드에서 잘하는 선수를 그냥 둘 수 없으니까 미리 전방에서 끊는거에요. 그리고 그 간격이 점점 좁아져요. 그래서 공격수들의 지능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지는 거에요. 공간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는 아주 진지한 자세로, 그리고 성의를 다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나갔다. 이해하기 쉽도록 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선수들의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 기억 속의 축구천재 김병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지난 시절의 영욕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포철공고와 남강고의 경기가 끝난 후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샤워를 하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포철공고 선수들은 트랙 한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중요해요. 우리나라에선 거의 안하는데 90분을 뛰고 나면 어떤 선수고 근육에 무리가 가게되요. 특히 어린 선수들은..." 

    교과서에는 스트레칭 후에 런닝도 해야 한다고 나와 있는데 런닝은 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운동장에서 게임 중이라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하하하... 그게 아니고. 처음엔 시켰는데 선수들이 힘들어 하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나도 싫었어요. 경기 내내 뛰었는데 또 뛰는 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억지로 시킬 수도 있겠지만 선수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싶지 않을 것을 하면 효과가 없지요."

    덕분에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고대에서 잠시 후배들을 지도할 때 결승에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모양이었다.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인사 받는 것보다 선수들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경기 끝나고 다시 운동을 시켰죠.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난리가 났죠. 김병수가 대체 누구냐고..." 

    그의 일상은 남들과 다름없이 분주하다. 많지는 않지만 졸업반 선수들의 진로도 챙겨야 하고 내년 시즌에 대비해 1, 2 학년 선수들 지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감독이 부재중이라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 같았다.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기대할만 해요." 

    브라질로 연수를 떠난 선수들이 복귀하는 내년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포철공고는 이동국이 재학 중이던 97년 전국 대회 3관왕을 차지하며 고교 무대 최강으로 군림했지만 최근엔 부평고에게 밀리고 있다. 하지만, 승리를 위한 축구를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언제나 목표는 우승이죠. 하지만 우승은 하늘이 도와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경기장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죠." 

    공식 대회는 아니지만 지방마다 도지사배 대회 같은 지역 대회가 종종 열린다. 어쩔수 없이 출전해야 하는 경우가 새기는데 문제는 상대 선수들이란다. 정식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 아닌 경우 실력에서 밀리면 과감한(?) 반칙을 해오는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시키는 선생들이 더 문제죠. 우리 애들은 절대 그렇게 못하게 하는데... 한 번은 너무 심하다 싶어서 타일렀죠. '너희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축구를 잘하는 것보다 스포츠맨쉽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라도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애들은 아직 잘 모르니까요." 

    어쩐지 그 앞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기만 했던 선수 생활의 미련을 접고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꿈'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유럽 무대를 밟고 싶어요." 

    선수 시절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 또한 세계적인 리그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 프로리그에서 뛰고 싶다거나 지도자로 나서면서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유럽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흔 다섯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는게 목표에요. 황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노력할거예요." 

    그러고 보면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는 경우는 많아도 우리 지도자들이 외국에 나가 외국 선수들을 지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이태리나 스페인 1부 리그에서 한국인 감독을 볼 수 있다면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갑자기 우리도 젊은 사람들이 프로팀이나 대표팀 감독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한 이야기 같지만 네델란드의 레이카르트를 보면 꼭 허황한 생각만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한국적 현실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이제 머지 않은 장래에 90년대를 풍미했던 우리 대표 선수들이 하나 둘 씩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들 가운데 다시 우리 대표팀 감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대표팀 감독은 하늘이 내리는 자리죠. 그게 목표가 될 수는 없고... 그래요. 나랑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언젠가 은퇴하면 지도자로 다시 만나겠죠. 하지만 굳이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나는 내가 할 일이 있는 거니까..."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생계에 위협을 받을 만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로서 겪었던 불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미래까지도 놓치고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도 비참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참으로 밝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은 지금 불행하십니까?" 

    。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시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천재' 운운하며 사탕발린 소리 늘어 놓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를 부상에서 지켜주는 일. 그가 부상 당하지 않게 축구 환경을 바꿔주는 일 말이다. 

    그가 다시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선수가 아니니 운동장 안에서 다칠 일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의 축구 인생에서 다시는 부상으로 신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팬들이 도와준다면 이 번에는 가능할 것이다. 

    "선수로서 나는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축구는 여전히 제 꿈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흔들리고 나태해질 땐 이 말을 되새기며 의지를 다집니다.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 

    1차 출처 :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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