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열우당의 삽질로 이제 대세는 한나라당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린 듯 합니다.
그러나 그간의 추이를 보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는 지속적인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한나라당의 각종 비리, 추문, 망언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인 지지층.
열린우리당의 어리버리한 삽질 + 찌질한 눈물쇼에도 불구하고 내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부동표.
갖가지 요인들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지율 속에 자리잡은 이 부동표의 근간은,
일찌기 박근혜대표가 제기하였던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칭 좌파 논객 진중권씨가 한마디 했었죠.
우리 헌법의 전문을 보자. 거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 그런데 그 법통을 이으려고 친일진상 좀 규명하자는데 극렬하게 저항하는 위헌적인 분들이 있다. 누구더라? 또 우리 헌법의 전문은 '정의와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북한 얘기만 나오면 '주적' 운운하며 '민족의 대단결'이라는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분들이 있다. 누구더라?
우리 헌법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잡겠다고 설치는 분들의 정신상태는 어떤가? 헌법이 규정한 4·19 민주이념은 안중에도 없고, 외려 헌법에 들어있지도 않은 5·16 쿠데타에서 이 나라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툭하면 국가의 정체성이 어쩌고 하는 그 분들이 정작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사실상 헌법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온 국민의 합의로 씌어진 대한민국의 성문헌법. 이 정품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3·1 운동' '4·19 민주이념' '민족의 단결' '세계평화' 등에서 찾는다. 다른 하나는 눈이 오른 쪽으로 심하게 쏠린 우익 가자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불문헌법. 이 해적판 헌법은 5·16 쿠데타, 국가보안법, 한미동맹 같은 데서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헌법이 둘이다 보니 국가의 정체성을 놓고 늘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다.
박 대표가 신봉하는 헌법은 어느 것일까? '4·19 민주이념'으로 쓴 공식 헌법? 아니면 5·16 정신에 바탕을 둔 사제(私製) 헌법? 아무리 생각해도 박 대표는 국가의 정체성을 거론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후광을 이루는 박정희는 관동군 중위로 히로히토에 복무하고, 남로당 군책으로 김일성에 충성하다가, 5·16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유신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부정했던 분이다. 이 화려한 행적 중 과연 어느 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한단 말인가?
... 진중권씨가 말한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이 옳으니 그르니 혹은 표현의 적절함 여부 등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겉으로 아무리 현 정권의 실정이나 열린우리당의 삽질, 혹은 한나라당의 비리를 말하며 상대편을 비난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바닥에는 이 두가지 중 하나가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이것은 다분히 이념적인 것이며 남이 뭐라 하던 흔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나라당을 차분히 조목조목 지지하는 비교적 자세한 의견에도 무조건적인 반대표를 찍거나 악플을 다는 사람은 아마도 516에 기반한 "사이비 정통성"을 끝내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고,
열린우리당이나 드물게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는, 아니면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의견에 이유불문 비아냥을 날리는 사람도 "어디서 근본도 모를 것들이 감히"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차근차근 따져 가며 정상적으로 토론을 펼치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취향이 아닌,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에 가깝습니다. '악'에 돌을 던지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죠.
열린우리당의 여러 패착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패착은, 이 "사이비정통성"을 혐오하던 사람들의 신뢰를 잃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통령 탄핵 당시 극에 달했던 이 분위기가 요즘 와서는 '그놈이 그놈이네', '믿을 놈 없네'로 바뀌고 있으니까요. 과거의 3당야합과 민주당의 타락을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난데없이 민주당과의 통합 운운하고 있지 않나, 기대하던 친일청산이나 국가보안법문제는 흐지부지 돼 버리지 않나, 총리께서는 느긋하게도 휴일에 골프나 즐기시지 않나...
'대립항'으로서의 차별성을 잃어버린 것이죠.
열린우리당 출범 당시 많은 인터넷 게시물들에서 이런 우려를 했었고, 확실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당부를 많이 했었습니다.
아마도 확실시되는 이번 지방선거와 다음 총선에서의 패배 후에 열린우리당이 와해될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탄핵 사태 당시 만큼 힘을 받는 "사이비정통성의 대립항" 세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지간히 커다란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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