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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istory_5215
    작성자 : Einsiedler
    추천 : 4
    조회수 : 1135
    IP : 165.246.***.190
    댓글 : 5개
    등록시간 : 2012/07/31 16:00:48
    http://todayhumor.com/?history_5215 모바일
    경신대기근 관련 실록기사
    <p>경신대기근이 1670년인데 아마도 조선 최악의 재앙으로 꼽히죠.</p><p>이 때의 상황을 대충 요약해보면...<br></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파종시기를 앞두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왕과 신하들이 기우제를 논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9일(을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기의 양주(楊州) 등 여덟 고을에 이달 6일 우박이 내려, 밀과 보리가 손상을 입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b><b>,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4일(경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 평안도 위원(渭源)에 3월 26일에 이틀 밤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고, 영원(寧遠)에 이달 6일에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으며, 평양(平壤)·은산(殷山)·삼등(三登)·성천(成川)·중화(中和)·순천(順川)·순안(順安)·강동(江東) 등의 고을에 이달 7일에 우박이 내려서 싹이 튼 각종 곡식과 삼[生麻]·목화들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b><b>,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4일(경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 경상도 의성(義城)·의흥(義興) 등지에 이달 8일에 서리가 내렸으며, 의흥에는 9일에 우박이 내렸다. 전라도 금산(錦山)에 서리가 내렸다. 양남이 모두 심하게 가물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9일(을사)<br></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전라도 운봉(雲峰)·장수(長水) 등지에 밤마다 계속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을 손상시켰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3일(기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평안도에 가뭄이 들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29일(을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style="text-align: left;">당시에 큰 가뭄이 시절을 넘겼는데, 이날에 비로소 큰 비가 내렸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결국 큰 흉년이 들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b><b>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5월 23일(무인)</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산음(山陰) 교생 정이원(鄭以元)의 집이 폭우가 올 때 산사태에 깔려, 정이원 및 자녀 손자 남녀 6명이 모두 죽었다.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8일(계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기에 큰물이 졌다. 당시 각도에 모두 큰 물난리가 났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6월 20일(을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에 큰물이 졌다.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12일(병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제주에 윤2월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5월 그믐께에 와서야 비가 내렸는데, 퍼붓는 듯한 빗발이 여러 달 개이지 않아 높고 낮은 전답이 침수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바람의 재난이 참혹하였다. 목사가 계문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1일(을유)</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함경 남·북도에 여러 달 큰 비가 내려 곳곳에 전답이 모래로 뒤덮였고 남은 곡식은 또 충재를 당하였다. 갑산(甲山), 삼수(三水) 등의 고을에 7월 16일 서리가 내렸는데, 눈이 온 것과 같았다. 함흥부(咸興府)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달걀만하기도 하고 새알만하기도 하였으며 각종 곡식이 쓰러지고 부러졌다. 또 누런 기운과 흰 기운이 일시에 뒤덮였고 그 기운이 덮였던 곳에는 싹이 말라 죽었는데 흰 기운이 누런 기운보다 손상이 심하였다.충청도 태안(泰安) 등 연해의 네 고을에 모진 바람으로 배가 침몰하여 죽은 자가 90여 명이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는데,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9일(계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기 각 고을에 된 서리가 연일 내려 익지 않은 벼가 모두 말라 죽었다. 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거의 남은 종자가 없었다. 가을갈이를 사람이 소 대신 하였는데, 9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 마리의 일을 해낼 수 있었으므로 농사일을 포기하는 백성이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15일(기해)</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7월 27일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닥쳐, 하룻밤 사이에 큰물이 갑자기 불어나 수구(水口)의 홍성(虹城)과 누각까지 아울러 무너져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으며, 침수된 민가가 아주 많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명입니다. 밝은 대낮이 컴컴해졌고 성난 파도가 눈처럼 흩날려 소금비가 되어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목은 소금에 절인 것 같고 귤·유자·소나무·대나무 등이 마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종 나무 열매는 거의 다 떨어지고 기장·조·콩 등은 줄기와 잎이 모두 말랐습니다.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만고에 없었던 참혹한 재변입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b><b>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9월 9일(계해)</b> - </p></blockquote><p><br>더 설명이 필요한지?<br>천재지변의 연속으로 벼 수확전까지 먹어야 될 밀, 보리가 전멸해버린데다가 여름에 서리까니 내려서 벼까지 전멸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즉, 1년 농사 존트망.</p><p>보통 조선의 경우 특정 지역이 흉년이라도 다른 지역은 작황이 괜찮아 끌어와서 돌려막기라도 됐는데 이 해는 조선팔도가 다 같이 농사 망하는 바람에 돌려막기도 안되고 정부에서 지니고 있는 곳간을 열 수 밖에 없는데 그 양이 넉넉하지 못해 결국 대기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p><p><br></p><p>사실 저기 다 언급 안했는데 지진이 수시로 발생하고, 여름에 태풍불고, 유성이 자주 목격되는 등 실로 흉흉한 분위기였습니다.</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 감사 오시수가 도내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다고 아뢰자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6일(경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 큰 기근이 들어 함양군(咸陽郡)에서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는데,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7월 19일(계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p><p>“강변의 각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니 먼저 죽을 끓여 주어야 하겠는데, 정배된 죄인들은 모두 청천강 남북의 어염(魚鹽)이 나는 곳으로 옮기소서.” <br></p><p>하니, 상이 따랐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22일(병오)</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 당시에 팔도에 기근이 들어 사망의 보고가 잇달아 이르렀다. 서울에도 굶어 죽은 백성이 많았다. 상이 진휼청으로 하여금 양식을 내어 구활하게 했는데도 모두다 구제할 수가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28일(임자)</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제주 목사 노정이, 세 고을에 유치해 둔 적곡이 8천 석에 불과한데 인민의 숫자는 무려 4만 2천 7백여 명이므로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결코 구제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연해의 곡물을 얻어 한 섬의 다 죽게 된 목숨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p><p>허적(許積)이 아뢰기를,</p><p>“제주 흉년의 참혹함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일입니다. 목사 노정이 촌가를 출입하며 백성이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친히 살피고 기근이 더욱 심한 자는 지성으로 구제하고 있습니다만, 관에 있는 곡식이 매우 적어 이렇게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통영(統營)곡(穀)으로서 호남 연해의 각 고을에 있는 것을 보내준다면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사 노비 신공도 완전히 감해 주어 진념하여 구휼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p><p>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쌀 2천 석, 조(租) 3천 석을 배로 실어다 구제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9월 10일(갑자)</b></p></blockquote><p><br>곳곳에서 굶주리는 백성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아사하는 백성도 발생하는 잘 보면 왕도 서울에서도 굶어죽는 백성이 나오고 있습니다.</p><p>그럼 기근만 문제냐? 그러면 좋아겠지만 2월부터 전염병이 돌고 있었는데 여기에 백성들이 잘 못먹고 굶주리는 상황이 발생하니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바람에....</p><blockquote class="tx-quote1"><p>충청도에 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2월 15일(계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 염병(染病)이 크게 번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3월 7일(갑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고, 황해도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1일(정해)</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제주(濟州)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2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4월 5일(신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당시에 기근을 치른 끝에 전염병까지 극성을 부렸으므로, 사망하였다는 각도의 보고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2월 11일(갑오)</b></p></blockquote><p><br></p><p>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농사 밑천이라는 소들도 우역으로 줄줄히 쓰러져나가고 있었습니다.</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팔도에 소의 역질이 모두 크게 번졌는데, 황해도가 더욱 심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17일(신축)</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황해도에 죽은 소가 8천여 마리였다. 큰 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서리가 잇달아 내려 폐허가 되어 화곡이 남은 것이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8월 28일(임자)</b></p></blockquote><p><br></p><p>그나마 소가 농사 밑천이라 정부에서는 건드리지 못하겠는데 나중에 하도 굶주리자 소라도 먹이자면서 소 도축금지령을 일시 폐지하기 까지 이릅니다. 근데 빈 속에 그 고기를 급히 먹느라고 오히려 죽는 사람들이 늘 지경에 이르렀으니...</p><p>어쨌든 역병과 굶주림에 몸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혹독한 겨울까지 닥쳐오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고...<br></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황해도에 여역과 우역(牛疫)이 모두 많이 번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2일(갑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천 1백여 명이었는데 여역이 잇달아 번져서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소의 역질도 계속 심하게 번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3일(을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br>“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빌어먹는 무리들은 다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 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 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1일(계해)</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전라도에서 12월 29일 이전에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자가 2백 5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5일(정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서 곰처럼 생긴 짐승이 사람을 물어 죽였다. 그 몸이 매우 크고 그 색은 반은 잿빛이고 반은 검고 혹 붉기도 하고 혹 희기도 하였으며, 곰과 비슷하나 곰이 아니었다.<br></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5일(정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경기에서 12월 보름 이후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 7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5일(정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원양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67명이었고, 소의 역질도 계속 번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7일(기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서 전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1만 1천 5백 53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19일(신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충청도 정산(定山) 등 고을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43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21일(계유)</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백 54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30일(임오)</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br>“본도(本島) 세 고을 민생의 일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는데 나무 열매가 이미 다하였고 내려가 풀부리를 캐는데 풀부리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마소를 죽여서 배를 채우고 있으며, 무뢰한 자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공사간의 마소를 훔쳐서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으니 비참한 모양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8월부터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고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4만여 명의 굶주린 백성을 다시금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해안 고을의 소금을 넉넉히 들여 보내소서. 전일 옮겨 온 5천 석의 곡식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1, 2월 두 달의 진휼할 거리도 모자라므로 3, 4월에는 한 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서 진구할 방책을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br>하였다. 조정에서 전라도에 있는 호조 소금 5백 석과 상평청(常平廳)·통영(統營) 및 양남(兩南)의 사복시 목장 등의 곡식 7천 석을 떼어 지급하여 전라 수영의 병선(兵船)으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바닷길이 멀고 풍파에 막혀서 지난해 초겨울에 부친 장계가 이제야 도착했고 전후로 곡식을 나르는 배도 제때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섬 백성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월 30일(임오)</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 5백 53명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 8백 69명이었다. 전라도에서 정월 이후로 굶주린 백성 가운데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 39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52명이었다. 평안도는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6백 48명이었다. 경기는 정월부터 여역으로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br></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3일(을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제주(濟州)에 지난 12월 2일 큰 바람과 많은 눈이 한꺼번에 닥쳐서 쌓인 눈이 1 장(丈)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던 기민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명이었다. 기근 중에 여역이 많이 발생하여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3일(을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전략)</p><p>상이 판윤 민정중에게 이르기를, “굶주리는 백성의 숫자가 지금 얼마나 되는가?”<br>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2만 명입니다.”하였다.</p><p>상이 이르기를, “2만 명에게 먹일 수 있는 죽은 얼마인가?”하니,</p><p>민정중이 아뢰기를, “30부(釜)입니다.” 하였다.</p><p>상이 이르기를, “굶주리는 백성 가운데 사망자가 있는가?”하니,</p><p>민정중이 아뢰기를, “잇달아 죽어가고 있습니다.”하고,</p><p>허적이 아뢰기를, “자기 집에서 죽은 자는 그 숫자가 얼마인지 모르고, 오부(五部)의 첩정을 보면 길가에 시체들이 연이어 있다고 합니다.”<br></p><p style="text-align: left;">(후략)...</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9일(신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는 여역으로 죽은 자가 59명이었고, 경상도는 전후의 굶주린 백성이 3만 8천 9백 67 명이었는데 굶주려서 죽거나 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다. 충청도는 옥천(沃川) 등의 고을에 굶어죽은 자가 69명이었고 여역도 점점 심해졌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13일(을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br>“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으로 가득하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이전하는 미곡이 때에 미쳐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br>하였다. 이때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노정이 날마다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다가오자 급히 가서 보았는데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었다.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왔으며 굶주린 백성들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15일(정유)</b><b></b> </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열흘 동안에 80여 명이었는데,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18일(경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원양도에 죽을 받아 먹으러 나온 기민이 9천 4백 90명이었으며 여역으로 인해 죽은 자가 1백 19명이었다. 강화부(江華府)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0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18일(경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경기에서 정월 16일 이후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이 10만 67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20일(임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서 여역이 점점 치열해져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22일(갑진)</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황해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5천 5백여 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다. 굶거나 얼어 죽은 자도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25일(정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함경도에서 여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26일(무신)</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으로서 죽을 나누어 주는 곳에 나온 사람이 9만 8천 3백 6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1백 4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4일(을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상평청의 진소(賑所)에 월초에 진구받으러 나온 자가 6천 70여 명이었고, 1월 20일 이후로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6일(정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명이었고, 2월 27일 이후로 비와 눈이 잇따라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밭이 얼어붙어 쟁기질을 할 수가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0일(신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30여 명이었고 굶주리는 백성이 13만 2천 5백 90여 명이었으며, 죽을 먹이는 곳에서나 도로에서 죽은 자가 1백 40여 명이었고 지난해 10월 이후로 각 고을의 죄수 중에 얼고 굶어 죽은 자가 1백 30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0일(신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충청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6만 6천 4백 20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4일(을축)</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2월 보름 이후로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5일(병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경기도에서 2월 보름날 이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천 6백여 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불에 타죽은 자가 6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7일(무진)</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원양도(原襄道)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7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8일(기사)</b> </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b></b>이달에 서울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숫자가 1백 50여 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30일(신사)</b></p></blockquote><p><br> </p><p>1월부터 3월가지 여역을 병사. 얼어서 동사, 굶주려 아사로 실록이 도배될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구휼을 계속해도 이 상황이라 조선정부도 거의 멘붕이 올 지경인데 그렇다고해서 1671년의 사정은 나아졌나?</p><p>한줄로 요약하면 <b><span style="font-size: 14pt;">"미안하다 아직 안끝났다."</span></b></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 2월 초부터 비가 내려 열흘 동안 개지 않자, 강물이 불어 넘쳐서 강가 일대의 밀보리가 모두 침수되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2월 16일(무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에 봄보리의 파종이 비 때문에 시기를 넘겼고 씨뿌린 뒤에 또 많이 썩었다.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웠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7일(무진)</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도에 2월 6일 이후로 큰 비가 잇따라 내려 밀보리가 손상되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3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3월 18일(기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서 큰 바람이 서남방으로부터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려 몇 리 사이에 산이 보이지 않고 일찍 파종한 갖가지 곡식이 날리는 모래에 죄다 손상되어 남아 있는 종자가 없었으며, 덕원(德源) 등 여남은 고을에서도 큰바람이 불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4월 5일(병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 순천(順川)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였다. 함경도 삼수(三水) 등 고을에 눈이 내려 보리가 태반이나 얼어 죽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5월 6일(병진)</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평안도 정주(定州) 등 고을에서 바닷물이 넘쳐서 연변의 둑이 터지고 밭이 망가져 벼곡식이 손상을 많이 입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5월 15일(을축)</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함경도 경성(鏡城) 장백산(長白山) 아래에 눈이 한 자쯤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농사를 크게 손상하였다. 남도(南道) 각 고을의 보리가 또 누렇게 마르는 병에 걸려 모두 말라 죽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5월 29일(기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원양도(原襄道)에 장마가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27일(병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강화부에서 이달 20일에 큰바람이 불어 곡식을 손상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27일(병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 비안현(比安縣)에는 7월 12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손상하였고, 의성현(義城縣)에는 13일에 풍재(風災)가 있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일(기묘)</b></p></blockquote><p><br></p><p>2년 연속 농사가 개망했습니다. 1년 정도 대기근이면 농사가 잘되면 뭐 어찌 넘어가겠는데 2년 연속이니 조선정부는 이제 거의 울고싶을 지경이 되고, 상황은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여...<br></p><p><br></p><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에 굶주리고 병을 앓아 죽은 사람이 서울은 3천 1백 20여 인이었고 팔도에서 보고한 것은 모두 1만 3천 4백 20여 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5월 29일(기묘)</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성[서울]에 기근이 심하여 은 8냥으로 겨우 한 섬의 쌀을 바꾸었다. 사대부의 집에서 앞다투어 비단 옷가지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았고 금은의 그릇과 노리개로 두어 되의 쌀을 바꾸려 하여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얼마 안 가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파는 쌀은 많아야 십여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적으면 단지 한 말의 쌀뿐이었다. 사대부로서 벼슬이 낮아 봉록이 박한 자는 태반이나 굶주렸고 각사(各司)의 원역(員役)들도 거의 다 굶어서 낯빛이 누렇게 떠서 장차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지경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6월 14일(계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br>“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만 보고 말게 되었습니다.<br>역로(驛路)가 모두 비어서 장차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속(官屬)이 흩어져서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죽은 자는 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었는데, 근일 길에 쓰러진 주검은 모두 본토박이 양민입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에서 진휼에 쓰고 남은 곡물과 여러 산성(山城)의 군향(軍餉) 관조로 창고에 약간 남은 것을 털어서 나누어 주면 만분의 일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급히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세로 받은 콩과 쌀 또한 1백여 석을 남겨 둔 고을도 있을 것이니, 굶주린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고 의지할 데 없어서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 무리에게 이것으로 죽을 쑤어 먹이게 하였으면 합니다.”<br>하였는데, 상이 다 윤허하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6월 15일(갑오)</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기 감사 오정위가 치계하였다.<br>“도내 각 고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 이외에 굶어서 도로에 쓰러져 죽은 주검을 묻도록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굶어서 지친 백성이 실로 거두어 묻기 어려웠으므로 길에서 썩게 되었습니다. 또, 흙을 덮더라도 소나기가 한번 지나가면 곧 드러나고 있으니 보기에 참혹한 정상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6월 18일(정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에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천 4백 6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수가 1만 7천 4백 90여 인이었다. 그 밖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범에게 물렸다는 보고가 잇따랐으며, 도둑이 살해하고 약탈하는 우환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하였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6월 30일(기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br>“우도(右道)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개를 죄다 잡아 먹고 나자 또 마소까지 잡아 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필요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습니다. 형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 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댓 단(端)과 바꾸기까지 합니다만,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좌도(左道)의 각 고을은 우역(牛疫)이 크게 치열하여 병으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거리가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다 여역·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 게다가 한재와 황재(蝗災)가 매우 참혹하니, 앞날의 농사에는 다시 바랄 만한 것이 없습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5일(갑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전라도에서 6월 초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3천 5백 34명이었고 굶주려 죽은 백성이 7백 25명이었고, 함평(咸平) 등 고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백 47두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25일(갑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경상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2천 6백 92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26일(을해)</b><br></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도성에서 7월 21일부터 29일까지 인민(人民) 중 병을 앓아 죽은 자가 41인이었고 굶어 죽은 자가 95인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3일(신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원양도(原襄道)에 굶고 병을 앓아 죽은 백성이 1백 37인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6일(갑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경상도에서 우역으로 죽은 소가 6천 8백 6두이고, 7월 스무날 이후 이달 초까지 죽을 먹인 굶주린 백성이 16만 3천 1백 49명이고 죽은 자가 5백 57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0일(무자)</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 초하루부터 10일까지 주리거나 병으로 죽은 도성 백성이 83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5일(계사)</b><br><b></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원양도(原襄道)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3백 36명, 주려 죽은 백성이 74명이었고, 역질로 죽은 소가 3백 55마리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5일(계사)</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황해도에 7월 이후 병에 전염된 자가 1천 6백 9명이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7일(을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 전라도에 7월 중 병에 전염된 사람의 수는 1만 1천 8백 81인이었고 죽은 자는 2천 7백 43인이었으며, 굶주려 죽은 백성이 2천 2백 79인이었으며, 장흥(長興) 등 열일곱 고을에서 한 달 동안에 우역으로 죽은 소가 1천 39두였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19일(정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에 서울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가 2백 5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자가 모두 1만 5천 8백 30여 인이었는데, 그중에 범에게 물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도둑에게 살해된 자들도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8월 30일(무신)</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에 서울에서 병을 앓아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굶고 돌림병을 앓아 죽은 수를 보고한 것이 모두 1천 8백 4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범에게 물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도둑에게 살해되어 죽은 자도 많았다. 삼남(三南)과 경기·원양·황해 등 도에서 우역이 크게 치열하였는데 전염되어 죽은 소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백성이 경작할 기약이 없었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4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9월 30일(무인)</b></p></blockquote><blockquote class="tx-quote1"><p>이달에 염병으로 죽었다고 각도에서 보고한 수가 모두 1천 4백 70여 명이었다. 삼남(三南)과 원양·함경 등의 도는 우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p><p style="text-align: right;"><b>현종개수실록</b><b> 25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11월 30일(정축)</b></p></blockquote><p><br>조선에 인외마경이 펼쳐집니다. 농담이 아니라 거의 한 해 실록이 사망자와 재난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날 지경입니다. 정쟁? 당장 구휼하기도 바빠죽겠는데 그런거 할 시간이 어딨어요? 심지어 수도의 사대부나 관료들 마저 굶주리던 시절입니다. 아예 인륜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걸요.<br></p><p><br></p><p>이로 인해 수도에서도 엑소더스가 발생합니다. 여러 관리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임금께 사직을 청하고, 현종임금도 정말 필요한 핵심 실무관료들 제외하면 군소리없이 승인해줬습니다. 심지어 휴가나 병가 얻어서 내려간 신하들이 상경안해도 신경 안쓰는 상황이 됩니다.</p><p><br></p><p>실록에 실제 기록된 것만 이 정도고 아마 실상은 더 참혹했을 수도 있답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었던 노인들이 참혹했다던 그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울부짖었다는 언급도 있고요. 더불어 관리들이 자신의 인사고과를 우려해서 축소보고를 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초반에 아사자, 병사자 보고가 올라가니 이거 지방관이 일을 제대로 안해서라고 처벌하라는 간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전국에 헬게이트가 열려서 지방관들도 우는 소리 나오고, 정부에서도 총력전 모드로 구휼을 하는데도 안되니깐 단체로 멘붕상태라 누구 책임을 묻기도 힘들긴 했지만서 사실대로 안올렸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p><p><br></p><p>이 때 사망자가 대충 100만 정도로 추산됩니다. 당시 호구조사상 조선 인구가 500만이고, 노비나 뭐 이런거 고려하면 2배는 됐을 거라고 하는데 엄청난 타격이었죠.<br></p><p><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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