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서점.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 아파트 단지까지 올라오는 상가단지에 약 20여 년 간 자리를 지킨 동네서점이 하나 있다. 아직 초등학교 시절, 매월 초나 매월 말 즈음에는 으레 남자애들 삼삼오오 세트로 묶여 서점으로 출동을 하곤 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들로 진열대를 살피던 우리들은 신간 게임피아와 챔프와 점프 만화잡지들을 발견하면 야 나왔다! 라는 환호성과 함께 한 두 시간 동안 서점에서 뭉개며 탐독을 하고 가곤 했다.
버거킹와퍼세트 같이 푸짐한 인상을 가진 책방 사장 형은 니들 때문에 손님이 들어올 자리 없잖냐, 볼 거면 사서 봐라 라고 줄곧 잔소리를 해댔지만, 막상 영웅전설이 잡지 부록으로라도 나오는 달에는 품절되기 전에 미리 귀띔을 해주는 단골거지를 배려한 충실한 상인의 모습도 보였었다. 그 당시 몇 천원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우리에게 게임피아는 동 시대의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는 타임지며 이코노미스트였으며, 남자의 멋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젠틀맨 퀄리티였다.
사실 동네책방에서 책에 취미를 붙이게 된 계기는 날카로운 비평과 향후 게임 미래 전망을 담은 잡지보다는 만화책이었다. 그 당시 만화책은 지금처럼 얄팍하게 비닐로 돌돌 싸매지도 않았기에 일단 앉았다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의 우리들 뒤로 남겨진 것들은 손 때 묻은 신간과 사장 형의 볼멘 잔소리였다. 사장 형은 그런 우리를 의식했는지 서점 사각지대 구석에 만화책을 배치해 놓았는데, 학습지와 문제지의 앞 책장을 밀어내면 비로소 뒤에 이중구조로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종 어머니와 서점을 들를 때면 구석에 숨어 만화책을 보고 있다가도 어머니가 다가오면 꽂혀 있던 해법수학 책을 당당히 펴든 채 어머니 구몬은 이제 지겹군요 라고 말 할 수 있게 해주는 가히 리즈시절 인자기급의 배치선정이 아닐 수 없었다.
가난했던 학창시절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건 내 오랜 친구 도라에몽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찌질한 찡구를 도와주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명품들을 사차원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도라에몽의 모습에 매료되어 EBS 김영만 선생님처럼 발명왕이 되어야겠다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 부터는 몇 백원 씩 차곡차곡 모아 이천 오백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한 권씩 사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당시 메로나 시세가 삼백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내가 도라에몽을 모으기 시작하는 시점, 내 친구는 소년탐정 김전일에 빠져들고 있었다. 온갖 살인과 사건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날카로우면서도 재치 있게 범인은 이 안에 있어! 라고 외치는 김전일보다는 미유키를 좋아했던 내 친구는 벌써 어엿하게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고, 주머니에서 무엇이든 꺼내 보는 파란 고양이를 동경하고 부러워한 나는 무엇이든 갖다 파는 잡상인이 되었다. 이렇듯 유년시절의 꿈을 키우며 책 한 권씩을 살 때마다 서점형은 조금씩 우리를 거지취급에서 벗어나 VIP 우대를 해주기 시작했다.
학습지가 아니라 만화에 빠진 아들을 결국 발견한 어머니는 만화책만 읽지 말고 고전도 한 번 읽어보라며 헤헤 삼촌의 데미안을 권했었고, 어린 시절 두 세계의 대립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심오한 알 까기의 카타르시스에 깊게 감명 받은 나는 한 동안 자연스럽게 고전을 멀리 했었다.
각설하고,
내일(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엄밀히 말하면 개편)된다. 목적과 취지는 대형/온라인서점들의 대폭적인 할인율에 맞서 경쟁해야 하는 동네서점 및 영세상인들의 시장 보장과 무분별하게 찍어내는 도서들을 지양하고 더 좋은 작품에 대한 선택적인 출판을 위해서다. 시행방법은 신간, 구간 할인을 15%로 제한한다고 한다. 신간은 기존 19% 할인(사실상 30~50% 가능했던)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할인율에 제한이 없었던 구간까지 제제를 가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논란이 많다.
개인적으로 더 좋은 작품 출간에 대한 취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동네서점을 살리기 위한 유용한 정책인지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첫 번째, 남는 가격은 어디로?
대형 서점과 동네 서점이 출판사로부터 들여오는 가격은 규모의 경제 때문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동일한 서적에 대해서라도, 판매가 1만원의 책을 동네서점은7천 500원 내외로 공급받는 반면 대형/온라인 서점은 4~5천원에 들여올 수 있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할인율의 크나큰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도서정가제를 도입해 1만원의 책들을 동네서점이나 대형서점이나 9천원에 판다한 들, 결국은 남는 이익은 보조금 단통법으로 배불리는 통신사처럼, 대형서점 및 유통사의 이익만 커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도 똑같은 가격이면 그래도 동네서점을 더 많이 찾지 않겠느냐?
두 번째, 결국 찾는 건 어디로?
개인적으로 대형/온라인서점의 편리성이 동네서점의 근접성을 앞지르지 않겠느냐고 본다. 온갖 장르의 모든 서적을 구비한 규모, 찾는 서적을 빠르게 검색해주는 서칭 시스템, 포인트가 쌓이는 멤버쉽, 간편한 온라인 구매 및 무료배송 등의 서비스와 편리성을 같은 가격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네서점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확 바꾸진 않으리라고 본다.
차라리 정책적으로 동네서점 조합 사이트 개설을 지원해, 찾는 책이 있으면 제일 가까운 동네서점으로 안내해주는 지원을 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세 번째, 한국인들은 언제나 꼼수에 능하다.
대형서점들은 이래저래 포인트니 추가 할인을 하거나, 혹은 벌금을 무릅쓰더라도 재고떨이를 위해 대폭할인을 해올지도 모른다. (통신사처럼)
또한 창비라디오의 라디오 책다방 팟캐스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꼼수가 가능하리라고 짚어주었다.
1. 전집류와 세트 도서는 정가를 언제든 새로 매길 수 있다.
2. 온라인 오픈 마켓(Gx켓 등)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3. 카드사의 제휴할인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결론, 책 사세요!
도서정가제 개편 후 여러 편파적인 방법으로 대형/온라인서점이 책 값을 싸게 판다 할지라도50%에 육박한 할인가를 따라오기엔 어려울 듯 하다. 특히 읽고 싶었거나 소장 가치를 지닌 구간들은 40~50% 할인율이라면 구입을 충분히 고려할 만 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도 구입리스트 및 구입할 온라인 서점을 엑셀로 정리해 (네이버 책에서 검색 하면 보통 교x, 알x딘, 인터x크 중 하나가 제일 쌈) 일괄 구매 예정이다.
언제부턴가 책을 싸게 사는 게 당연하고 길들여져 버린 내 자신이 문제인지, 출판업계가 문제인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퇴근 길, 불 꺼진 한솔서점을 지나가며 도라에몽 한 권씩 이천 오백원 주고 사 모으던 시절이 사뭇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