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둘 밝혀지는 청와대의 '총체적 부실'…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1745일, 그는 수첩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을까
그 남자는 집요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 도중 현지에서 채용된 여성 지원요원을 불러앉혀 술을 마셨고, 그의 신체를 더듬었다. 밤새 술을 마셨고, 피해자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는 구실을 만들어 지원요원을 방으로 불러낸 뒤 자신의 알몸을 노출했다. 이때 성관계를 요구하고 욕설을 퍼부었는지 여부도 조사 중이다. 미국경찰이 개입하자 한국으로 도망쳤다. 기자회견을 열고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헌정사상 최초로 탄생한 여성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은, 청와대 대변인의 첫 글로벌 성추문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귀결됐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실이 확인된 이후부터 청와대는 이번 사안을 '윤창중 개인의 일탈적 행위'로 몰아가고 있다. 물론 그 인격과 행각의 잡스러움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잦은 청와대 대변인 교체를 지적하며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고 분신"( < 문화일보 > 2006년 4월25일치 칼럼)이라고 부르짖었던 그다. "저를 지배하고 있는 윤창중의 정체성은 정직"(3월27일, 청와대 브리핑)이라는 식의 표리부동도 입길에 오르내린다.
성추행 뒤 청와대·문화원이 무마 시도
동시에 하나둘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오히려 청와대의 '총체적 부실'을 웅변한다. 사태 초반 청와대는 파문의 진화에만 급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의 순방을 수행한 청와대 직원들과 대사관 산하 한국문화원이 함께 피해자를 설득·회유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피해 여성 주변에선 5월7일 밤에 이뤄진 1차 성추행 직후 문화원이 사실을 인지했지만 덮으려 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2차 성추행이 다음날 새벽에 발생하자 청와대와 문화원은 본격적으로 무마를 시도한다. 사건 직후인 아침 7시30분께 최병구 문화원장과 전광삼 청와대 홍보수석실 선임행정관이 윤 전 대변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 지원요원이 묵고 있는 호텔방을 찾은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면담은 10분 정도 이뤄졌다고 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귀국한 윤 전 대변인을 상대로 진행한 조사에서 "성관계를 요구한 일이 있느냐" "'나는 변태다'라는 발언을 한 일이 있느냐"고 물은 것도 당시의 면담에서 나온 지원요원의 증언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원장과 전 행정관은 곧 윤 전 대변인을 대동하고 2차로 피해 여성의 호텔방을 찾는다. 가해자인 윤 전 대변인이 직접 사과하는 선에서 사태를 무마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해 여성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현지 경찰에 성추행 사실을 신고했다. 피해 여성의 아버지는 현지시각 5월15일에 이뤄진 < 세계일보 > 와의 인터뷰에서 "어디 엉덩이를 툭 친 것(1차 성추행) 갖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러겠느냐"고 말해 5월8일 새벽 윤 전 대변인의 호텔방에서 이뤄진 2차 성추행이 직접적 신고의 원인이었음을 밝혔다
. 그는 "(윤 전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고 일반인(정상인)이 아니어서 우리가 더 이상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말도 했다. 윤 전 대변인의 서울행 항공권 예약과 공항까지의 이동에 청와대와 문화원 관계자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의 조직적인 '무마·은폐 의혹'이 불거지는 이유다.
'청와대 수석대변인' 망상
박 대통령이 사건 발생 만 하루가 훌쩍 지난 5월9일 오전에야 보고를 받았다는 건 청와대 내부의 보고체계 및 위기대응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태 이전부터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복마전' 그 자체였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윤창중·김행 두 대변인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반복됐다. 중요한 내용은 서로 자신이 브리핑하겠다고 나섰다. 외모를 중시한 윤 전 대변인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화장을 하고 다녔다.
청와대 출범 이후에는 김 대변인에게 공동 부담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고용하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은 당연히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4월16일 미국 순방 준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느라 박 대통령의 장애인 재활시설 방문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현장 일정을 두 대변인 모두 외면한 셈이다. 이같은 신경전 속에 청와대는 두 대변인을 모두 미국 순방에 수행토록했다가 "순방 기간에 국내의 언론 창구 역할은 누가 하느냐"는 비판 속에서 결국 윤 전 대변인만 수행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사상 초유의 윤창중 사태는 이같은 혼선 속에서 나왔다.
위계질서도 엉망이었다. 홍보수석실의 이남기 수석, 최형두 홍보기획비서관은 직제상 두 대변인의 상관이다. 이 수석은 예능 프로그램 PD 출신이고, < 문화일보 > 논설위원과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등을 거쳐 임명된 최 비서관(1962년생)은 윤 전 대변인(1956년생)보다 나이가 어리다. 오랜 기간 정치부 기자와 정치권을 오간 윤 전 대변인은 스스로를 홍보수석실의 '갑'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윤 전 대변인은 박 대통령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시점부터 개인적으로도 인연을 맺었다. 상관들보다 자신이 더 박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자신감이 잉태하게 된 배경이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이 수석은 "윤창중은 내 인생 최대의 악연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윤 전 대변인은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모두들 내가 인수위 대변인을 끝으로 짐을 싸서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박 대통령이 일찌감치 '윤 대변인! 청와대 수석대변인을 맡아주셔야 해요'라고 통보해주셨다. 얼마나 밝고 즐겁게 말씀하셨는지 아느냐"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인수위에서 윤창중의 첫 직책은 '당선인 수석대변인'이었다. 하지만 각종 논란 속에 '대변인'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 출범 과정에서 그의 직책은 김행 대변인과 수평적인 '공동 대변인'이었다. 과대망상이었을까?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속에서 그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청와대 수석대변인'의 지위를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를 외면하고 그를 중용한 박 대통령의 왜곡된 용인술이 '윤창중의 갑질 행각'을 부른 주요한 요인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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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또 다른 피해자?
여당에서도 청와대의 '전면 쇄신'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의화 새누리당 의원은 5월16일 "해외 순방 때는 공직기강팀을 동행시키겠다는 이야기도 하던데 그런 미봉책으로는 곤란하다. 청와대 내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보고체계를 개선하는 등 전면적인 쇄신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캠프 금주령'을 내리는 등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김무성 의원은 "청와대에 근무하는 공직자는 금주 선언을 하는 등 각오의 일단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조해진 의원은 "윤 전 대변인 스스로 수석보다 실세라고 느끼는데 수석이 어떻게 그를 통제할 수 있는가. 현재의 청와대는 힘의 분배가 제대로 안 되고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윤 전 대변인 개인만의 문제일까? 박 대통령의 이번 순방을 지원한 다른 지원요원들도 청와대 순방단 전반에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청와대 직원이 지원요원에게 방에 술을 가져오라고 시키는가 하면 "이왕이면 여자 인턴이 가져오게 하라"는 말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스캔들은 이미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됐다. < 뉴욕타임스 > 는 "남성 상사의 부하 여직원에 대한 성추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국 풍토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고 보도했다. <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 은 "박근혜 대통령은 도덕 수준이 의심스러운 인물을 주요 공직에 임명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소개했다. 영국의 < 데일리텔레그래프 > 는 "한국의 성평등 순위가 세계 135개국 가운데 108위로 아랍에미리트(UAE)보다 한 계단 낮다"고 보도했다.
결국 문제는 대통령 자신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윤창중 사태'의 또 다른 피해자쯤으로 여긴다. 야심차게 준비한 첫 미국 순방이 측근의 성추문에 묻혀버렸다는 당혹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월15일 청와대에서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가진 만찬 간담회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성범죄는 내가 대선 때부터 4대 악으로 규정해 뿌리 뽑겠다고 외쳤는데, 이렇게 돼서 민망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전문성을 보고,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인물이 한번 맡으면 어떻겠느냐 해서 그런대로 절차를 밟았는데도 엉뚱한 결과가 나와서 내 자신도 굉장히 실망스럽다. (윤 전 대변인이) 그런 인물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인사 검증의 보완, 미국 사법 당국의 수사 결과에 따른 추가 조치 등을 약속했다. 이남기 홍보수석의 사의를 수용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윤 전 대변인 임명은 대통령의 판단
박 대통령은 그동안 어떤 문제에 대해 본인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한 적이 없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언급도 늘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진정성 논란을 빚었다. 조각 과정에서 7명이 낙마한 사상 초유의 인사 파동에서도 박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허태열 비서실장이 "국민에게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짤막한 사과문을 주말 밤, 그것도 김행 대변인의 대독 형식으로 발표했을 뿐이다. 이번 사태 직후에는 이남기 수석이 "국민과 대통령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민망하기 그지없다"는 발언은, 아마 박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사과 표현의 최대치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윤 전 대변인의 임명은 전적으로 박 대통령 본인의 판단이었다. 박 대통령은 비뚤어진 역사관, 상대방에 대한 증오에 가득 찬 독설을 숨기지 않아왔던 윤 전 대변인을 입안의 혀 같은 존재로 여겼다. 윤창중이 인수위 대변인으로, 또다시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될 때마다 여당 내 친박 인사들은 물론 청와대 측근들 사이에서도 그 인선의 의외성을 두고 뒷말이 돌았다.
박 대통령이 자질 미달 판정을 받은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의 임명을 강행한 게 불과 한 달 전인 4월17일의 일이다. 이상일 새누리당 대변인조차 "청문회에서 '모른다'를 연발한 윤 장관이 방대한 해수부 조직을 잘 통솔할 수 있을지 국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도 같은 날 임명을 강행했다. 모두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거부된 인물들이다. 박 대통령 자신이 창조한 '윤창중이라는 괴물'은 청와대 출범 80일 만인 5월15일 공식 면직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임기는 1745일(5월17일 기준) 더 남았다.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윤창중들'은 청와대와 내각에 이미 포진해 있다
. 박 대통령이 자신의 '사람 보는 눈 없음'을 인정하고 귀를 열기 전까지 '윤창중들'은 계속 중용될 것이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시스템의 보완을 외치는 건 어느 정권의 청와대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대통령 자신이 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는 수첩을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을까?
송호균 기자[email protected]
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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