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bestofbest&no=63453&page=1&keyfield=&keyword=&mn=&nk=%BB%E7%B6%F6%C7%E0&ouscrap_keyword=&ouscrap_no=&s_no=63453&member_kind= ↑링크
스압...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긴 글입니다.
글 본문에 대한 사견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댓글.
그것도 블라인드 먹은 동의폭도라 라는 고정닉의 댓글에 대한 사견입니다.
이 고정닉의 댓글들의 요지는
"시위 때문에 선량한 시민이 피해본다"
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민' 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에 '선량한' 혹은 '악한' 등의
가치판단적 단어가 붙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노태우 정권 시기부터입니다. 근현대사나 국사를 공부하면서 혹은 시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노태우 정권의 구호(캐치프레이즈?)인 '보통사람' 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보통사람' 이라는 구호를 사회학에서는 일종의 '구별짓기'로 여깁니다.
'구별짓기'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이론으로서,
자본주의에서의, 취향을 통한 계급의 차별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이 많은 A씨는 비싼 외제차를 탑니다. 하지만 돈이 적은 B씨는 국산 소형차를 탑니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사치하는 것은 장려할만한 행위입니다.
그런 시스템에 A씨와 B씨는 충실히 순응하고 있죠.
그리고 이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취향 차이로 인해 A씨와 B씨는
자신이 서로와 계급(혹은 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짓기입니다.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 하에서 '보통사람' 이라는 구호를 통한 구별짓기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우선, 노태우 정권의 구별짓기는 전대의 정권, 즉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에서 실시한
우민화 정책이 우선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운 하나는 타고 났달까요.
Sex, Sports, Star 로 대변되는 우민화 정책은 우선 쾌락을 이용하여 고통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지식인 계층과 대중을 멀리 떨어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력을 상실하게 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노태우 정부는 노선을 바꿔서 보통사람을 강조합니다.
이 보통사람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의 보통사람. 즉 서민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한 법과 제도에 순응하여 시위를 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는 선량한 사람일 수도 있고
뭐 이 외에도 능력이 평범한 보통사람 등.. 해석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죠.
노태우 정권은 특히 두번째에 그 의미를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언론을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내보냈죠. 이는 고통에 지친 대중들을 회유하기엔 아주 적합한 방법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 전반적으로 운동권, 노조, 노동자와 보통사람은
격(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계급)이 다르다는 인식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이후
새롭게 물꼬를 트던 모든 시민운동(시위를 비롯한 광의적 의미)은 사그라들기 시작했고요.
그리고 2012년 현재, 사회에 큰 이슈가 된 시민운동들을 인터넷을 통해 돌아보자면 우민화 정책과
미묘한 구분짓기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또한 사회가 점점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대중들은 개인, 즉 내면에 몰두하기 시작하고, 이는
정치에 대한 염증과 외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힘들거든요. 고통과 상처를 직시하는 것이.
이런 현상은 공론장이 점차 사라지는 것으로 대변됩니다. 근대의 살롱, 커피하우스(카페), 광장 등.
대중이 모일 수 있었던 곳 어디든 공론장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비판적이고 의식적으로 대중은 다시 고통과 상처를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꿘'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맑스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할 만 했던
거대 담론이 무너진 지금은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좀 더 자본주의적으로, 대중에게 먹힐만 하게
홍보하고 알리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한 일면에서 '나꼼수'가 나왔고, 다들 아시다시피 초대박을 터트렸죠.
윤리도덕적인 면은 제쳐두고서라도 '나꼼수'는 정말이지 아주 세련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째, 방송용의 구어가 아니라 대중들의 구어를 사용한 점. 욕설들이 터져나올땐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정도죠. 그 외에도 대중들이 솔깃할 만한 강도높은 이야기들을
시작으로 논리와 증거를 풀어놓는다는 것. 물론 이는 진중권씨가 말했듯 더 높은 강도를
요구하게 되고, 끝내는 선을 넘게 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론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만,
대중의 접근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주 세련된 방법입니다.
둘째, 자비를 들여 방송한다는 점. 이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아진 현 정권에서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이전부터 동양은 서양에 비해 무목적 비영리성에
이상할 정도로 호응이 높습니다. 아마 관계와 맥락, 즉 '끈(緣)' 을 중시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들 과자 하나 사면 친구와 나눠먹은 적 있죠? 또 학교에서 나눠주는 사랑의 저금통 등등에도
다들 꽉 채우진 않더라도 빈 통을 들고오는 사람은 드물었을겁니다.
물론 나꼼수는 정치적 목적성이 있습니다만, 일단 비영리라는 점에서 이유없이 가산점이 붙는겁니다.
셋째, 온라인 상의 방송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의 콘서트를 계획하여, 지속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
물론 이는 나꼼수가 인기를 얻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만, 이러한 지속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콘서트 등은
대중을 공중으로 변화시키는, 공론장을 마련해주게 됩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이를 언로言路 라고 하죠. 이런 '말의 물꼬'를 트게 된다면 지금까지 막혔던 말의 물살이 거대한 파도로
변화하게 됩니다. 새로운 언로의 개척이라는 이 하나만으로도 나꼼수는 의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구분짓기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욕망이 구분짓기를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죠. 짧은 식견으로나마 글 몇 자 끼적여봤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