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 피는 연꽃‘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었을 것이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순결한 꽃을 피운다는 연꽃.
여러분은 연꽃과 수련의 차이점을 아시는가? 둘을 구분하기는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잎의 모양과 꽃의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그리고 수련은 물 바로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연꽃은 물 위로 올라온 줄기에서 꽃을 피운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그 진흙탕 물을 정화시켜 맑게 해준다. 각박하고 불의에 가득 찬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온 몸으로 투쟁하는 인간이 연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수련은 연꽃과 같이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진흙탕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티 끝 한 점 없는 수련 꽃을 피운다. 세상을 비록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단 한 점의 순결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수련 꽃으로 피어나는 인간일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환경이 어지럽고 불의에 가득 차 있다고 느낄지라도,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아직은 세상을 바꾸기에는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진흙탕 같은 세상일지라도 한 점의 아름다운 글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연꽃처럼 세상을 정화시키는 인간인가? 아니면 수련처럼 진흙탕 속에 살면서 한 점의 순결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인간인가? 만약 둘 다 아니라면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연근은 연꽃의 뿌리로서 식용 가능하지만, 수련의 뿌리는 식용하지 않는다. 연 밭이 어느 정도 자라면, 연못의 물을 빼낸 다음에 연못 바닥의 흙을 파헤쳐서 연근을 캔다. 종종 연근을 캐는 장면을 보노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더 오래 살 수 있는 연이 죽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희생으로 연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다. 반면에 수련은 식용 불가능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다. 독자들은 죽은 후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아무런 먹을 것을 남기지 못하는 수련이라고 해서 꼭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나 재산을 후세에 남기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한 평생을 헛산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진흙탕 속에서 수련 꽃을 피웠듯이, 살아생전 단 한 점의 순결한 마음을 피웠었더라면 아무 것도 남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화아(花芽)  
명사
<식물> [같은 말] 꽃눈(자라서 꽃이나 화서가 될 싹). ‘꽃눈’으로 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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