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1.김재규의 출생지</div> <div>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박씨 가문 종교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경북 구미 출생</div> <div>즉 박정희의 고향 후배</div> <div> </div> <div>2.김재규는 5.16 쿠데타에 참여했나?</div> <div>아님, 오히려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던 이종찬 장군 계열의 인물이었고 이로인해 5.16 쿠데타 직후에는</div> <div>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연금당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와 동향 출신에 육사동기라는 이유로 풀려나서 군에 복귀했음</div> <div>(박정희도 김재규도 모두 해방이후 육사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산관학교 2기생임)</div> <div> </div> <div>3.언제부터 박정희 정권에 참여했나</div> <div>유신 직후인 73년 초 3군단장으로 지내던중 사실상 강제예편 했음. 이건 당시 쿠데타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던 박정희가</div> <div>군내에 명망높은 장성들을 조기예편 시키는 방법을 자주 썼는데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됨.</div> <div>그후 유신정우회의 국회의원을 거쳐서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등을 지내다가 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됨</div> <div> </div> <div>4.중앙정보부장 김재규</div> <div>온건주의 노선으로 중앙정보부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음.</div> <div>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거나 강압수사를 금지시키고 중앙정보부를 대외정보 활동에 주력하는 부서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음</div> <div>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김재규의 온건주의 노선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철과 경호실로 옮겨가게 만들었음.</div> <div>즉 박정희의 명령이라면 미친개 마냥 따르던 차지철과 독재자 박정희의 눈에 차지않던 김재규의 다툼에서 김재규가 밀려난 것</div> <div>만약 김재규가 전임 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나 이후락 같은 인물이었다면 권력다툼에서 차지철에게 밀려날 일도 없었을듯</div> <div> </div> <div>5.김재규와 박정희</div> <div>-71년 대선당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임을 국민들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고 그걸 믿었는데 유신이 발표되자</div> <div>박정희가 다 망쳐놨다며 부하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는 증언이 다수 있음.</div> <div>-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있던 당시 휘하 연대의 작전참모였던 오춘근은 김재규가 박정희가 3군단 순시를 올때 그를 강제연금하고</div> <div>하야성명을 받아낸다는 계획을 수립한적이 있었음을 증언했음.</div> <div>-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유신시절 당시 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자신을 찾아와 박정희를 환자에 비교하며 노골적으로</div> <div>비판하는 걸 듣고 굉장히 놀랐다고 했음. 김재규는 당시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부탁까지</div> <div>했다고 함.</div> <div>-또한 의외의 사실은 의문사 당한 고 장준하 선생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고 함.</div> <div>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씨는 75년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 시절 중앙일보사 근처의 냉면집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졌을때</div> <div>자신이 직접 수행했으나 둘이서 무슨 밀담을 나눴는지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음.</div> <div>둘은 이미 75년 이전부터 꽤 친분이 있었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 당한 뒤에도 그 가족들을 도왔다고 함.</div> <div>또 장호권씨의 증언에 따르면 76년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가 자신을 찾아와 장선생은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div> <div>제거되신거다 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있음</div> <div>-장준하 선생의 측근들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은밀히 거사를 준비했고, 거사의 협조자이자 군에 명망있는 인사중에</div> <div>자신을 도울 사람이 있음을 말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김재규일 거라고 추정하는 사람이 많음. </div> <div> </div> <div>이와 관련된 오마이뉴스 기사</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4511" target="_blan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4511</a></div> <div> </div> <div>6. 79년 10월 26일</div> <div> </div> <div>이날의 사건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는 워낙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니 넘어가고</div> <div>중요한건 이날 거사가 과연 계획적인 것이냐 우발적인 것이냐에 대한 견해만 밝히고 마무리 하겠음.</div> <div>이날의 거사 직후 김재규가 벌인 이해 할수 없는 행동들을 미루어 보건데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계획은 절대 아니었다고 봄</div> <div>단지 이전의 증언들을 미루어 보아 김재규는 처음부터 유신체제에 대해서 상당히 노골적일 정도로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고</div> <div>때마침 격화되던 부마 항쟁의 현장을 직접 보고온 김재규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사단이 날 것이다라는</div> <div>생각을 했을거라고 봄.</div> <div>그러나 하필이면 현장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이 캄보디아,폴포트 등을 언급하며 대규모 학살을 벌일수도 있음을 시사하자</div> <div>더이상 참지 못했을거라 추측됨.</div> <div>왜냐 학살이 벌어진다면 그순간 부터 자신이 유신에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떻게든 피해를 막아보려 했다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고</div> <div>똑같은 학살의 공모자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임</div> <div>김재규가 직접 보고온 부마항쟁의 열기는 대규모 유혈 사태로 진압되던지 아니면 박정희가 물러나던지 말고는 해결책이 없어 보였을거라</div> <div>생각됨. 그러니 학살의 공모자가 되느니 차라리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죽여야 되겠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섰을거라 봄.</div> <div>그러나 짧은 시간 생각해서 벌인 일이다 보니 차후의 대책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었고 어쨌거나 자신도 대통령을 죽였다는 정신적인 충격에서</div> <div>판단력이 흐려진채 적절한 사후대책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육본으로 가면서 결국 뒷일을 망쳐 버린것이 아닐까 생각됨.</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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