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앗! 너 지금 거기에 뭐 넣는 거야?!”
목이 마르다는 지예의 투정에 물을 뜨러 잠시 부엌에 갔다 오는 사이, 희연이가 내 맥주잔에 무언가를 넣고 있었다.
“헤헤, 이거 그거야, 어, 음, 레모온.”
반쯤 허공을 을 보며 말하는 데다가 발음마저 살짝 꼬여 있다.
“너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자라.”
하고 희연이가 들고 있는 조그만 페트병을 빼앗았다.
칵테일용 레몬 엑기스. 물에 희석해서 드셔도 좋습니다.
“저기 쌓여있는 소주병 냅두고 왜 내 맥주에 레몬 엑기스를 집어 넣은 거야?! 게다가 이건 또 어디서 났어?”
“화낸다아, 나쁜 놈. 아까 냉장고에 있길래 나중에 소주 타 마시려고 꺼내 놨던 거란 말야. 줘어.”
희연은 웃으면서 나쁜 놈이라고 말하며 페트병을 다시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시끄러! 그러면 소주에 타지 왜 맥주에 들이 붓는데?”
말은 이렇게 해도 안 돌려주면 분명히 삐질 테고, 술에 취한상태에서 삐지기까지 하면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위험의 소지가 다분하니, 페트의 뚜껑을 최대한 꽉 잠가서 돌려주었다.
술에 취한 상태론 열기 힘들 테지.
페트병을 품에 안고 낑낑대는 희연이를 내버려 두고, 원래의 목적대로 지예에게 물을 건넸다.
“자.”
“희연이랑만 놀아주고, 나빠.”
얜 또 왜이래?
“그게 같이 논 걸로 보여?”
“응.”
대책이 안 서는군.
이럴 땐 조력자가 필요하기에, 아까부터 희연이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는 녀석을 불렀다.
“야, 거기 너! 구석에 앉아서 게임만 하지 말고 이거 정리하는 것 좀 도와!”
“소리치지마, 애들 놀라잖아. 이 판만 하고 끝낼게.”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에잇, 신경질 나.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쳤다.
“아까부터 그 소리잖아!”
“야!!!”
우왁, 놀래라.
지예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지예를 돌아봤다.
화, 화난 것 같은데, 표정이 무시무시 하다.
“시끄럽잖아! 조용히 좀 해.”
“네, 네에.”
지예는 술에 취할수록 부쩍 짜증이 늘어서, 가능한 신경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희연이네 부모님이 외박을 한다고 해서, 친구들 몇 명이랑 희연이 집에 놀러 온 오늘에야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술을 사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남자라고 데려온 녀석은 몇 잔 마시고 난 이후론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고 희연이는 놀아달라고 보채고 지예는 그걸 보면서 짜증을 내며 힘든 일은 나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힘들고 짜증나 미칠 것 같다.
아악! 내가 다시는 얘네들 술 먹이나 봐라!
그사이 지예는 희연이를 불러서 놀고 있었다.
“희연아, 손.”
척, 하고 손을 내미는 희연.
지예는 그런 희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착하다.”
“헤헤헤.”
그래, 이대로 둘이서 놀고 있으라고.
희연이가 어질러 놓은 과자 부스러기들을 대충 밀어 놓은 다음,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좋아, 이제야 가만히 버드와이저를 음미할 수 있겠어.
수입 맥주치고는 상당히 저가의 맥주지만, 국내 모 기업에서 대리생산을 하는 물량도 상당히 많아서 싼 걸지도 모른다, 탄산이 강해서 선호하는 맥주이기에 이번에도 다른 사람 몰래 몇 캔 사와서 따로 잔에 담아뒀던 것이다.
“꿀꺽, 켁, 케엑!”
하지만 목에 걸려 반쯤은 원래 잔에 뱉어내고 남은 반쯤은 겨우 삼켰다.
“지예야, 쟤 술 먹다 갑자기 죽으려고 해.”
“저런 거 신경 쓰지마. 우리 희연이는 저런 거 닮으면 안 된다.”
술 취한 여자 둘이서 죽이 참 잘도 맞는군.
“네가 탄 레몬 엑기스 때문이잖아!”
정말로 엑기스였는지, 신맛이 목구멍을 찔러서, 그것도 레몬 엑기스를 탔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로 마신 탓에 갑작스레 인후를 강타한 그 충격을 겪는다면 누구나 사래가 들릴 거라고!
하지만 큰소리를 낸 게 문제였는지 지예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으윽, 큰일인데.
“헤에, 나도 레몬 타줘어.”
하지만 희연이가 페트병을 들고 다시 다가오자, 지예는 뭔가 다른 불만이 있는지, 화낼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누워서 등을 휙 돌렸다.
그래 차라리 좀 자게 놔두는 것도 좋겠지.
그나저나 희연이 얘는 눈치가 없는 건지 있는 건지 모르겠네.
“너도 그만 마시고 가서 좀 자라.”
“나쁜 놈, 혼자만 마시고. 나도 레모온.”
네가 먹게 만들었잖아! 하고 소리치려다가, 다시 지예의 신경을 건드리는 날엔 도무지 좋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희연이에 대한 짜증은 꿀꺽 삼켜두고, 다시 한 번 지원군을 부르기 위해 구석을 돌아봤다.
저, 저 녀석 일부러 이어폰 끼고 하는 거지?! 아까는 안 꼈잖아!
“하아, 한잔만 타 준다.”
결국 포기하고 술을 좀 더 먹이기로 했다.
좀 더 취하면 술기운에라도 잠들겠지.
지예의 짜증 이상으로 희연의 투정은 피곤하기에 둘 다 자는 게 훨씬 낫다.
하지만 몇 개의 빈 병만 있을 뿐 개봉한 병 중엔 남아있는 소주가 없었다.
그렇다고 맥주에 타 먹일 수도 없다.
“이거 맛 없어. 이상한 거 먹이지마.”
하지만 그 사이, 희연이는 먹다 남긴 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뱉어내며 투정을 부렸다.
맥주에 레몬 엑기스를 그만큼 탔으니 당연하지!
그보다 그거 내가 먹다 뱉은 거 아냐?!
“헉, 야, 그거 먹지마, 이리 내!”
재빨리 뺏어서 남은 내용물을 싱크대에 흘려 보냈다.
잠시도 쉴 틈을 안 준다니까, 정말.
컵을 다시 물에 몇 번 헹궈 든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그새 희연이는 멀쩡한 소주병 하나를 다시 까서 자기 앞에 놓은 다음, 레몬 엑기스가 담긴 페트병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 이거 안 열린다, 열어 줘어.”
인기척이 나기가 무섭게 쪼로로록 달려오는구먼.
“저기 컴퓨터하고 있는 애도 있잖아.”
“쟨 재미없어어. 그러니까 열어줘.”
난 재밌냐?! 어디가?
저기 구석에 가득 쌓여있는 불만은 잠시 내버려 두고, 일단 얘부터 재우고 봐야겠다.
역시 술을 더 먹이는 수 밖에 안 떠오르는군.
우선 따놓은 소주병에서 소주를 한잔 정도 따라 낸 후, 레몬 엑기스를 조금 붓고 뚜껑을 다시 닫은 다음, 적당히 내용물이 섞일 만큼 흔들었다.
“자, 이것만 마시고 자는 거다.”
하지만 희연이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냉큼 머그잔에 가득 따르더니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저거 맥주 따르려고 가져온 컵이잖아! 누가 저걸 안치우고 저기에 둔거야!
“헤헤, 맛있다아.”
하지만 희연이는 그런 내 마음속의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반쯤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더 줘어.”
나에게 병을 내미는 희연이.
머그잔 한 잔 정도론 모자란 건가.
“자.”
다시 머그잔에 반 정도 채워 줬다.
거 참 꿀꺽꿀꺽 잘도 마시네.
“또?”
지긋이 바라본다.
으음, 그렇게 바라보면 부담스럽잖아.
다시 반 정도 채워줬다.
하지만 희연이는 이번엔 바로 마시지 않았다.
“너도 마셔어. 나만 마시면 재미 없어.”
미안하지만 난 소주를 그렇게 컵으로 들이킬 만큼 강하지 않은데.
“마셔, 나쁜 놈.”
윽, 어, 어쩔 수 없나.
나는 씻어온 채로 가만히 놔뒀던 맥주잔에 병에 남은 소주를 마저 부었다.
잔에 4분의 1정도 되려나.
“건배애.”
희연이의 거의 풀린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잔을 들이켰다.
“맛있다.”
“그치이?”
맥주에 탔을 때는 몰랐지만, 소주에 적당량을 타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과연 머그잔 채로 먹어도 특별히 거부감이 안 들 정도로 술 맛을 순화시켜 준다.
이렇게 먹으면 술 맛이 덜 나기에, 자기도 모르게 많이 마시다가 쓰러지기 딱 좋다.
하지만 지금의 목적은 내 앞의 악적을 쓰러뜨리는 것이기에 이대로 먹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새 소주를 하나 따서 레몬 엑기스를 탔다.
소주는 지예가 산다고 해서 맡겼는데, 도대체 몇 병이나 사온 걸까.
“빨리 줘어.”
잡념을 깨는 희연이의 풀린 목소리(어째 표현이 이상하군)를 들으며 다시 서로의 컵에 소주 with 레몬엑기스를 따랐다.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나도 취한 걸까.
하지만 희연이 혼자는 안마실 것 같기에, 희연이는 잔뜩 따라주고 나는 반만 따르는 꼼수를 부려서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인가 더 마셨다.
얘는 눈은 다 풀렸으면서 왜 이렇게 안 잠드는 거야.
세 번째 병을 깠다.
병에 레몬 엑기스를 넣다가 실수로 살짝 흘린걸 희연이가 아깝다며 병을 핥았고, 바닥에 떨어진 엑기스를 핥기 전에 제지하여 레몬 소주를 완성하여 따랐다.
하하, 건배!
네 번째 병을 깠다.
음, 안주도 필요한 법이지. 상 위에 적당히 벌려져 있는 과자 봉지 중에 내용물이 남을걸 찾아서 몇 개 꺼내먹었다.
그 사이 희연이는 혼자 한잔을 비웠다.
“어이! 술을 혼자 마시면 안되지!”
하고 희연이의 잔을 채워준 다음 내 잔도 채워서 다시 쭈욱 들이켰다.
헤헤, 이거 맛나는 걸.
근데 희연아, 너 왜 자꾸 왔다 갔다 하냐?
술을 따르려고 보니 병이 비어서, 다시 한 병을 까서 서로의 잔에 따랐다.
레몬 엑기스를 타는걸 깜박한 것 같지만 뭐 상관 없나.
“자, 마시자!”
이 이후로 내가 기억하는 첫 번 째는,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있는 나를 깨우기 위해 게임만 하던 놈이 내 뺨을 몇 대 치다가 지쳐 먼저 돌아 간 것과, 다시 몇 시간인가 잠들었다 깨어난 뒤 희연이네 화장실을 한 시간 가까이 전세 냈던 기억이다.
뒤에 생각하니 집주인인 희연이와 내 등을 두들겨 주던 지예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지만, 당시는 당장 죽을 것 같아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오쯤에 들린 희연이네 집을 자정 가까이에야 나올 수 있었다.
그리도 며칠 뒤 만난 지예와 희연이에게 쓴소리도 상당히 들어야 했다.
못 마시는 술을 왜 그리 마셨냐고.
뭐, 핑계야 희연이를 내세워 봤지만, 지예의 엄포에 찔끔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결국 둘의 점심을 사 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시절의 정겨운 에피소드지만, 당시엔 없는 돈에 밥까지 사주고도 눈치가 보여 몇 주간이나 기를 못 펴고 살았었다(다시 생각해보니 원래 그 둘에겐 기를 못 폈던 것도 같지만).
하지만 언제까지고 같이 지낼 것만 같던 우리였는데, 어느샌가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해서, 지금에 와선 신년 인사조차 주고 받지 않게 되었다.
벌써 얼마큼이나 잊고 살았을까, 최근에, 나중에 사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난 여자가 마시던 KGB레몬을 보고서야 사래가 들릴정도로 강렬했던 레몬 맛 버드와이저와 그 둘에게 기죽어 지내던 날들이 생각 났다.
그때의 우리들은 어디서 잘못된 걸까, 하는 생각에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종종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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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일단 자작이긴 한데 수정이 덜된 초고본이라 어색한점이 많네요ㅠ
(사실 마무리부분을 3~4줄정도 바꿔서 완전 초고은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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