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블로그에 쓴 글이라 경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입을 것 먹을 것은 대강 챙기고 사는 나에게도 단 한 가지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몸에 지니고 다닐 장비만큼은 내 취향에 정확히 맞는 것을 고르자는 거였다.
나는 항상 EDC용 고정식 날붙이를 찾고 있었는데, 워낙에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들어오는 물건을 찾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여튼 내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5만원 이하의 저렴한 것.
닳거나 상하면 버리면 되고, 잃어버려도 타격이 적다.
예전에 겨울 바다에 놀러갔다가 빅토리녹스를 빠트린 채 돌아온 경험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2. 풀 그립이 가능할 것
힘을 강하게 줄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 풀그립은 꼭 필요하다.
3. 위협적이지 않을 것.
아무데서나 꺼내 들어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해야 한다.
기타 : 요철날이 없을 것.
날 세우기 겁나 빡셈...
나이프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다.
고정식 날을 가진 나이프에게 저 세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나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내 취향에 맞는 나이프를 찾다가 알게 됐다.
가격이 저렴하면 강재가 구리고,
풀 그립이 가능할 정도의 핸들 길이면 날 크기도 따라서 커지며,
날이 크고 길수록 위압감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신께서도 나처럼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불쌍한 변태가 있다는 걸 익히 알고 계셨는지, 절충안을 만들어 놓으신 상태였다.
Buck의 팩라이트 케이퍼가 그 주인공이다.
일단 가격이 저렴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금속 본연의 색을 가진 새틴 버전이 배송비 포함 3만원이 안 된다.(검은색으로 코팅된 버전은 몇 천원 더 비싸다.)
가격이 저렴한 만큼 강재가 좀 거시기 하다.
420HC. 이건 그냥 식칼이다. 어디 가서 험하게 휘두를 물건이 아니다.
Buck의 열처리 기술로 록웰 58~59를 맞춘다지만 본질은 스뎅이다.
이 나이프의 원래 용도를 알게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진다.
이 나이프는 스키닝 나이프, 즉 사냥감을 해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이프다.
케이퍼라는 이름이 그걸 잘 대변해주는데, 케이핑이란 가죽을 벗기는 행위(특히 사슴의 가죽)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420HC를 쓴 것도 이해된다. 동물의 피나 기름이 잔뜩 묻을 수밖에 없는 스키닝 나이프라면 굳이 비싸고 부식이 빠른 탄소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완벽한 풀그립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일단 핸들이 길다.
스켈레톤 타입이라 파지감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게 완벽한 풀그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결정적으로 날 길이가 짧다. 전체 길이가 대략 17센티. 날 길이는 6센티에 불과하다.
무식하게 날이 긴 일반적인 나이프에 비해 우아하고, 보는 사람을 위협할 소지가 적다.
이거라면 평상시에 가지고 다녀고 괜찮을 것 같다.
쉬스는 나일론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쉬스에는 일반적으로 허리띠에 부착할 수 있는 형태의 고리가 마련되어 있다.
몰리 타입이거나 카이덱스로 만들어진 쉬스였으면 좋았겠지만, 원래 용도를 생각해보자면 이런 형태로 만드는 게 당연하지 싶다.
다만 한 가지, 드레인 홀(물기 배출하는 곳)이 뚫려 있지 않은데, 나일론으로 플라스틱을 감싸다 보니 타공 후 마감처리를 하지 않으면 올이 풀릴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타공 후에 올이 풀리지 않도록 가공하려면 또 별도의 처리를 해줘야 하니, 단가도 상승할 것이다.
단점을 꼽자면, 쉬스의 형태 때문에 스켈레탈 스타일의 핸들에 파라코드를 감거나 테이핑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부분까지 플라스틱이 감싸게 되는데, 폭이 좁다보니 무언가를 감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원래 용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지 싶다. 파라코드를 감으면 피나 기름에 쩔어버릴테니...)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에 널링(그루브?)이 새겨져 있다.
끄트머리 마감이 다소 유감이긴 하지만, 2만원 대 나이프에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
지금껏 EDC 나이프로 쓰려고 했던 것들과 나란히 한 컷.
허약해 보이긴 하지만 주변 사람을 위협하는 것 보다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