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r></div> <div>후설에게 영향을 끼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브렌타노'는</div> <div>모든 인식을 물리 현상과 구분 짓고 심리현상으로 보아, 심리적 특징인 지향성이 존재 내부에 함축하고 있다는 입장을 가지는데요.</div> <div><br></div> <div>따라서 브렌타노는 '대상과의 관계'를 심리작용에 관계되는 '그 무엇'이 없이는 심리작용이 있을 수 없다. (목적없이 실체도 없다)</div> <div>라는 주장을 합니다.</div> <div><br></div> <div>이에 반해 후설은 지향성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작용이 그 무엇을 '대상화'한다고 보았는데</div> <div>이 말뜻이 잘 이해되질 않습니다.</div> <div><br></div> <div>그래서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항상 적절한 예시를 만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요. </div> <div><br></div> <div>저의 예시 중에 어떤 예시가 더욱 가까운지, 또는 진짜 적절한 예시는 어떤것인지.. </div> <div>위의 두 철학자가 주장하는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대상과의 관계'의 차이점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봐주셨으면 합니다.</span></div> <div><br></div> <div><br></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나의 예시1)</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 '씨앗'을 선험적태도로 바라보았을때 질료라고 전제하고, 순수형상이 '꽃'이라고 가정했을 때</span></div> <div>씨앗이 꽃이 되기 위해 (운동의 원인인 '목적'을 따라) 지향작용을 한다. 라고 보면</div> <div><br></div> <div>브렌타노의 입장 : 씨앗의 내부에 이미 꽃을 향해가는 '목적, 지향성'을 함축하고 있는데, 만약 씨앗 내부에 목적이 없다고하면</div> <div>애초에 씨앗 자체도 존재할 수 가 없다. 씨앗과 목적은 동시 작용한다.</div> <div>후설의 입장 : 씨앗안에 지향성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씨앗의 목적으로서 대상화된다 (?)</div> <div><br></div> <div><br></div> <div>나의 예시2)</div> <div>- A를 사랑한다. 에서 A를 목적, 사랑한다를 지향작용으로 본다면</div> <div><br></div> <div>브렌타노의 입장 : A라는 인물(사랑한다의 목적)이 없이는 사랑하다라는 지향작용도 없다. </div> <div>후설의 입장 : 사랑하기 이전의 연인으로서의 A(사랑한다의 목적)는 없었다. 그리고 A를 사랑할때 비로소</div> <div> 연인으로서의 A를 대상화 해간다.</div> <div><br></div> <div>( 예시를 적으면서도 아리송하네요...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그리고 후설이 상기와 같은 주장을 하며 덧붙인 말,</div> <div><br></div> <div>' 다양한 소여(given, 주어진 것)를 의미의 동일한 지시체에 속한 것 들로 통합한다. '</div> <div>' 동일한 대상의 각각의 양상들을, 지평을 이루는 관련된 양상들과 관계 맺도록 한다. '</div> <div><br></div> <div>이것이 한마디로 왜 '대상을 구성한다' 라고 표현될 수 있는지..</div> <div><br></div> <div>며칠간을 궁리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ㅠ,ㅠ</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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