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은 스탈린에게 꼭 악재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소전을 거치면서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는 더욱 확고해
지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은 전후에 발매된 우표인데, 대전 중에 스탈린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보
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29. 대조국 전쟁
비록 제한적인 반격이 이루어진 42년이지만 이 시기는 독소전의 중요한 분수령이었습니다.
41년만 하더라도 소련은 곧 와해될 듯 했죠. 특히 홀로도모르와 대숙청 시기동안 스탈린 치
하 소비에트의 잔인성에 치를 떤 우크라이나 같은 지역에선 독일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독일군들이 이 지역으로 진격했다가 주민들에게 꽃다발이나 소금과 빵 (손
님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의 전통이라고 함) 을 접대 받았습니다. 이전부터 소련 정권에 비
협조적이던 카작들은 스스로 독일군에 합세했고, 한 때 그 수가 25만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비록 자발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긴 했지만 무려 100만명이나 되는 소련인이 조국을 향해
싸웠을 만큼 소비에트 정권은 인기가 없었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와 나치 또한
스탈린 만큼이나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독특한 인종 철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광신적이고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
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이미 1920년대에 우크라이나와 소련의 광활한 대지에 독일 민족
을 위한 생활 공간 - Lebensraum 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이 지역에 독일인을
위한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전에 있던 원주민들은 우랄 산맥 동쪽의 시베리아로 내쫓
거나 혹은 일부는 노예 노동력으로 각종 토목 공사등에 동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죠.
따라서 우크라이나 인이나 발트 3국의 국민들의 바램처럼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치당을 이들을 철저히 착취할 계획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고, 바로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죠. 이 계획과 관련해서, 한창일 때 5천만명을 그 관할에 둔 우크라이
나 총독령을 관할한 에리히 코흐의 취임 연설은 특히 유명합니다. "본인은 야수 같은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움켜쥘 수 있는 물건을 모두 빨
아먹는 것입니다.... 본인은 여러분이 토착민을 최대한 가혹하게 다루기를 기대하고 있습니
다" 이 연설은 곧바로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나치당은 유태인 정도는 아니라도 슬라브인이
나 우크라이나 인들을 열등 민족으로 여겼고, 괴링은 우크라이나 인도 절멸시키기를 희망했
지요. 전쟁 수행에 특히 필요한 식량은 마구잡이로 약탈되었고, 수많은 피점령지에서 공산
당이나 포로, 그리고 지식인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처형 역시 마구잡이였습니다.
일례로 어떤 나치 관리가 글을 쓸줄 아느냐고 묻자 한 농부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순진한 농부는 '지식인' 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나치와 독일군의 태도는 결과적으
로 러시아인들의 거대한 공분을 사기에 적합한 행동이었죠. 특히 42년 초 독일군 점령 지역
을 직접 본 소련 병사들은 침략자들을 증오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많은 가
옥이 불에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던 것입니다. 소련의 선전 기구들은 본래 날조의
달인들이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사실을 조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 소련의 인민
들과 붉은 군대는 침략자를중 단 한명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련 인민의 분노를
촉발한 사건으로 18세 소녀인 조야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녀는 파르티잔 (빨치산) 의 일
원으로 독일군에게 쓸모있는 물건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구간에 불을 질렀다가 잡혀
서 잔인하게 고문을 받고 죽었습니다. 소련군이 도착했을 때 왼쪽 젖가슴이 잘린 조야의 얼
어붙은 주검이 매달린 채로 발견되었죠. 사실 이것은 독일군이 한 수많은 잔혹행위 중 하나
에 불과했습니다. (훗날 그녀의 이야기는 연극으로 공연되는데, 주인공 조야가 죽는날 밤 스
탈린의 환영이 조야에게 찾아와 모스크바가 구원되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가지 비하
인드 스토리는 대숙청 기간 이 불쌍한 소녀의 부모가 모두 숙청되는 바람에 조야는 부모의
오명을 씻고자 이런 자살행위 같은 임무를 자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당시 대
숙청과 독일의 침공으로 고통받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아무튼 일련의 사건
들은 러시아 인민들로 하여금 조국 수호를 위해 일어서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었
습니다. 이른바 '대조국 전쟁' 이 시작된 것입니다. 흔히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독소전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으로 여기고, 쿠르스크 전투를 그 다음으로 여깁니다. 분명 군사적인 측
면에서 맞는 말이죠.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애국심
이야 말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인민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산 시점에서 히틀러는 전쟁에서 서서히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았죠. 이제 스탈린 동무의 연설에서 혁명이나 레닌 동지가 차지하는 비중
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조국이나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한 여러 영웅들이 그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과거 구 러시아 제국의 휘장이나 군복이 다시 들어오고, 어머니 러시아(러시
아 인들이 조국을 칭하는 말)가 다시 숭배 받았습니다. 이 시기 극적인 변화 중 하나는 러
시아 정교회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대숙청 기간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거의 절멸되다시
피 했지만 미증유의 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시 살아돌아온 것입니다.
다만 이전에 신에 대한 믿음을 설교하던 주교들은 '신과 스탈린'에 대한 믿음을 지키라고 설
교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역시 독일과의 싸움에서 예외가 될 순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은 기갑부대 창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일 정도였죠. 이제 스탈린은 불과 몇 년전에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 구국의 영웅으로 일어섰습니다. 독소전 초기 흔들리던 인민들은
이제 독일군에 대한 복수심과 조국애로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상
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죠. 42년 여름, 다시 정신을 차린 독일군이 공세를 시작하자 소련
군은 곧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