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러시아를 위하여!!! 우라!!!
28. 모스크바 전투
1941년, 레닌그라드에 신속히 도달한 독일군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월 경에는 레닌그라드 주변을 완전히 포위한 독
일군은 급조되었지만 훌륭한 방어 진지 앞에서 이 도시를 끝내 점령하는데 실패한 것입니
다. 그리고 이 방어전을 지휘한 것은 바로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였습니다. 이제
모스크바가 레닌그라드처럼 풍전 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스탈린은 주코프를 다시금 이 도시
를 방어하기 위해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그냥 주코프가 도시를 지켜주기만 숨어
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탈린도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쿠이브이세프로 수
도를 옮길 생각을 했습니다. 주요 자료들과 특히 중요한 레닌의 유해가 극비리에 이송되었
죠. 그러나 공황에 빠져 붕괴되는 소비에트 인민들을 보자 스탈린은 결국 자신의 결심을 바
꾸게 됩니다. 41년 10월 16일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하겠다는 성명서가 발표되고 19일에는
다시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비록 탈출용 비행기가 따로 있긴 했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
에 남아 이곳을 지키겠다는 점을 명백히 선언한 셈입니다. 이제 소비에트의 누구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이 독재자는 나름 뚝심을 발휘한 것입니다. 러시아 전쟁 (Russia's War :
국내에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됨) 의 저자인 리처드 오버리가 지적
했듯이 새롭게 방어 사령관이 된 주코프는 비록 무오류의 인간은 아니어도 천재적 지휘관이
었습니다. 그가 독소전 (2차 대전 중 동부 전선을 가리키는 말) 에서 맡은 책무는 너무나
중요해서 만약 그의 능력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연합군과 소련, 그리고 스탈린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지도 모릅니다. 비록 독소전에서 소련이 이긴게 전부 그의 힘은 아니지만
그의 힘이 가장 컸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주코프로도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래 소련군은 9월초 독일군 공세 이전에는 80만명이었지만 10월
경 주코프가 지휘권을 인수할 땐 9만명이 전부였습니다. 병력은 물론 장비마저 심하게 부족한
상태였지만 일단 그는 모자이스크 방어선으로 불리는 모스크바 주요 방어선을 강화했습
니다. 레닌그라드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방어진지 구축에 동원
됐습니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하는 병력 충원에 나섰습니다. 갑자기 없는 병력이
솟아날 순 없는 일이기 때문에 소련군은 당시 일본 측면을 수비하고 있던 시베리아 병력을
수도로 불려들였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군사 행진을 하고 나선
바로 전선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다행히 길이 진창이 되면서 독일군의 진격이 느려져 그나마
소련군은 준비할 시간을 벌 수가 있었죠. 11월이 되고 추위가 몰려오면서 땅이 딱딱하게 굳
자 히틀러는 다시 진격을 명령했습니다. 히틀러 생각에는 이제 모스크바는 다 잡은 물고기
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대한 오판에 불과했죠. 일단 제한된 병력으로도 주코
프는 매우 방어선을 잘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추위가 몰려왔
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서방 연합군의 편견처럼 러시아의 살인적인 추위가 소련의 승리를
보장한 것은 아니라도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단기전을 생각했던
독일군은 방한 준비가 형편없었습니다. 특히 독일군 차랑은 소련군 차량과는 달리 혹한기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이것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냈죠. 사실 7월말까지 독일군은 소
련군을 유린하면서 겨우 4만 6천명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키예프, 레닌그
라드, 모스크바 전투에서 11만 8천명의 목숨을 잃고 전체 병력의 25%이 부상하거나 해서
전투력을 크게 잃었습니다. 비록 이렇게 계산해도 266만명이 죽고, 330만이 포로로 잡힌
붉은 군대의 희생에 비해 미미하긴 하지만 아무튼 독일군은 12월 초 기진 맥진하여 더는
공격하기 어려운 사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퇴각해서 병력을 보존하자는 모든 장군
들의 간청을 외면하는 히틀러의 고집만이 전투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결국 독일
군의 손실은 늘어만 갔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상황이 절망적이긴 했지만 독일군 사령부는
그래도 소련군은 더 이상의 예비 부대가 없고 지금 싸우는 부대가 마지막 부대일 거라는 희
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비록 600만에 이르는
손실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에서 계속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고 있었고, 앞으로 전쟁 기간중
더 많은 병력이 충원될 예정이었습니다. 거의 무한히 공급되는 소련의 인적자원이야 말로
독일군이 결국 패배한 중요한 이유였죠. 아무튼 이렇게 독일군의 예봉이 꺽어지고 그 손실
이 크게 늘어나자 한때 흔들리던 스탈린도 평정을 찾았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영국 대사를
접견하고 화려한 연회를 열어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전후 동유럽에 친
소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여기엔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
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후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므로써 이제 소련은 부유한 동맹군이 생겼죠. 그리고 결정적으
로 독일군은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한게 확실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한층 더 기고만장해졌
습니다. 그는 주코프를 비롯한 여러 군 지휘관에게서 지휘권을 뺏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를 구한 영웅들의 명단에서 주코프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련군의 다른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주코프를 몹시 시기하고 질투했죠. 그러
나 당장은 독일군의 위협이 사라진게 아니므로 그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42년 1월 5일
주코프는 다시 서기장 동무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이제 독일군을 향
해 역공을 가해 침략자들을 몰아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비록 다른 장군들이 모두 침묵했지
만 주코프는 지금 독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칠 시기가 아님을 설득했습니다. 스탈린 동무
의 조급증이 준비되지 않은 소련군을 독일군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주코프의 설득으로도 서기장 동무의 결심을 바꿀 순 없었죠. 42년 초, 스탈린은 다시 추위
가 물러가는 봄까지 추위에 약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장군들을 닥달했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앞서 히틀러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8만명을 손실한데 반
해 소련군은 무려 44만명을 잃었지만 소련군은 약간의 영토만 되찾고 본래 점령하려던 목
표는 전혀 이룰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귀중한 전력만 손실을 입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러한 패배가 꼭 무익한 건 아니었죠. 반복되는 실패에서 스탈린을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습
니다. 비록 전쟁 이후에는 전쟁에 승리한 건 모두가 스탈린의 천재적 영도력 때문으로 선전
되긴 했지만 42년 이후로 스탈린은 주코프를 비롯한 군사 전문가들의 의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라이벌인 히틀러와 중요한 차이점이었습니다.
1.독일군과 달리 소련군은 동계 장비를 잘 갗추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법이죠.
2.독일군의 모스크바 포위망은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동장군의 거센 반격이 시작됩니다.
3.소련군은 이 기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하지만, 큰 성과는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