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KGB의 상징 마크입니다. 칼과 방패는 소련 최초의 비밀경찰인 체카의 상징이기도 했죠. 오늘은 본
격적인 대숙청 시대를 이야기하기 전에 소련의 비밀경찰의 역사를 간단히 서술해 보겠습니다.
19. 공포 정치와 비밀 경찰
1930년대 초반, 경제 부분에서 반 쿨라크 캠페인과 농업 집단화로 이미 많은 피를 본 스탈린 이었지만 아직
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피바람은 농업 부분 이외의 부분에서도 진행되고 있었죠. 당
시 소비에트의 상황을 보면 국민에 행해진 국가의 테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테러의 중심에는 비밀경찰
이 있었습니다. 사실 소비에트 비밀 경찰의 역사는 소비에트의 탄생과 같이 했다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
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오흐라나가 있었지만 소비에트 비밀 경찰은 그 규모
가 매우 컸고, 반대 세력의 처벌에는 무엇보다 처형을 선호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소비에
트 비밀 경찰인 체카는 레닌의 지시로 10월 혁명 6주 후에 창립되어 일단 반 혁명 분자들을 숙청하는 작업
에 동원되었습니다. 수장은 제르진스키였는데 당시 한창 반혁명 분자를 숙청할 때는 하루 1500명의 반동 분
자들을 처치한 적도 있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프랑스 혁명이 요란하게 길로틴이다 뭐다 해서 피
의 혁명 같지만 러시아 혁명이 이런 부분으론 소리없이 강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체카 시절 숙청
된 사람의 수는 아주 많지는 않아서 적백내전이 끝날 때까지 '불과' 1만 2천명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요. 하지만 기록이 불완전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5만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으며 일부에
서는 50만 사망설을 추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레닌의 지시였는데, 이런 점을 보면 소비에트 정
권의 잔인성에 있어 꼭 스탈린만 욕할 문제는 아닌듯 싶습니다. 물론 청출어람이란 말이 있듯이. 스탈린은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레닌의 업적을 대량 숙청에 있어서 만큼은 분명히 넘어섰습니다. (물론 레닌은 스탈린
을 제자로 생각 안하겠지만) 체카는 1922년 엔카베데 (NKVD : 내무 인민위원부) 산하의 게페우 (GPU)로 명칭
을 변경했고, 이 시기에 스탈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후 1926년에는 오게페우 (OGPU) 으로 명칭
이 바뀌었는데. 1926년 제르진스키가 죽고난 이후 맨진스키 (Vyacheslav Rudolfovich Menzhinsky) 가 1934년
까지 수장을 맡게 됩니다. 1934년에는 오게페우는 다시 NKVD 산하로 흡수되어 엔카베데에 의한 테러가 야고
다/예조프/베리야에 의해 순서대로 행해지게 되고 특히 예조프는 난쟁이 악마라고 불리며 악명을 떨치게 되
지요.
20. 공포 정치의 성과
비록 당시에 조작이 많이 가해진 건 사실이지만 5개년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국민 소득은 거의 두배
로 증가했고 총산업생산도 137 % 증가했지요. 자본재의 경우 무려 285%의 성장을 기록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
니다. 비록 이를 위해 엄청난 인민이 희생되긴 했지만 말이죠. 특히 소련에 부족한 기자재와 설비를 수입하
기 위해 많은 양의 식량을 수출했고, 이 과정에서 1933년에는 대기근을 겪었다는 것은 앞서 홀로모도르 관
련 글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5개년 경제 개발의 성과는 소비에트 인민은 붉은 피로 성취된 것이었습니
다. 소비에트의 가장 평범하고 힘없는 농민 노동자들의 희생위에 건설된 스탈린의 강력한 소비에트는 사실
인민들의 복지를 위한 소비재의 생산은 뒷전이었죠. 비록 많은 이들이 도시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의무교육
의 확대로 문맹율은 급격히 낮아지지만 대다수 인민들의 삶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중화학 산업 및 군수 산
업 위주의 경제 성장은 많은 인민들에게 이전과 큰 차이 없는 빈곤과 배고픔을 가져다 주였죠. 그러나 어쨌
든 후진 농업국인 러시아는 이제 공업국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하여 적어도 1940년대에는 공업 생산력에
서 다른 서방 국가에 견줄 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비
에트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히틀러의 침공이 임박했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스탈린이 서방 국가의 침공에
대비해 공업화를 서두른 점은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로써 자국
국민을 그렇게 희생시켜서 목적을 달성하려 한 점을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보긴 어려울 것입니
다. 여담이지만 이시기 (1932년) 독재자 스탈린도 그의 국민들처럼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탈
린의 독단적인 스타일로 인해 자주 다투던 아내 나댜 알릴루예바가 자살로 불행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집안에서 부리던 가정부들이나 고용인들은 이일을 두고 수근거렸고, 그 중 한명은 스탈린이 나댜를
죽인거나 다름없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이는 매우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1935년에 모
두 체포됩니다) 스탈린은 크게 흔들렸고, 측근들은 스탈린도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죠. 그러나 소비
에트 인민들에게는 비극적으로 그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본격화할 대숙청을 생각한다면 이
는 정말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1.5개년 계획의 성과를 선전하는 포스터입니다.
2.스탈린의 두번째 아내인 냐다 알릴루예바입니다.
3. 초대 체카 수장인 제르진스키입니다.
4.제르진스키의 뒤를 이은 맨진스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