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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의 머릿속은 아드레날린 내분비로 끊임없이 교란되고 있었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설사 자신이 생각하고 우려하는 일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불
안감에 전신이 후들거렸다. 그는 급하게 엄마를 찾았다.
“어, 엄마! 엄마! 어디있어요? 나와보세요!”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집 안은 한결같이 조용했다. 빗소리가 더욱 맹렬해졌다. 장마철인
탓인지 비가 그칠 새 없이 퍼붓고 있었다. 기철은 숨을 헐떡이며 멀찍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집 안은 아무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파릇
파릇 떨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까닭모를 불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버지는 비가오는 날 밤이면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행동을 개시하곤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아버지가 집밖을 나서지 않았다. 기철은 현관에 아버지의 구두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신발 옆에는 엄마의 구두도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불길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하는 정점에서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기철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댕, 댕, 댕, 댕!”
괘종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렸다. 갑작스런 소리에 기철이 화들짝 놀라 괘종시계가 있는 2층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아버지의 서재가 뇌리를 스쳐지났다. 그는 황급히 2층 계단을 밟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오, 여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거지만 당신의 그 맛은 일품이야!”
소름끼치도록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윽고 기괴한 소리가 연거푸 들
려왔다.
“우걱우걱, 쩝쩝, 우드득! 우드득!”
뼈와 살을 발라내서 무식하게 씹어먹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기철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벅, 벅, 벅, 벅!”
누군가가 손톱으로 방문을 긁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다음이었다.
“제, 제발... 살려줘요... 여보...”
기철은 놀란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기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산채로
뜯기면서 엄마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고양이에게서 사람으로 그 대상을 바꾼 건 엄마가 죽고 난 그 날부터였다. 사람의 맛을
알아버린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의 냄세만 맡아도 침을 흘렸다. 광기에 젖어드는 아버지 때문에
기철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게 되었다. 혹시라도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의 눈에 띄게 된다면 자신도 엄마와 똑같은 꼴이 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비오는 날 밤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밖을 나섰다. 하지만 그 대상이 이제는 고양이가 아닌 사
람으로 바꼈을뿐이었다. 새벽 늦은 시간 아버지가 잘려나간 사람의 신체를 가방 한 가득 짊어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역겨운 피비린내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삐걱- 삐걱-”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밟고 아버지가 2층 서재로 올라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기철은 빠끔히 방문
을 열어보았다. 아버지는 늘 하던대로 피에 젖은 가방 안에서 그것들을 꺼내 괘종시계안에 담아내
고 있을 것이다. 기철은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괘종시계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일종의 부식고같은 개념이었다. 아버지는 그 곳에 자신이 들여 온
일련의 수집품들을 모두 넣어두었다가 배가 고플때마다 꺼내 먹었다. 귀중품들을 수집해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결국 완전히 ‘자신의 것’ 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행동 제약이 없는 시간은 바로 비오는 날 밤 아버지가 수집품 채집을 끝내고 집
으로 돌아온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2층 서재에서 식사를 끝마칠때까지 기철은 1층에서 화
장실과 간단한 식사, 또 기타 필요한 물건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너무 오래동안 방 밖으로 나와 있는다면 2층에 있는 아버지가 사람 냄세
를 맡을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기철은 며칠동안 물과 누룩 곰팡이가 퍼렇게 핀 빵
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또 엄마가 죽고 나서 정상적인 식사
를 해 본 기억이 없었다. 누룩 곰팡이가 핀 빵 마저도 이제 거의 떨어져가는 실상이었다. 기철은
밀려오는 공복감을 이기지 못하고 정수기에서 한 컵의 물을 뽑아냈다. 오랫동안 필터를 갈아주지
못해서 정수기 안에선 시퍼런 녹물이 새어나왔다.
“삐걱- 삐걱-”
바로 그 때였다. 나무 계단을 밟고 아버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
했다. 기철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일그러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철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부엌에서 방까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어서 방까지 도약하는데 일말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제 시간 안에 방에 도착해서 방문을 걸어 잠그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눈에
띄어 영락없이 잡아먹히는 생쥐 꼴이 나고 말 것이다.
기철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버지는 이제 몇 초 후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몇 초 안
에 안에 방까지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버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짧은 찰라의 순간에 기철은 굉장히 극심한 딜레마
에 빠져버렸다. 방으로 돌아가는게 최선책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리수가 있었다. 기철은
차선책으로 몸을 숨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몸을 숨길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이제 아버지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
가 없었다. 기철은 거의 미끄러지듯이 소파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식은 땀이 이마 밑으로 흘러내려 눈을 찔렀다. 기철은 호흡을 최대한 조절해가면서 눈커플을 힘들
게 깜빡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기철은 간신히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1초라도 번복
됐다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디 쥐 새끼 한마리가 숨어 있나? 흐흐”
아버지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흘렸다. 어두운 소파 밑에 몸을 낮게 웅크린 기철의 시야에 들어오
는 거라곤 짐승처럼 털이 복실한 아버지의 발뿐이었다. 독수리처럼 길고 뾰족하게 뻗어 있는 아
버지의 발톱은 영락없는 짐승의 것이었다. 기철의 관자놀이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기철이 너 맞지?”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머리속이 또다시 하얘졌다. 기철은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적시며
숨을 죽였다. 소파 밑의 더운 공기가 얼굴을 에워쌌다. 기철은 숨을 몰아쉬었다. 더이상 참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더 참고 있다가는 살얼음판 같은 침묵을 깨고 곧장 입밖으로 소리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기철은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은 기철이 흘린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뒷목이 뻐근해는 것만 같
았다. 기철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보려 했지만 여의치않았다. 바닥에 흘
린 땀 때문인지 미끄러워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는 몇번이고 부엌을 서성이더니 이내 포기한 듯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2층 서재까지 완전히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기철은 소파 밑에서 쉽사리 나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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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밤이면 아버지는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집 밖을 나섰다. 연일 계속해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버지의 식욕을 돋우는데 주력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밤 또 한차례 폭우
가 있을 것이라 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가방을 메고 집밖을 나섰다. 오늘 밤은 몇 구의 사체가
아버지의 가방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돌아 올지 기철은 궁금했다.
빗발이 거세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일기예보에서 예견한대로 폭풍우가 몰아쳤다. 맹렬하게 몰아치
는 폭풍우에 창문이 매몰차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집밖을 나선 건 한참전이었지만 기철은 조심
스럽게 방 문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때까지 기철은 최대한 신속
하게 움직였다. 기철은 재빨리 다용도실로 향했다. 다용도실에는 여러가지 도구가 어지럽게 깔
려 있었다.
정면으로 맞서서 아버지에게 당해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도구에 의존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미치광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기철
은 괜히 측은해졌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따윈 없었다. 이미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의 곁을 떠난지 오래였다. 그건 그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육에 미쳐 날뛰는 미치
광이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죽어 있었던 것이다. 저 빌어먹을 시계가 아버지의 영혼마저
잠식해버린 것이다.
기철은 다용도실에서 듬직한 야구배트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후두부를 강타해서 그 육중한
몸을 무너뜨리는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배트가 워낙 단단하고 무게감이 있어서 약간의 힘만
실어서 내려친다면 잘하면 한방에 보내버릴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폐륜아라 몰아세울 게 분명했지만 기철은 개의치 않았다. 이건 단지 정
당방위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기철은 자신의 엄마가 당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그
괴기스러운 입 속으로 빨려들어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기철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
날 기철은 본능적으로 생명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경찰에게 과실치사로 위장시킨다면 경찰은 명백히 그의 말을 믿어줄 것
이다. 언론에서는 연거푸 ‘연쇄 살인범’ 에 대해서 언급했다. 기철은 그게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경찰은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경찰이 아버지를 연행했을 때 아버지
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집안에 불을 꺼놓고 기철은 2층 아버지의 서재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수집을 끝마친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2층 서재였다. 적절한 위치에 숨어있다가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야구배트로 내리치는 것이다.
신중함과 노련함이 요구되기에 기철은 모든 행동에 만전을 기했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
다. 한방에 보내지 못하면 자칫 전세가 역전되기 십상이었다.
기철이 서재로 들어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엄청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서재 중앙에는
아버지의 괘종시계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었다. 악취는 시계 안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 스산하
고 이질적인 기운이 시계에서 감돌았다. 마치 악령이 깃들린 것처럼 시계는 떡하니 입을 벌린채
서 있는 모습이었다.
- 어서 먹이를 넣어줘 -
시계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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