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뭔가 전래 공포?글이 많아서 시류에 편승해봅니다</div> <div>------------------------------------------------</div> <div>1차 출처 루리웹 백택 님</div> <div>2차 출처 오유 <a target="_blank" href="http://www.todayhumor.co.kr/board/list.php?kind=member&mn=93994" target="_blank"><font color="#666666"><b>gerrard</b></font></a> 님</div> <div> </div> <div>창귀란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의 원귀를 일컫는 말로 중국과 한국.인도에 전해지는 귀신 입니다..<br>특히 우리나라는 창귀에 대한 민간설화가 많은데 그만큼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이 많았다는 걸 얘기합니다..<br><br>'조선시대의 작자미상인 청우기담(聽雨奇談)'을 보면 <br>창귀는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의 영혼으로, <br>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되거나 호랑이 몸에 달라붙는다고 합니다..<br>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고<br>(박지원의 호질에서는 창귀나 호랑이가 양반을 꾸짖는 긍적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br>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 특히 태백 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불립니다. <br><br>창귀는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고 저승으로 가기위해 `사다리' 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br>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으로 산사람을 해치는 악귀적 행위 입니다..<br><br>창귀는 늘 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그 사람을 홀려서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대려 간다고 합니다.. <br>그래서 호랑이에게 먹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말려도 창귀가 씌여 자꾸 나가려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br><br>또 반대로 호랑이에게 씌어서 호랑이에게 광기를 일으키게 해서 사람들을 살생 하도록 조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br>호랑이는 보름달이 뜨거나 14살 직후가 되면 이유없이 미쳐서 날뛴다고 하는데 이것이 창귀때문이라는 겁니다..<br><br>창귀는 무섭고 끈질기기 때문에 예전부터 창귀를 막는 법이 전해져 왔습니다..<br>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장손이 호랑이의 심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방법입니다..<br>그럼 창귀의 원혼이 사라져서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br><br>또다른 방법은 창귀가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겁니다..<br>우리나라의 산간 지역에는 호식총(虎食塚)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하는데 <br>호랑이가 먹다 남긴 사람의 시신을 불에 태운다음 돌상자에 재를 넣고 그주위를 돌로 높게 쌓고 위에 돌시루를 넣는 방식의 무덤입니다..<br><br>시신을 태우는 것은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고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뜻함과 동시에 <br>창귀를 무거운 돌로 눌러서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br><br>이 호식총은 조선시대 산간지역에는 흔히 볼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전설도 많이 있습니다..<br><br>태백시 창죽 조대장터 어귀에 힘이 장사인 김씨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김 장군'이라 불렀습니다. <br>그는 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옛말에 눈썹이 길면 호식(虎食) 당할 상이라 했다고 사람들이 말하니, 그는 크게 웃으며 그런 소리 말라 하였습니다. <br><br>까마귀가 몹시 울던 어느날, 김씨는 집앞 개울가에서 나무를 하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br>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김씨의 배를 찍어 당겼습니다. <br>놀라 일어난 김씨는 호랑이와 혈전을 벌였습니다..<br><br>근처에 있던 아내가 달려왔으나 너무 놀라서 떨기만 하다가 마을로 가서사람들을 불러 오려고 했습니다. <br>김씨는 아내에게 “사람 데리러 갈 것 없이 낫이나 도끼 아무것이나 나에게 던져만 주면 된다!”고 악을 썼지만 아내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br><br>아내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늦은 뒤 였습니다..<br>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화장을 한 뒤 돌담을 치고 시루를 엎으니 사람들은 그 자리를 `장군 화장터'라고 불렀습니다..<br><br>또 다른 이야기는 태백시 문곡동 편뜰에 살던 대(大)씨 집안의 여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채 며칠을 보냈습니다. <br>집에서는 아이가 어디 아픈가 하면서도 별일은 없겠지 하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br>어느날 저녁 아버지는 장에 다녀와서 잠시 누워있었고,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고 있었습니다. <br><br>그때 갑자기 방문이 버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가 나타나 아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 갔고.사람들이 달려갔지만 <br>장세마골 산등 바위 위에 호랑이가 아이의 머리를 핥고 있었습니다..<br><br>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으나 호랑이는 아랑곳 않고 혀로 아이의 머리를 핥아 빗어서 왼쪽으로 가르마를 지어 놓어 놓고는 사라 졌습니다 <br>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고 시루를 엎어 놓았다고 합니다..<br><br>이런 얘기는 불과 40~50년전에 태백산 주변에서 일어난 `실화'로서 호식총(虎食塚)이라는 물증과 함께 구전돼 옵니다. <br>우리나라에는 그리 험하지 않은 산에도 숲이 울창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습니다. <br>그 마당에 느리고 힘약한 동물인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례가 무수히 많았고 <br>호랑이를 무서워해 “범에 물려갈 놈”이라는 악담이 생겼고, 악독한 전염병(콜레라) 이름을 `호열자'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br><br>'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2년에 경상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라는 기록이 있고, <br>중종 19년에는 황해도에서 호랑이에게 상한 사람이 4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br><br>영조 19년에는 평안도 강계에서 20여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으며, 영조 28년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에 들어왔고, <br>영조 30년에는 경기도에서 한달동안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이 120여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br>이처럼 한양 한복판에도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니 산간지역의 호랑이 출몰은 빈번할 정도 였습니다..<br><br>태백산맥의 어미산인 태백산을 중심으로 사방 200~300리 안에는 예로부터 화전민이 많이 살았습니다. <br>이들 화전민이 호랑이에 대한 피해는 비일비재 였다고 합니다..<br><br>기록에 의하면 태백시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밑 화장터 등 태백에 33곳, <br>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범든골 호식터를 비롯해서 삼척에 53군데, <br>정선군 북면 유천리 송천 건너 개금벌 속골 호식터 등 정선에 33곳, <br>영월시 상동읍 구래리 연애골 호식터 등 영월에 5곳 등..<br><br>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일대 산간마을에 <br>이르기까지 파악된 곳만 해도 무려 158곳에 이릅니다. <br>이런 곳에는 영락없이 호식총이 들어서 있고, 10여년전까지만 해도 호식되어간 상황 목격담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촌로들이 살고 있었다 합니다. <br><br>그러면 왜 태백산 일대 사람들은 호랑이 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호랑이골에 눌러 살았을까요?<br>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였습니다..<br><br>“혹독한 정치와 관리의 횡포, 과중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 猛於虎)”는 공자의 말처럼 <br>태백산맥 안으로 들어와 살던 화전민 가운데는 혹독한 세상, 과중한 세금과 부역 등에 쫓겨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br><br>그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더라도 나라 눈치는 안보겠다는 심정으로 화전을 일구며 살았으며, <br>호식된 상황을 신성한 경지로 격상시켜 슬픔을 미화하려 했습니다. <br>우리나라의 산신령이 호랑이 등을 타고 나타다니는 것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br><br>또 우리나라 설화를 보면 호랑이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표현 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격하시켜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br>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의지표현이라고 합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