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글 : 김어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총수)
고등학생이 돼서야 알았다. 다른 집에선 계란 프라이를 그렇게 해서 먹는다는 것을. 어느 날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다.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의 수만큼 계란도 딱 세 개만 프라이되어 나온 것이다. 순간 ‘장난하나?’ 생각했다. 속으로 어이없어 하며 옆 친구에게 한마디 따지려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놀리는 친구의 옆모습을 보고 깨닫고 말았다. 남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난 다른 집들도 계란 프라이를 했다 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판씩은 해서 먹는 줄 알았다. 우리 엄마는 손이 그렇게 컸다. 과자는 봉지가 아니라 박스 째로 사왔고, 콜라는 병콜라가 아니라 PET병 박스였으며, 삼계탕을 했다 하면 노란 찜통-그렇다, 냄비가 아니라 찜통이다-에 한꺼번에 닭을 열댓 마리는 삶아 식구들이 먹고, 친구들까지 불러 먹이고, 저녁에 동네 순찰을 도는 방범들까지 불러 먹이곤 했다.
엄마는 또 힘이 장사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온 집안의 가구들이 완전 재배치되어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구 배치가 지겹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그 즉시 결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으니 작은 책상이나 액자 따위를 살짝 옮겼나보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사할 때나 옮기는 장롱이나 침대 같은 가구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려 다녔으니까. 오줌이 마려워 부스스 일어났다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목장갑을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가구를 혼자 옮기고 있는 ‘잠옷바람의 아줌마가 연출하는 어스름한 새벽녘 퍼포먼스’의 기괴함은 목격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새벽 세 시 느닷없이 깨어진 후 팬티만 입은 채 장롱 한 면을 보듬어 안고 한 달 전 떠나왔던 바로 그 자리로 장롱을 네 번째 원상복귀 시킬 때 겪는 반수면 상태에서의 황당함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재수를 하고도 대학에 떨어진 후 난생 처음 화장실에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짝을 아예 뜯어내고 들어온 것도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낼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낙방하고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좌절하여 화장실로 도피한 아들, 그 아들에게 할 말이 있자 엄마는 문짝을 부순 것이다. 문짝 부수는 아버지는 봤어도 엄마가 그랬다는 말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듣지 못했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친척 어른들을 향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벌을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며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나 당차고 씩씩하고 강철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삼십 중반을 넘어섰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못한다. 단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을 뜯고 들어와서는 다음 번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쳤던 엄마, 사실은 바로 그런 엄마 덕분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롭게 사는 오늘의 내가 있음을 문득 문득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말을 못한다.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엄마의 휠체어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사신 거냐' 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
엄혹한 시절을 견디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김어준의 어머님 이복임 여사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번호 | 제 목 | 이름 | 날짜 | 조회 | 추천 | |||||
---|---|---|---|---|---|---|---|---|---|---|
친일파의 후손이 살인범의 후손 보다 나쁘다. [31] | rhaeo | 21/01/18 15:19 | 8534 | 63 | ||||||
8000대1의 경쟁률 뚫고 대상받은 초등학생 글 [42] | rhaeo | 21/01/09 21:00 | 13451 | 69 | ||||||
올한해 다들 Do a Bradbury 하시길 [15] | rhaeo | 21/01/03 23:58 | 9734 | 62 | ||||||
데톨만 보면 화가 나는 이유 [19] | rhaeo | 20/12/31 08:13 | 10597 | 78 | ||||||
좋은 친구들 [4] | rhaeo | 20/12/24 14:08 | 6253 | 42 | ||||||
대학교 기말과제로 제출한 영화중 가장 흥행 성공한 영화 [16] | rhaeo | 20/11/26 12:07 | 10400 | 63 | ||||||
법정스님에게 난을 선물한 이명박 [35] | rhaeo | 20/11/16 06:21 | 11554 | 52 | ||||||
현대차노조가 싫은 이유(주예지,이재용..그리고 전태일열사 50주기) [76] | rhaeo | 20/11/09 08:06 | 7465 | 54 | ||||||
노무현과 MB의 운전기사 일화 [53] | rhaeo | 20/10/30 06:04 | 11174 | 90 | ||||||
부르마블의 유래, 불로소득, 상속세 [13] | rhaeo | 20/10/26 06:47 | 8415 | 47 | ||||||
유병재 책 추천사..ㅋㅋㅋ [6] | rhaeo | 20/10/22 20:55 | 7701 | 49 | ||||||
▶ | 김어준의 <엄마> (김어준 공장장 모친 이복임 여사 영면) [38] | rhaeo | 20/07/10 01:20 | 7047 | 79 | |||||
친일파 후손이 살인범 후손 보다 나쁘다. [55] | rhaeo | 20/04/21 22:28 | 12849 | 79 | ||||||
조주빈 처벌보다 더 중요한일들.. [10] | rhaeo | 20/03/27 11:35 | 8681 | 51 | ||||||
국제 3대학술지 사이언스 대문(주모~) [12] | rhaeo | 20/03/20 16:49 | 8883 | 69 | ||||||
심심해서 쓰는 일본이야기(일본은 무엇으로 사는가) [19] | rhaeo | 20/03/03 09:57 | 8056 | 69 | ||||||
그래도 미통당 사랑하시죠?(feat 이만희) [29] | rhaeo | 20/03/02 18:49 | 8242 | 57 | ||||||
문재인 대통령 응원합니다 117만 돌파 [30] | rhaeo | 20/03/02 16:53 | 6830 | 51 | ||||||
영화제 학살자 봉준호 담주 일정 [27] | rhaeo | 20/02/13 10:33 | 16064 | 56 | ||||||
마틴스콜세지와 봉준호(마블, 봉준호의 감독상 수상 소감) [25] | rhaeo | 20/02/12 02:11 | 8096 | 55 | ||||||
기생충 재개봉 포스터 [11] | rhaeo | 20/02/10 14:57 | 10934 | 59 | ||||||
이동진에게 별점 2.5개 받은 박찬욱 영화 [9] | rhaeo | 20/02/07 16:56 | 10781 | 47 | ||||||
프랜시스 켈시 탈리도마이드, 이장덕 씨랜드 화재참사, 인천공항 검역관 [45] | rhaeo | 20/01/30 18:17 | 6314 | 87 | ||||||
정권별 전염 병 대처결과 (메르스, 사스, 돼지열병, 우한 폐렴) [88] | rhaeo | 20/01/28 04:28 | 9454 | 105 | ||||||
한국 모든 남자감독들의 꿈 [27] | rhaeo | 20/01/10 00:53 | 17175 | 53 | ||||||
조커..사회적 안전망(스포일러) [13] | rhaeo | 19/10/23 11:26 | 7994 | 45 | ||||||
내가 본 영화 최고의 장면 [9] | rhaeo | 19/09/29 17:16 | 11597 | 31 | ||||||
일본 소재 관련 짧은 생각(이공계 출신 무역 종사자)재업 [48] | rhaeo | 19/07/23 02:14 | 7820 | 88 | ||||||
봉감독의 또다른 명작(마더) [14] | rhaeo | 19/05/28 16:24 | 8349 | 36 | ||||||
가죽핸드백이 갖고 싶어(이종펌) [15] | rhaeo | 19/01/18 23:31 | 9365 | 44 | ||||||
|
||||||||||
[1] [2] [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