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코치는 저보다 게임을 잘 하고, 분명 픽밴도 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분 마음속을 읽어볼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 경기를 보면서 느꼈던 점을 좀 짚어보고자 합니다.
1. RNG
페이커의 아지르에 이어서, 니달리-루시안-뽀삐라는 픽은 뒤에 FW전에서도 드러났지만 이미 '준비해온' 조합이었습니다. 무슨 의미냐면 유동적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두가지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첫 번째는, 이미 내부 스크림에서 확실한 우위, 혹은 상승세를 보여온 조합을 오늘 실전에서 테스트하고 싶었던 가능성입니다. 조별리그는 플레이오프가 아니고, 2일차는 마지막 날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3, 4번 만날 상대인 RNG와 FW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팀, 즉 플레이오프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팀이라는 인식을 SKT 코치진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크림에서만 보여두었던 조합을 실전에서도 각인시켜 픽밴을 꼬이게 하는 효과를 유도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시연을 CLG나 SUP가 아닌 RNG전에서 했다는 것도 그 가능성에 대해 시사합니다. 명백하게 RNG에 대해 '이 조합에 대해 플레이오프 준비하는동안 신경써라' 하고 주문하고 싶었던 겁니다. 지금이야 모르지만 MSI 1일차까지만 해도 SKT는 절대 우위의 강팀이었고, 전력을 숨기지는 않지만 MSI 플레이오프를 위해 준비해온 비밀병기 (예를 들어서 롤챔스 결승전 픽밴의 핵심이었던 미드에코 가능성이나, 작년 MSI EDG우승의 원동력이었던 페이커 르블랑 저격조합 등)을 조별리그부터 사용한다는 건 엄밀히 말해서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SKT는 저 조합을 맨 처음 RNG에게 보여줌으로서, 뒤 순서의 FW도 당황하게 만들고 1주일의 시간동안 SKT의 진짜 비밀병기뿐만 아니라 저 조합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그래서 오히려 SKT가 준비한 진짜 비밀병기 (그게 뭐가 되었든 말이지요)의 연막 효과를 유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유동적이지 않은 조합으로 이길 경우 얻는 이점 또한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상성 조합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픽밴에 많이 구애받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조별리그 3일차 내내 저 조합만 썼거나, 오히려 악명 높은 미드 올라프나 스킨 출시할 라이즈 따위의 아예 짐작조차 가지 않는, 하지만 비밀병기라고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팬서비스 레벨의 조합을 시도했겠지요. 결론적으로 첫번쨰 가능성을 봤을 떄, 이 RNG전에서 승리했다면 사실상 SKT는 4일차 아침까지 딱 저 조합 하나만 보여준 상태로 MSI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팀들 대비 전력을 약간 덜 노출시켰겠지요. 이것이 첫번째 가능성입니다.
이제 두번째 가능성을 봅시다. 두 번째 가능성은, 저 조합 자체가 블랭크의 챔프 폭에 대한 페이크였을 가능성입니다. 블랭크 선수는 4월 8일부터 오늘, 플레이오프 내내 단 한차례도 니달리를 픽하지 않았습니다. 블랭크 선수의 시그니쳐 픽, 혹은 주력 챔프가 니달리라는 생각은 모든 팀의 코치진에게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4월 8일의 니달리 픽 역시 강팀이라고 보기 힘든 스베누와의 경기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RNG전에서 니달리 픽을 한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특히 저 조합의 비 유동성을 생각해봤을 때, 명백한 페이크입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킨드레드나 그레이브즈를 대놓고 저격하는 조합을 짜는 걸 막기 위해, 우리는 니달리도 쓸 수 있다! 라고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블랭크의 최근 챔프는 킨드레드-그레이브즈로 명확히 나뉘어져 있고, MSI를 준비하는 해외 팀들, 특히 중국 팀들에게 연막을 쳐 두기 위해서 니달리를 쓴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별리그 2패는 충격적이지만 우승 실패보단 낫습니다. 리스크적으로 봤을 때 팀 차원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작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이후 FW전의 픽밴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2. FW
꼬마 코치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LCK의 기라성같은 코치진들 사이에서도 명코치로 손꼽히고, 결승전 픽밴의 경우는 이미 인벤에 분석이 되어있습니다만 치밀한 두뇌싸움과 설계가 있었죠. 그런 코치가 오만과 아집에 가득차서 이미 시도한 픽밴을 한번 더 시도한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된다고 봅니다. 꼬치가 이 조합을 어거지로 밀어붙인 이유를 굳이 추측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미 작년 MSI에 꼬치는 상대방의 '저격 조합'에 피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몬테도 말했듯이 EDG의 마지막 경기 조합은 딱 하나, '페이커의 르블랑'이 아니면 절대로 안 먹일 저격 조합이었고 거기에 당했죠. 따라서 이번 MSI에도 중국 팀의 그런 저격 조합이 나올 확률이 높고, 그 저격 조합이 직격할 상대는 아마도 페이커가 아니라 블랭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대적으로 좁은 챔프폭을 가지고 있고, 신인이라 멘탈적으로도 비벼볼 수 있으니까요. RNG에 진 시점에서 꼬치는 이런 계산을 했을 것 같습니다. 1. 우리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이 확정적인가. 2. 그렇다면 연습해온 조합을 숨기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
1번의 답은 둘도 말할 것 없이 YES입니다. 플레이오프는 6팀중 4등만 들면 갑니다. 거기에 3, 4등 진출의 차이는 전력노출 쪽에서 봤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SKT가 플레이오프의 못 갈 가능성 따위는 머리에 없을 겁니다. 누구에게 밀릴까요? 와일드 카드 팀 슈퍼매시브? 푸켓에 여행 갔다 와서 죽만 쑤는 G2? 북미팀 CLG? 말도 안 되죠. 셋 다 이겨본 팀입니다. 사실상 플레이오프 진출은 이미 따 놓은 것이나 다름 없고, 의미 있는 측면은 1등이냐 2등이냐 혹은 그 아래냐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별리그에서 무리하게 전력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단 겁니다. 플레이오프는 13일부터 15일까지 단 2일동안만 진행됩니다. 최악의 경우 SKT가 비밀병기를 3-4위전에서 공개한다고 쳐도, 전날 플레이오프에서 본 걸로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페이커 르블랑 저격조합의 경우 '페이커의 르블랑'이라는 유서 깊은, 거의 몇 달 묵은 챔피언이 이미 존재했기 떄문에 가능했습니다. 올해의 페이커는 상징 챔피언이 없습니다. 결승전 5경기에서 페이커가 뭘 할지는 2015년이라면 사람들이 전부 '르블랑!'이라고 했겠지만, 올해라면 아무도 말 못할 겁니다. 조별리그에서 전력을 노출할 경우는 10일이라는 준비시간이 주어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노출했을 경우는 달랑 하루입니다. 어느쪽이 이득인지는 명백합니다.
2번의 답에서 FW전의 픽밴이 갈리게 됩니다. 2일차 FW전 첫 경기에서 승리하면 물론 기분은 좋을 겁니다. 선수들이 인벤에 미쳐 날뛰는 악플로 고생하지도 않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플레이오프에 갔을 때 과연 RNG나 FW가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겁니다. 또한 조합에 대한 자신감 역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RNG 상대로 60분이나 비벼서 사실상 승패는 엄대엄인 상태로까지 끌고간 조합이고, FW는 아무리 봐도 RNG보다 나은 팀은 아니거든요. 따라서 꼬치는 1. 이번 경기에서 지더라도 남은 4일의 경기에서 충분히 만회 (3일차와 5일차의 2차전에서 2승을 한다는 가정 하에, 득실차에서 완전한 우위에 있습니다. 60분은 초장기전입니다.) 할 수 있다. 2. 블랭크의 챔프 폭 페이크가 예상대로 먹혀들어갈 경우, 상대 팀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인 니달리를 밴한다던가, 혹은 픽밴할 때 변수의 하나로서 기능하는 그 이득이 리스크보다 크다. 고 판단했고, 저 준비해온 조합을 탐켄치만 트런들로 바꿔서 내보냈습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실패했긴 합니다만, 전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전략이라고 봅니다. 실패한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미드정글의 컨디션(특히 페이커가 오늘 좀 안 좋았죠.)과 블랭크의 1경기 이후 흔들린 멘탈이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