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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구상, 가장 사나운 짐승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정우, 이 슬픔을 팔아서
이 슬픔을 팔아서
조그만 꽃밭 하날 살까
이 슬픔을 팔면
작은 꽃밭 하날 살 수 있을까
이 슬픔 대신에
꽃밭이나 하나 갖게 되면
키 작은 채송화는 가장자리에
그 뒤쪽엔 해맑은 수국을 심어야지
샛노랗고 하얀 채송화
파아랗고 자줏빛 도는 수국
그 꽃들은 마음이 아파서
바람소리 어느 먼 하늘을 닮았지
나는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 하날 살꺼야
저 혼자 꽃밭이나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하며 살꺼야
나희덕,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 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서정홍, 이른 아침에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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